어둠 속의 도약을 요구하는 타자와의 소통
김승영 전
12.5-2008. 1.20 | 웨이방 갤러리
12.8-12.30 | 아트 팩토리)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장면들을 담은 액정 화면들이 꽃처럼 흐드러지게 만발한 전시장 안은 벽 안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수많은 언어들과 더불어 소통에의 파토스로 가득하다. 몇 년 전에 헤이리에서 본 김승영의 작품은 자아의 독백을 은은하게 반향 하는 선(禪)적 공간이 특징적이었는데, 당시의 초월적 공간을 대신하는 것은 번쩍거리는 송수신 기기들이다. 화분을 이루는 핸드폰 주조 금형들이나 꽃에 해당되는 액정화면들은 매순간 손안에서 놀리는 기기들을 소재로 한 터라, 관객들은 보다 친숙하게 작품을 대할 수 있다. 이전의 추상적 어법은 보다 구체인 어휘를 갖추었다. 디지털 미디어와 설치가 결합된 이번 전시의 화두인 소통은 타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자아는 진정한 짝을 찾아가고 있다.

김승영은 현대사회의 갖가지 병폐의 원인을 의사소통의 부재에서 찾는다. 소통의 부재는 타자와의 공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전시부제인 ‘세상의 꽃’은 자아의 독백이 아닌, 타자들과의 향연을 적절히 압축하는 말이다. 전시장 가운데 놓인 가장 큰 작품 [세상의 꽃]은 갖가지 모델의 핸드폰 폐 금형으로 만든 화분과 그 속에서 꽃으로 자라나는 듯이 보이는 액정화면들이다. 작가는 핸드폰 폐 금형을 쌓아 만든 화분에 바벨탑의 느낌을 주었다고 말한다. 액정화면이 꽃봉오리가 되는 기계 꽃들은 정적이고 관조적인 모양새가 아니라, 중심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입자들이 튕겨나가는 듯한 잠재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무려 2000여장의 사진이 저장된 액정화면은,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 지인들이나 기업에서 후원받은 사진 등이 포함된다. 이 꽃들은 세상의 다양한 가치를 유통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상징한다.

전시장 벽면에 설치된 많은 스피커에서는 각 나라의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동시적으로 흘러나온다. 작품 [hello]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대개 소통을 시작하거나 시도하기 위한 말들이다. 그 중 하나에서는 아버지가 아이에게 외국어로 오래된 시를 들려주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온다. 고풍스러운 꽃병 위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꽂혀있고, 그 사이사이에 액정화면 봉오리가 꽂혀있는 [세상의 꽃 2]에서, 자연과 인공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액정화면으로 상징되는 통일된 코드화 이외의 또 다른 방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화분에는 이례적으로 단 한 송이의 액정 꽃이 꽂혀있다. 센서에 의해 움직이는 그것은 연신 고개들 좌우로 움직이면서 교신할 대상을 찾는 듯하다. 마치 전파 수신이 잘 되지 않은 장소에서 수신기가 공중에서 전파를 탐색하는 모습이다.

벽에 걸린 작은 모니터 두 대에서 나란히 동영상이 나온다. 하나는 하늘 위의 구름이 조금씩 움직이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장면이 나오고, 다른 하나는 고층 빌딩에 누드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장면이다. 포커스를 흐리게 하여 규칙적으로 수직 배열된 조명등 사이를 왕복하는 승강기의 흐름이 경쾌한 리듬(사운드; 오윤석)에 실린다. 인간을 끊임없이 위아래로 실어 나르는 기계는 복잡하게 연결된 서버의 점멸등처럼 반짝거린다. 기하학적인 구성방식을 가지며, 단 하나의 통로를 가질 뿐인 승강기의 수직 이동방식은 체계로의 집중과 단일한 게임원칙으로 환원되곤 하는 현대적 삶을 압축한다. 반면 그 옆의 불확실한 경계를 가지는 조각구름은 코드와 체계를 벗어나는 타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어떤 도약의 상태를 보여준다.



