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이미지의 역사는 원시시대의 동굴벽화부터 시작되지만, 제도로서의 미술, 가령 미술관 속의 미술품과 이론으로서의 미학, 미술사, 비평 등이 탄생한 것은 근대에 와서이다. 미술에 대한 개념 역시 신화, 철학, 종교 등의 사고에 총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가, 근대에 와서 자율화된다. 이후 주기가 부쩍 짧아진 여러 미술 운동의 강령 속에는 각자 다른 사조와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개념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근현대미술은 모두 개념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본래 지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각에 호소하는 미술은 개념적 속성이 있다. 하나의 사조로서의 개념미술은 근현대미술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의 개념적 속성을 더욱 자의식 적이고 가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개념미술은 세계대전 이후 극도로 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 분위기에 휩쓸린 시기에 그 맹아가 잠재해 있었고, 모든 것이 용인되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1960-70년대에 만개 하였다. 그것은 1980년대 이후에도 다원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완된 문화의 흐름 속에서 또 다른 변종으로 존속하고 있다.
미술에서의 새로운 개념은 급진적 입장에서 미술을 제로베이스에 놓고 예술을 삶과 일치시키며,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고 나선 사조들이 등장할 때마다 호출되었다. 미술은 사조에 따라서 현실의 재현, 자아의 표현, 형식의 구성, 또는 해체 등으로 다양하게 변모해왔지만, 그것들과 ‘개념미술’이라고 불리 운 사조의 차이는, 후자가 예술가의 전문적 솜씨가 결정화된 최종적인 산물보다 예술가의 의도에 방점을 찍어준 점이다. 산물이 아닌 의도가 강조됨으로서 미술의 범위는 무한대가 되었다. 예술가는 화장실에서 주워온 더럽고 흔해 빠진 물건도 작품으로 선언할 권리가 있다. 현대미학이나 미술사 책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마르셀 뒤샹의 [샘]은 개념미술의 의미를 상징적 전달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선언적으로는 모든 것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던 만큼, 그 누구도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좌대 위에 올려진 조각이나 액자 안에 끼워진 그림, 그것들을 모두 모아놓은 미술관은 부정되었고, 더 이상 미술은 솜씨와 기능이 아닌, 구상, 의도, 태도, 이념, 또는 상황에 놓여졌다.
개념미술은 손수 제작하려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의 미술가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전통의 무게는 물론, 본격 소비사회를 가득 채워가던 물건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으며, 그들을 에워싼 환경에 대해 메타적인 차원에서 반성할 수 있었다. 감각보다는 개념을 중시하는, 다소간 금욕주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경향은 ‘세상은 흥미로운 물체들로 가득하기에 더 이상 덧붙이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던 개념미술가의 말에 압축되어 있다. 상품이나 물신으로 귀결될 최종산물 보다는 예술의 창조적 기능을 중시한 것이다. 그러나 개념미술은 개념이 구체화될 최소한의 매체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 미술관 또는 미술관 밖에서 실행된 개념미술은 비록 그림이나 조각의 형식은 아니었지만, 이내 사진, 동영상, 텍스트, 스케치 등으로 작성된 자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개념미술이 사용한 다양한 매체 중에서 언어의 사용이 핵심적이었다. 개념미술의 관람자는 자료들을 해독해야 한다.
그러나 독단주의를 벗어나 무한한 개방을 지향 하는듯한 개념미술은 그것이 극복하고자 했던 다른 사조와 마찬가지로 한계에 봉착했다. 비평가 수지 개블릭이 지적하듯, 넘쳐나는 선택적 상황 속에서 무의미함의 낙인이 미술에 찍혀진 것이다. 과도한 선택의 가능성은 실제로 가능한 혁신의 정도를 감소시키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모든 것이 미술이 될 때 미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위험이 있다. 솜씨와 결과물 대신에 관념과 의도를 중시하는 개념미술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의 정점이었을 뿐이었다. 작가의 의도만을 중시하는 것은 결과적 산물만 중시하는 것 못지않게 오류이다. 창작이나 수용의 과정을 살펴볼 때 의도와 결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에서 창조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또한 의도 역시 결과물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라고 볼 때, 개념미술의 혁신은 반쪽짜리가 아니었을까.
