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수는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50세가 넘어서야 첫 개인전(2006년, 코엑스)을 연 늦깍이 화가이다. 비록 시작은 늦었지만, 올해에만도 개인전을 두 번이나 치루고 앞으로 대학원 진학도 준비하고 있는 열성파다. 생활인으로 바쁘게 살아오느라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지는 몇 년 되지 않았고 그림만을 가지고 치열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유아교육과 미술치료 등을 공부하고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등, 미대 졸업 후 30년 동안 미술과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요즘 발표한 작업이 그녀가 전공한 통상적인 동양화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자연을 소재로 하고 넉넉한 여백을 가로지르는 선적 표현은 동양화와 유사하며, 주로 쓰는 수채와 아크릴은 동양화의 재료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첫 개인전에는 요즘에도 계속 그리고 있는 양귀비를 소재로 하였다. 양귀비가 꽂혀있는 정물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린 수채화 [뽀삐]는 앞으로의 변화무쌍한 변주를 예고하는 듯하다. 이 전시에서 울긋불긋한 양귀비와 더불어 풍경을 수채화로 서정적으로 표현한 [그리움] 시리즈를 발표하였다. 작품들은 명확한 경계를 갖지 않고 공간에 색채가 아련히 번지는 화려함이 특징이다. 2007년 5월에 치룬 2회 개인전에서 양귀비는 본격 소재로 떠오르고, 재현주의에서 더 많이 벗어난다. ‘자연의 행복한 조율’이라는 부제로 열린 이 전시에서 작품들은 색색의 양귀비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구불구불한 줄기들이 리드미컬하게 배열된다. 꽃이 놓여졌을 배경은 희미하게 처리하여 세세한 재현보다는 주관적인 감정 표현에 주력했다.

작품 [꿈길] 시리즈는 사람들이 봄날 따뜻하게 느끼는 환상을 표현하고 있다. 구름이 떠있는 단색조의 배경을 가득 메우는 작은 선들이 위로 양귀비가 펼쳐져 있고, 사이사이에 작은 인간들이 배치된다. 작품 속 인간은 건축 설계 때 사용하는 미니 인형이나 지점토 인형 사용한다. 인물들은 대체로 익명적이지만, 작가를 연상시키는 인물들도 나온다. 인간 형상을 그려 넣지 않고 그림의 재료와 다른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작은 움직임 속의 도드라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배경에 완전히 파묻히지 않으면서 어우러지는 것 등을 표현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인물은 관조적인 자세를 가진 것도 있고 함께 어울리는 듯 활동적인 자세를 가진 것도 있다. 인물들은 동양화에서 풍경 속에 묻힌 작은 인물들을 떠오르게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들은 화면에 활기와 현대성을 부여한다.

인간과 꽃의 스케일의 차이 때문에 양귀비가 기념비적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크지 않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여백효과가 두드러진다. [행복한 조율] 시리즈는 화면 가득히 양귀비를 클로즈 업 되어 마치 거대한 눈동자처럼 관객을 마주본다. [꽃비 내리는] 시리즈는 화사한 색채가 특징적이다. 화면 전면으로 반추상화 된 양귀비들이 배치되고, 꽃의 구불구불한 줄기를 반향 하는 배경의 꿈틀거리는 작은 선들은 아지랑이 같은 생명의 기운을 전달한다. 화면은 더욱 평면적이고 장식적이 된다. [속삭임] 시리즈는 화면에 의해 잘려진 양귀비의 귀퉁이를 통해 장면이 화면 바깥까지 연결되는 효과를 준다. 클로즈업과 과감한 커팅의 활용, 극단적인 스케일의 차이를 통해 소재가 집중되면서도 다양한 효과를 낳는다. 

[축제] 시리즈에서는 세로, 또는 가로로 구획된 추상적 색 면이 특징적이다. 그 위에 양귀비의 줄기에서 나온 선이 흐르고, 분할된 화면의 나머지는 거대한 우주적 밤을 이룬다. 이 무한한 공간에서 양귀비 꽃망울은 빛나는 별자리처럼, 또는 폭죽처럼 터진다. [그리움] 시리즈에는 화면 안에 또 다른 사각형이 보인다. 그 안에 패턴화 된 양귀비는 그림 속의 그림같은 효과를 준다. 그 바깥의 면은 붓질이나 흐르는 선을 남겨두었다. 사각형 안에 배치된 여자, 더 넓은 사각형 안에 배치된 남자의 모습은 거세게 흐르는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그림 안에 온전히 있고 싶은 작가의 소망이 표현된 듯하다.

