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화의 작품들은 관객을 향해 시각적인 덫을 놓는다. 덫의 유혹에 기꺼이 동참하는 관객에게 작품들은 흥미진진한 시각적 게임을 제안한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하나의 이상적인 시선을 강요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관객이 딛고 서있어야 할 정확한 지점이나 넘지 말아야할 선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관객은 작품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다양한 관찰지점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무쌍한 도형을 관찰할 수 있다. 작가가 숨겨놓은 아귀가 잘 맞춰진 장면을 포착하는 것은 시행착오와 우연에 의해서일 뿐이다. ‘another view’라는 전시부제에 함축되어 있듯이, 작품들은 또 다른 시선들을 창출하기 위한 조형적 실험의 장이다. 도상들은 실내나 실외의 모습을 담은 일상적 장면 같지만 반듯반듯한 선들과 평평한 색채 처리를 거친, 지각심리학의 실험에나 나올법한 기하학적 도상들로 채워진다.
이 전시에 앞서 열린 또 다른 개인전(‘view-to place’ 展, 갤러리 온)에서는 전시장의 모서리와 벽면에 직접 칠하는 방식으로 장소특정적인 작업이 행해졌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벽에 거는 형식을 취함으로서, 회화적 평면 안에 실험에 필요한 구성적 요소--보는 각도에 따라 변형되는 기하학적 형태, 미묘한 색상의 대조 등--를 담았다. 전시장 모서리같은 실제 공간을 이용할 때조차도 변형된 캔버스로 대응한다. 작품 [to place]는 작은 사이즈의 작품이지만, 이전 전시와 이번전시의 연결을 예시한다. 그것은 정면에서 보면 3쌍의 원들이 정렬된 형태인데, 내부가 드러난 상자 안에 그려진 원이 정면에서 아귀가 맞기 위해서 원은 원이 아닌 도형이 되어야 한다. 정면에서 원을 이루는 도형은 측면에서 보면 도형이 얹힌 입체를 타고 늘어지거나 축약된 모습을 보인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크게 보이는 작품 [red studio]는 탁자가 놓여 있는 붉은 실내를 그린 그림이다. 평온해 보이는 풍경과는 달리, 어느 시점에서 탁자 모서리가 들리면서 관객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다. 탁자 위에 놓인 오브제와 벽면에 걸린 작품 속 작품은 어느 시점에서 알아볼 수 있는 글자나 아귀가 맞춰진 도형으로 완성된다. 작품 [붉은 의자]는 [red studio]와 짝을 이룬다. 그것은 [red studio]의 탁자처럼, 붉은 패널 위에 선으로 완성된 의자 모퉁이가 어느 시점에서는 아귀가 맞고, 또 다른 시점에서는 어긋난다. 의자의 형태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 툭 튀어나온 의자 모서리는 입체이면서도 어떤 각도에서는 평면으로 배열된다. 작가는 [red studio]에 대해, 마티스의 붉은 스튜디오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스튜디오도 붉게 칠하고 싶다고 말한다. 붉은 바탕은 작업실의 벽면이 되고, 그 위에 붙어있는 것은 붉은 실내 속의 또 다른 작품이다.
그것들은 부조처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구조이다. 붉은 실내가 전시장 안의 또 다른 공간이듯, 이 부조적 오브제는 작품 속의 작품이 된다. 테이블 위에 글자 형태의 부조도 마찬가지이다. 블루와 그린의 중간색으로 바탕 면을 칠한 작품 [studio]는 정면에서 볼 때 나무 패널 위에 붙은 두 개의 하얀 집이다. 그 위에 그어진 수직 수평, 사선들이 어지러운데, 그것은 여러 개로 교차된 좌표축들이다. 그러나 비껴 선 어떤 지점에서 볼 때 어지러운 선들은 좌측 끝 소실점을 향해 정렬한다. 정면인가 측면인가에 따라서 집을 가로지르는 수직 수평선이 다르게 보인다. [blue studio]는 붉은 스튜디오와 보색관계에 있는 또 다른 실내로, 캔버스는 전시장 모서리를 따라 접혀있다. 어느 시점에서 비껴볼 때, 모서리의 벽 너머로 연장되는 선들로 인해 블루 스튜디오 또는 전시공간은 확장되는 듯이 보인다. 그 위에 걸린 입체도 어느 시점에서 보면 하얀 원 세 개가 아귀를 맞춘다.