아카이브 형태로 수많은 자료더미를 늘어놓고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달라는 태도는 소통의 측면에서는 관람자에 대한 폭력일 수도 있다. 개념의 출발선으로 간주되었을 예술가 주체의 위상이 부정된 것도 아니다. 또한 개념주의는 물신주의마저도 완전히 거부하지 못했다. 유명한 개념미술가들의 작품은 오늘날 현대 미술관에 고이 모셔져 있고, 개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시장과 관료 제도를 이용하려는 전략 또한 팽배해 있다. 어떤 개념미술은 더 많은 돈과 더 막강한 제도와 더 많은 자원을 이용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시장과 제도는 거대한 완충장치가 되어 어떤 전위적인 예술가의 의도도 본래와 다르게 왜곡시켜왔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예술가일 수 있고 무엇이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한 이상주의 이거나 소박한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버타 스미스는 [개념미술]에서 개념주의는 예술을 민주화시키지도 않았고 유일무이한 예술품을 제거하지도 않았으며, 예술시장을 비켜가지도, 예술의 소유권을 개혁시키지도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독단주의를 벗어나 무한한 개방을 지향 하는듯한 개념미술은 그것이 극복하고자 했던 다른 사조와 마찬가지로 한계에 봉착했다. 비평가 수지 개블릭이 지적하듯, 넘쳐나는 선택적 상황 속에서 무의미함의 낙인이 미술에 찍혀진 것이다. 과도한 선택의 가능성은 실제로 가능한 혁신의 정도를 감소시키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모든 것이 미술이 될 때 미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위험이 있다. 솜씨와 결과물 대신에 관념과 의도를 중시하는 개념미술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의 정점이었을 뿐이었다. 작가의 의도만을 중시하는 것은 결과적 산물만 중시하는 것 못지않게 오류이다. 창작이나 수용의 과정을 살펴볼 때 의도와 결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에서 창조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또한 의도 역시 결과물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라고 볼 때, 개념미술의 혁신은 반쪽짜리가 아니었을까.
아카이브 형태로 수많은 자료더미를 늘어놓고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달라는 태도는 소통의 측면에서는 관람자에 대한 폭력일 수도 있다. 개념의 출발선으로 간주되었을 예술가 주체의 위상이 부정된 것도 아니다. 또한 개념주의는 물신주의마저도 완전히 거부하지 못했다. 유명한 개념미술가들의 작품은 오늘날 현대 미술관에 고이 모셔져 있고, 개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시장과 관료 제도를 이용하려는 전략 또한 팽배해 있다. 어떤 개념미술은 더 많은 돈과 더 막강한 제도와 더 많은 자원을 이용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시장과 제도는 거대한 완충장치가 되어 어떤 전위적인 예술가의 의도도 본래와 다르게 왜곡시켜왔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예술가일 수 있고 무엇이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한 이상주의 이거나 소박한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버타 스미스는 [개념미술]에서 개념주의는 예술을 민주화시키지도 않았고 유일무이한 예술품을 제거하지도 않았으며, 예술시장을 비켜가지도, 예술의 소유권을 개혁시키지도 않았다고 평가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개념의 의미를 다시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우선 개념미술에서 개념이란 철학적 뉘앙스가 강하다. 개념미술은 예술을 철학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이, 예술은 감각을 개념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 창조하는 것은 감각이지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미술이 개념에 집중한다 해도 그것은 개념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철학은 개념들을 끌어내는 반면, 예술은 지각과 정서들을 끌어낸다. 철학은 개념의 형태에, 예술은 감각의 힘에 집중한다. 철학과 예술은 서로 얽히지만 동일화되지는 않는다. 미술은 미술이라는 극점을 가지고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통해 인접 분야와 교차할 필요가 있다. 차이의 확인은 진정한 종합을 위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철학이 끌어내는 개념조차도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되는 것이며 창조되어야만 한다. 철학이란 개념들을 형성하고 창안하고 만드는 기술이다.
어떤 개념이 그 이전의 것보다 나은 것이라면 그 까닭은 그 개념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변주들과 울림들을 듣게 해주고 어떤 사건들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개념이 그렇게 창조적으로 정의되었을 때 비로소 예술과 관련될 수 있다. 창조로서의 개념은 추론이나 추론의 형식화, 의미가 제거된 명제, 또는 수사학과 거리가 있다. 그것은 감각들, 다시 말해 지각들과 정서들, 풍경들과 표정들, 비전들과 생성들이다. 세계를 가득 채우며, 또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감지 불능한 힘들을 감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체험된 것을 지각과 정서로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스타일이 필요하다. 조각가 자코메티는 시간과 공간 속에 정지된 그러한 비전들을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개념미술은 단순한 견해나 감정, 무질서들만으로 채워진 잡다한 자료들이나, 독단으로 기울여지기 마련인 투명한 소통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념들--현대미술은 토론과 논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을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개념미술은 미술 아닌 것들을 널리 품어내는 과정에서 정작 미술 자신을 이루고 있는 이질적 타자들을 발견한 공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개념이 그 이전의 것보다 나은 것이라면 그 까닭은 그 개념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변주들과 울림들을 듣게 해주고 어떤 사건들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개념이 그렇게 창조적으로 정의되었을 때 비로소 예술과 관련될 수 있다. 창조로서의 개념은 추론이나 추론의 형식화, 의미가 제거된 명제, 또는 수사학과 거리가 있다. 그것은 감각들, 다시 말해 지각들과 정서들, 풍경들과 표정들, 비전들과 생성들이다. 세계를 가득 채우며, 또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감지 불능한 힘들을 감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체험된 것을 지각과 정서로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스타일이 필요하다. 조각가 자코메티는 시간과 공간 속에 정지된 그러한 비전들을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개념미술은 단순한 견해나 감정, 무질서들만으로 채워진 잡다한 자료들이나, 독단으로 기울여지기 마련인 투명한 소통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념들--현대미술은 토론과 논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을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개념미술은 미술 아닌 것들을 널리 품어내는 과정에서 정작 미술 자신을 이루고 있는 이질적 타자들을 발견한 공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출전 | 문화+서울,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