[이브의 숨결] 시리즈는 화면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양귀비와 이를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선 위의 사람이 보이는데, 양귀비가 압축된 미의 상징 같은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아름다움과 단도직입적으로 교류하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 드러나 있다. 저 높은 곳을 향하고 있는 거대한 양귀비 줄기는 지하와 지상, 그리고 하늘이라는 3계(界)를 연결시키는 신비로운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올 11월, 국제 인천 여성미술비엔날레에 출품한 [행복한 조율] 시리즈는 단색조의 바탕에 선으로만 그려진 양귀비이다. 줄기가 중간에 잘려있기도 하고 줄기 없이 꽃만 떠있기도 한데, 마치 끈이 끊긴 채 하늘로 날아가는 거대한 풍선 같은 느낌을 준다. 연이어 열린 4회 개인전에도 몇 갈래로 나뉘어 진 추상적 색의 흐름을 가로지르며 배치된 양귀비와 그 내부에서 노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요즘 작품의 주요 소재인 양귀비를 그린 지는 10년이 된다. ‘뽀삐’라고도 불리 우며 ‘행운’, ‘행복’이라는 꽃말도 가지고 있는 양귀비는 일상 속에서 찾아가는 잔잔한 행복을 지켜보고 있다. 편안함과 따뜻함, 어우러짐, 화합 같은 사랑과 행복의 분위기가 있는 작품 분위기와 걸 맞는 소재이다. 그러나 작가는 탐스럽고 화려한 꽃보다는 줄기에 보다 집중한다. 꽃을 뒷받침하는 줄기는 굴곡이 심한 선을 가지고 있으며, 뒤엉킨 줄기들은 서로 다른 삶의 굴곡이 어우러지는 인상을 준다. 직선이 아닌 곡선은 인생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우회로를 상징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작가는 ‘너 어디에 있느냐’라는 성경의 말을 되새기며, 매순간 자신이 제대로 된 선(길)을 가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한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 선들은 ‘기운, 바람, 사랑, 소통, 통로’를 상징한다. 풍경을 그릴 때도 고향(충청도) 산천의 나지막하게 흐르는 선에 집중한다.

권한수의 작품은 식물적 삶이 반영되어 있다. 식물은 자생능력이 있기에,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 없이 스스로 방어하며 환경에 적응한다. 식물적 삶은 동물적 삶에 비해 에너지 소모가 적다. 식물에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환경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가 담겨있다. 식물은 동물과 같은 변화무쌍하고 극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지만, 자신이 뿌리내린 곳에서 주변을 아우르며 살아간다. 식물학자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예수를 비롯하여 다른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자주 식물에 비유해서 설교한 것은, 오직 식물만이 모든 의미에서 인간의 물질적인 조직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적인 삶의 방식을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오직 식물의 세계만이 물질적인 죽음을 넘어서 존재하는 영원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브로스는 부활에 대한 모든 신앙은,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 식물들에게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삶의 절대성을 보여주는 증거를 다른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한 알의 씨앗 속에 담긴 힘의 참모습은 성장주기가 짧은 식물일수록 확연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식물에서 개화란 그 식물의 쇠퇴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며 종국적으로는 죽음을 예고한다. 권한수가 즐겨 그리는 양귀비꽃은 탐스럽고 아름다우나 오래 피어있지는 않는다. 가느다란 줄기 위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듯 얹혀있는 달걀모양의 꽃받침 속으로 뭉쳐진 꽃잎들이 드러난다. 번데기 상태에서 날개를 펴고 나오는 나비의 날개처럼, 꽃잎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끊임없이 지속되는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점차 구김살이 펴지면서 펼쳐진다.

자연적인 면 못지않게 인공적인 면모를 강하게 풍기는 양귀비는 일찍이 인공낙원을 이룰 수 있는 수단으로 주목 받아왔다. 양귀비의 홀씨주머니에서 채취된 흰 수액은 아편으로 가공될 수 있다. 브로스는 기원전 3000년쯤 제작된 석판에는 양귀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수메르 문자로 양귀비는 식물과 행복을 의미하는 두 개의 표의문자로 표시된다고 말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볼 때 당시에도 이미 인간들은 이 식물의 용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음을 드러난다. 그리스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양귀비를 진정제로 사용하였고, 기원전 3세기의 테라코타에는 비옥한 대지를 상징하는 데메테르 여신이 양손에 곡식 이삭과 양귀비 열매를 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정과 진통이 과도하면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자기 파멸에의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중독과 자기 삶을 유지하면서 행복한 여행의 느낌을 줄 수 있는 이상적인 균형점이 어디에 있을까. 권한수에게 양귀비는 예술과 삶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는 적절한 균형에 대한 탐구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출전 | 미술과 비평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