황은화는 오목하거나 볼록한 공간에 평평한 선이나 형태를 만들려 한다. 작가는 ‘방향이 각기 다른 벽과 바닥을 하나의 시선으로 묶어내고 이어낼 수 없을까’를 고민한다. 평평하지 않은 실제의 벽이나 캔버스 안에 장치된 부조의 굴곡 역시, 3차원과 2차원을 교차시키려는 기본 장치인 셈이다. 전형적인 원근법이 예시하듯, 회화가 2차원 평면에 3차원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황은화의 작품은 3차원의 세계에서 2차원의 이미지인 평면이 보이도록 한다. 입체에서 평면이 보여 지거나, 평면에서 입체가 보여 지는 것은 착시나 왜상anamorphosis의 원리와 연관된다. 평론가 김성호는 이전 전시의 평문에서, 황은화의 작품을 두 시선이 겹쳐지는 왜상의 원리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왜상은 하나의 시점에 배반해서 끼어드는 또 하나의 시선이며, 이 또 다른 시선들을 통해 타자의 시선들과 교류한다고 본다.
하나의 고독한 시선이 아니라, 수많은 방향에서 꽂히는 시선들의 향연으로 황은화의 작품은 겉보기의 딱딱함과는 달리, 어린이들도 즐길 수 있는 유희적 요소가 있다. 사실 그림은 원래부터 착시이다. 작가는 이 착시 유발적 요소를 두드러지게 하면서, 시각을 통한 상호 작용을 꾀한다. 심리학자 로저 셰퍼드는 [마음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한 그림은 이차원 표면에 가해진 표식들의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평평한 그림에서 삼차원 장면들을 본다는 것은 눈을 속여서 보도록 하는 것이다. 지각은 이 세상에 대한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이다. 삼차원 세계의 물체들과 그 기하학적 배열에 대한 정보는 진화론적으로 인간의 생존에 중요하다. 착시는 삼차원 세상을 해석하기 위해 진화되어온 시각 과정들을 이차원 도판들에 적용할 때 초래된다. 작가는 모호하거나 불가능한 장면들을 통해 시각 이상visual anomaly을 초래한다.
황은화가 시각 이상을 초래하는 방식은 3차원 장면을 구현하면서 그림을 투시하는 암묵적인 눈구멍, 즉 암시된 관찰지점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셰퍼드에 의하면 관람자의 지각반응은 시각체계가 암시된 관찰지점의 위치를 무의식적으로 계산한데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택하는 관찰지점은 필연적으로 그 묘사의 내적 일부로 남아있게 된다. 그 다음부터 이러한 암묵적인 관찰지점은 그 그림이 지각되는 방식을 결정한다. 또한 황은화는 기하학적 요소들을 활용함으로서, 불완전한 감각정보를 해석하는 시지각의 구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마음의 시각]의 저자가 속해있는 심리학적 구성주의 학파는, 지각과 인지 과정 배후의 자동적, 구성적 및 표상적 특성들을 중시한다. 구성주의자들은 생물학적인 진화와 개체의 학습 경험의 결과로 유기체가 그 자신에게 중요한 어떤 물리적인 자극 패턴에 공명하는 성향이 있다고 본다. 깊이 해석에 기초하는 착시는 삼차원 세계에서 우리 조상들이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진화된 지각의 기제들이라는 것이다.
착시는 불완전한 감각정보들이 3차원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인류의 격세유전적인 기억과 학습에 의한 정보에 의해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추리된다. 셰퍼드는 생존에서 살아남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이러한 장치는 자기 주변의 삼차원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해석하게 한다고 말한다. 가령 황은화의 작품에서 도형이 아귀를 맞추는 식의 대칭성과 규칙성은 뇌에 깊숙이 박혀는 공간적 변형들을 반복해서 적용하기 때문에 생긴다. 구성주의적 심리이론은 인간의 지각체계가 이 세상에 관해서 가장 널리 퍼져있고 지속적인 규칙성을 내면화한다고 본다. 우리 조상들이 진화해온 삼차원 세계에서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물체와 사건들을 알아차린다. 미술은 어떤 다른 것, 즉 삼차원 세계에 있는 보통의 물체들과 사건들을 표상하기 위해 진화한 신경회로들을 흥분시키려고 인위적인 이차원 패턴을 사용한다.

