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에게 알려진 그간의 김기라의 작품은 영상, 설치 작업이었다. 요즘의 고풍스런 정물 연작들은 다소 의외의 장르이다. 그러나 작가는 기법은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인데, 정물이 보여지는 방식이 그림보다는 설치에 가깝고, 작품을 관류하는 내러티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연속성을 가진다. 한편 역사적으로 성립되어온 한 장르를 차용함에 있어, 형식을 내용을 끌어다 담는 꾸러미(수단)로서가 아니라, 그 형식이 가지는 내부적 논리까지 파고드는 점에서 단순한 내용주의 미학과 차이가 있다. 고색창연한 황금색 액자틀에 담긴 다국적 기업의 생산물은 먹음직스러운 음식보다는 거대한 쓰레기처럼 보이며, 작가가 여기저기에 알레고리로 배치해 놓은 오브제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눈앞에 펼쳐진 스펙타클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도록 요구한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 친숙한 상표들은 일반적인 광고에서와 같은 깔끔하고 행복한 가상이 아니라, 어수선하고 임박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윤극대화를 위한 패스트푸드 제국의 견고한 구조는 헐거워지면서 관객의 이성적 판단과 행동을 요구하는 사건으로 극화된다.

김기라는 다른 작품에서도 ‘브랜드로서의 맥도날드 현상’을 다룬다. 여러 나라의 언어들이 혼합된 소음 속에서 유명상표만이 분명하게 들려오는 설치작품이나 국제경기의 무대에서 선수보다는 상표가 먼저 눈에 띄는 장면들을 그린 그림 등이 그것이다. 보편화된 상표로 상징되는 거대한 동일성의 논리에 의해 타자화 된 이들은, 이국땅에서 맨몸으로 구르다시피 고생하는 작가 자신을 포함하여 이주민 노동자, 애완동물 등이다. 서구인들이 일방적으로 타자화한 동양에 대한 이미지들(오리엔탈리즘)이 우스꽝스러운 수집품으로 진열되기도 한다. 피처럼 줄줄 흐르는 ‘we are the one’이라는 글자나 붉은색으로 바뀐 UN기는 결코 세계화라는 우산 속에 우리 모두 하나가 될 수 없는 상황을 예시한다. 진열장에 넣어질 수퍼맨 같은 대중의 영웅들은 모순해결에 무기력하다. 그것들은 정크 푸드로 상징되는 일상 속에 스며든 위험이나 자본의 이해관계에 의해 끊이지 않고 발발하는 분쟁지역의 비극들을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고풍스런 정물화가 세계화의 폐해가 횡행하는 현재의 상황과 연결되는 지점은 명확하다. 17세기 이후 북유럽에서 전성기를 맞는 정물화는 바야흐로 발원하기 시작하는 자본주의와 밀접하기 때문이다. 일상에 대한 세세한 재현은 새롭게 부각된 부르주아 계급의 생산의 거울에 해당된다. 유화로 재현된 정물은 사물을 사각의 금고 틀인 액자에 넣어 소유하는 형식이다. 존 버거는 [보는 방식]에서 유화를 소유 형식으로 파악한다. 그에 의하면 유화는 모든 것을 오브제로서 등가인 위치에 놓았다. 모든 것은 상품이 되었으며 교환가능하게 되었다. 모든 리얼리티는 그 물질성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계측되었다. 액자에 담겨진 정물은 만물의 코드화에 대한 시원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듯이, 액자형 작품은 시장이 융성하던 시대와 일치한다. 그러나 빛나는 감각주의 이면에는 삶의 허무함이라는 상징이 담겨있었다. 지상적인 것에 대한 화려한 찬미는 그 이면의 허무함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정물화의 어원에 속해있는 게르만어계의 ‘stilleven(움직이지 않는 생명)’과 라틴어계의 ‘natura morta(죽은 자연)’은 생명의 덧없음과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가 담겨있다.

물론 현대의 작품인 김기라의 정물에는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알레고리 보다는 사회학적인 분석이 두드러진다. 화면 안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1달러짜리 화폐(최소한의 단가)나 파리나 바퀴벌레(죽음, 질병)같은 이미지는 대량 생산과 유통 체계에서 그 거대한 구조의 일부로 순환 중인 저당 잡힌 인간들(저임금 노동자, 환자)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소우주 속에 압축된 소비의 체계에 대한 또 다른 정밀한 묘사인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세계화를 상징한다. 그의 작품 속 사물들은 전체적인 체계화라는 조직 원리를 통하여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공통점이 있다. 거기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고, 차려진 품목들도 지나치게 많다. 그것은 부재하는 실재에 대한 요란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김기라의 다른 설치 작품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상표들은 인간과 자연, 현실을 대체하는 기호들이 된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욕구나 합리적인 기능을 넘어서, 자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확장하는데 적합한 것만을 남겨놓는 자본의 생리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소비된 것은 결코 음식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그 자체라는 점에서, 김기라의 작품은 소비에 대한 문화적 탐구와 연결된다. 돈 슬레이터는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소비문화에 대한 연구는 평범한 일상의 망을 통제하려는 전투에 대한 이야기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하는 핵심 질문에 소비를 설정한다. 즉 그것은 소비 대상에 대한 접근은 어떻게 조절되는가, 일상세계에 제공된 재화의 특성을 결정하는 논리는 무엇인가, 욕구, 정체성, 생활양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정의되고 매개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김기라의 주요 타겟이 되고 있는 패스트푸드 제국은 합리적 통제와 노동의 자동화 기술 분업의 증가로 저 단위 비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표준화된 체계의 대표적인 예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세계화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사회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정치적 질서라기보다는 경제적 질서이기 때문에 세계 곳곳까지 침투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세계화란 경제적 상호관계가 극도로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성은 한쪽으로 쏠리는 부를 낳았을 뿐이며, 이는 다른 한쪽에 만연한 전쟁과 질병을 토대로 한다. 전 세계적 자본의 지배적인 코드가 명멸하는 김기라의 작품들은 물화reification된 현대사회의 병적 징후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출전 | 국립 창동 미술창작 스튜디오 작가 워크샵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