작가는 승강기로 대변되는 문명의 이미지를 아웃 포커스를 주어 시적인 뉘앙스를 담았고, 구름으로 대변되는 자연의 이미지에서는 마술적이고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포착하였다. 승강기가 도착할 정확한 층수처럼 딱딱 떨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구름 잡는 소리처럼 모호한 것들도 있다. 김승영의 작품에서 타자와의 소통 욕망은 자아의 추구와 전혀 다른 것이거나 별개의 길은 아니다. 자아에는 타자가, 타자에는 자아가 포함되어 있다. ‘동일자는 타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만 동일자’(데리다)이며, 모든 현전에는 그것을 둘러싸는 부재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룬 벵상 데콩브는 [동일자와 타자]에서 동일자는 타자와 다른 것으로 설정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물이 진실로 사물이 되기 위해서는 또한 그 자신과 다른 것이 되어야만 한다. 동일성을 가지는 사물의 실체는 차이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가 대거 동원된 이 전시의 어법과 비교하자면, 자아(동일자)는 타자와 소통하고자 하며, 코드로의 체계화는 역설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불러들인다. 보편적 소통 수단이 된 인터넷을 통해 이전 보다 더 많은 기이한 메시지나 이미지들이 떠다니는 예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보편적 소통에의 꿈은 전 세계인이 빠짐없이 고기능 핸드폰을 가지고 하나의 보편언어(영어)로 소통하는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일까. 사실 그런 꿈은 기업가의 꿈에 가까운 것이다. 반면 예술가의 꿈은 다양한 소통 네트워크를 통해서 백화만발한 헤테로피아의 세계를 향유하고자 한다.

둘 다 이상적인 소통을 꿈꾸지만 전자는 동일자의 논리를 확산시키는 경향이 있고, 후자는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 더욱 가깝다. 대개 전자는 전쟁으로, 후자는 평화로 귀결된다. 예술은 본래부터 그랬던 듯하지만, 현대철학에서 타자에 대한 배려는 각별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모든 이론화 작업은 형식화 체계화 바깥에 있으면서 망각되었던 타자로부터 비롯된 가상적 구축물이라고 주장한다. 체계 바깥에 있으면서 그 내부로 내면화될 수 없는 타자는, 체계 자체를 존립하게 하기 위해 부단히 소통되지 않으면 안 될 존재이다. 김승영 역시 그런 타자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하려 한다. 여기에서 타자는 나와 완전히 다른 절대적 타자(가령 신)가 아니라, 규칙의 공유가 합의되면 소통할 수 있는 세속적인 타자를 말한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인다.

높이와 방향을 다르게 한 채 뻗어있는 기계 꽃들은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상호교차 공간을 지향한다. 그곳은 같음 보다는 차이가 횡행하는 지대이다. 맞은 편 벽에서 울려 퍼지는 다양한 언어의 목소리들은 ‘공통의 규칙 없이 일어나도록 조건 지어진 의사소통의 형태, 다시 말해서 그것은 동일한 규칙들의 집합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타자)과의 의사소통’(고진)을 가리킨다. 가라타니 고진은 한 무리의 공통규칙들 속에서 진행된 대화는 타자와의 대화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김승영의 작품에서 서로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목소리들, 특히 아이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나지막한 소리가 강조하는 바가 그것이다. 아이들은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의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를 따라, 타자를 도입한다는 것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비대칭 관계를 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한 상황에 대한 적응은 미리 정해진 방법이 아니라, ‘어둠 속의 도약’(비트겐슈타인)을 요구하는 모험이다. 타자와의 소통은 하나의 동일한 규칙 안으로 내면화될 수 없는 다른 무리들의 규칙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무수한 존재 양태를 가지는 김승영의 ‘세상의 꽃’들은 가지각색으로 뒤얽혀 있는 하나의 묶음을 상징한다. 비록 그것들이 서로 번역(교환)될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들은 똑같은 체계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벽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김승영의 한 작품은 공통의 어떤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를 설정한다.

꽃과 기계 꽃이 뒤섞여 있는 화병도 ‘유사한 것들이 서로 겹치고 엇갈리는 복잡한 그물’(비트겐슈타인)을 이루며, 하나의 중심으로 모일 수 없는 다 체계를 보여준다. 언어들 사이에 있는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입장이란 없다. 그것은 이질성을 강조하며, 타자와의 관계가 지니는 우연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은 모든 의사소통이 이미 암묵적으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를 기본조건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는 대칭이 아니라 비대칭적인 관계를 가진다. 진정한 대화는 비대칭적이다. 유아론이란 비대칭성을 생략하여 나와 우리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반면 진정한 대화란 어떠한 무리의 공통규칙들도 공유하지 않는 타자와 마주서서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문법과는 무관한 모국어의 습득에서처럼 규칙의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 안에선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어떤 도약이 일어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을 판매할 때 최소한 한번 이상은 거쳐야 하는 도약(때로는 생명까지도 걸어야 하는)과 비교한다. 결국 타자와의 진정한 소통은 형식적 체계, 논리와 문법, 공평무사한 구조--대략 민주주의나 계몽, 이성이 요구하는 것들--가 아니라, (비합리적)도약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기술 이상의 것, 즉 예술의 힘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승영의 작품은 우리의 머릿속과 머리 위로 수많은 메시지들이 떠다니는 글로벌 시대에 작가가 개입할 적절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출전 | 경기문화 재단 시각예술 부문 지원 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