작가는 특별히 고안된 시각적 판을 이용하여 착시 및 애매성이라는 시각 이상을 만든다. 지각이 항상 직접적으로 진실성이 있다면 사람들은 착시같은 시각이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애매성이야말로 미술이 가진 무한한 풍요함의 주요 원천이다. 예술작품 앞의 관객들은 매번 그 패턴에 내재한 다른 관계들을 택함으로서, 작품의 풍부한 뉘앙스를 유발하고 이 차이들을 즐기려 하는 것이다. 평면과 입체 사이의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심리학적 인지라는 면에서, 황은화의 작품은 원근법적 투시를 넘어 선 무언가가 있다. 거기에는 시선과 응시 사이의 분열이 있는 것이다. 자크 라캉의 현대적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시각이 보기만 하는 시선eye이 아니라 보여짐gaze이 함께한다고 주장한다. 의식적 사유보다는 무의식적 욕망을 강조하는 라캉은 [시선의 응시와 분열]에서, 무의식적 응시가 의식적 시선에 앞서 존재한다고 본다. 나는 한곳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모든 방향에서 보여 진다.
분열이란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접하게 되는 한계성을 의미한다. 라깡에 의하면 응시는 시야에서 우리가 발견할 것을 상징하며,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접하게 되는 경험이다. 사물과의 관계가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재현의 여러 형태들로 배열될 때 무엇인가가 빠져나가고 사라지고 단계별로 전달되며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응시이다. 라깡적으로 해석하면, 황은화의 작품은 환상에 불과한 궁극적인 응시의 지점으로부터 주체를 떼어놓는다. 응시와 시각의 분열에 의해 시각적 충동이 생겨난다. 회화적 모방은 시선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대상과 실체를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내가 인식하자마자 내가 재현한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주는 주체의 특권을 폐지한다. 라깡에 의하면 정신분석은 의식을 매우 제한된 것으로 간주한다.
주체가 의식이 아니라 욕망에 경도될 때, 하나의 재현은 사라지고 타자가 출몰한다. 시선은 평면적이지만 응시는 빛의 유희와 관련된다. 빛은 굴절되고 확산되고 넘친다. 황은화의 작품은 시선에 대한 응시의 승리를 보여주는데, 시선과 응시의 이러한 관계가 의미하는 바는, 그녀의 작품에서도 구사되고 있는 왜상에 대한 라깡의 해석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라깡은 [왜곡된 형상Anamorphosis]이라는 논문에서, 주체의 기능이 데카르트적 사유에 의해 가장 순수한 형태를 띠게 된 바로 그 때 원근법에 반대되는 평면광학이 개발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지적한다. 시각적 배열은 공간 속에 있는 두 물체의 점 대 점 대응을 의미한다. 빛의 경로인 직선에 의해 점과 점이 대응될 때 나오는 것이 이미지이다. 그것은 원근법으로 집약될 수 있는데, 평면적 원근법에 의한 구성은 시각과는 별 상관이 없다. 평면적 원근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는 것sight이 아니라, 공간의 배열이기 때문이다.
반면 왜상의 구조에서는 원근법이 거꾸로 사용된다. 원근법을 거꾸로 사용하면 세계가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이미지가 다른 면에서 왜곡되어 다르게 나타난다. 라깡이 예를 들고 있는 것은 홀바인의 [대사들]이다. 그는 두 인물 앞에 놓여있는 비스듬히 매달려 있는 물체에 주목한다. 비스듬히 보았을 때에야 해골로 드러나는 그것은, 평면 시각으로 볼 수 없다. 해골은 공간과 욕망이 개입되어야 비로소 드러난다. 여기에서는 살아 맥이 뛰는 듯한, 아찔하게 확장된 응시의 기능이 나타난다. 이 그림은 모든 그림이 그러하듯 응시를 유혹하는 덫이다. 어느 그림에서나 응시의 각 점에서 응시를 찾는 바로 그 순간 응시가 사라져 버린다. 응시의 주체는 사유하는 의식의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주체이다. 그것은 현대의 작가 황은화의 작품에서도 드러나듯, 평면적인 시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매우 다른 시선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출전 | 경기문화 재단 시각예술 부분 지원 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