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렬 전
12.15-12.31 | 대안공간 소나무
2007년 말 안성의 한 대안공간에서 열린 이길렬 전은 ‘고도altitude’라는 주제로 열린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이다. 작가는 ‘고도’와 더불어 ‘pick up’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두 번(1999년, 2006년) 열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고도’ 시리즈의 집 모형들과 ‘픽 업’시리즈에 나타났던 발견된 오브제라는 개념이 긁은 사진들로 나타나면서, 두 갈래로 진행되어온 그동안의 주제를 수렴시킨다. 방을 연상시키는 전시 공간 바닥에는 주워온 판자로 만들어진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배열되어 있고, 벽면에도 드문드문 붙어있다. 산동네같은 빈민가를 돌며 찍어온 사진을 긁어 만든 평면작품들은 우연적 발견과 계획적인 조형성이 결합된 이미지들이다. 집 모형 역시 현실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연과 필연의 만남이라는 맥을 같이 한다.
빽빽하게 모여 있는 80여 채의 집들은 도심의 구체적인 지형도와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어떤 마을이 아니라, 그냥 집들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크기로 구획된 평면 속 이미지 역시 일련의 계열을 이루기는 하지만, 어떤 인과 고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입체(집)가 일정 고도에서 본 거시적인 차원이라면, 평면(긁은 사진)은 그 내부의 미시적인 차원으로, 양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룬다. 긁은 사진과 집들은 모두 장방형 또는 정방형으로 배치되었다. 집들은 아기자기하게 여러 모양새를 가지고 있지만, 설치방식은 사뭇 냉담하다. 그것은 아마도 아담한 전시공간에 많은 작품을 효과적으로 배열하는 방법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기계적인 배치는 재현이나 서술적 구조 보다는 개별적 형태, 또는 군집된 형태들 그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 ‘고도’가 일정한 거리를 둔 시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작품 소재인 판잣집들은 실제에 대한 축소 모형이기 보다는, 멀리서 바라본 풍경들임을 알 수 있다.

관객들은 그의 작품에서 빈곤과 소박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 조차도 설정된 거리를 통해 심미적인 것으로 치환된다. 이길렬의 작품은 구상과 준비 단계에 수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수집된 작은 물건들을 노끈이나 금속선 등으로 묶고 연결한 첫 개인전 [pick up](1999년)을 비롯하여, 색색의 폰폰볼, 말라빠진 열매, 어디서 잘려진지 알 수 없는 나무토막, 조개껍데기, 녹슨 물건 등 작은 폐물들을 모아놓은 [pick up 2](2006년)는 조형적 조합을 통해 버려진 물건들을 심미적 사물로 변환시킨 전시였다. 작고 하찮지만, 불현듯 작가의 눈을 찔러오는 것들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에 오르곤 한다. 이 정처 없는 여행자의 시점에서 인생은 다소간 심미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의 수집품들은 안정적으로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머무르는 이가 가질 수 없는 가벼운 보폭과 사심 없는 시선에 의해 포획된 것들이다.
이길렬의 수집품들은 무겁고 크고 진귀한 것들이 아니라, 가볍고 작고 흔해 빠진 것들이다. 물론 수집된 것은 그대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감흥을 어느 정도 보존한 채로 다시 조립, 조합, 조형화됨으로서 최초의 재료나 소재적 상태를 벗어난다. 그의 주요 작업인 집시리즈의 경우, 재료를 새로 사서 쓰는 것이 아니라, 눈 비 맞고 시멘트 가루와 페인트가 묻어있는 판자들을 주워서 사용한다. 작가는 실제의 집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므로 비닐이나 골판지 같은 재료를 섞어서 쓰는 것은 작품 의도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집 형태를 브론즈나 석고로 뜨면 색이 없어지고 형태만 남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 수집된 재료는 색을 따로 칠하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사용한다. 추레한 일상의 한켠을 찍고 일련의 선과 형태를 남기로 긁어내는 작업 역시 수집의 또 다른 형태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70여장의 긁은 사진들은 99년부터 틈틈이 해온 것이다. 그것들은 봉천동 같은 산동네의 오래된 집들과 주변을 사진 찍어서 선과 형태를 남기고 긁어낸 것이다.
작가가 고안한 조형적인 여과장치를 통해 금이 간 담벼락 등 누추한 생활환경은 마치 오랜 도자기의 균열과도 같은 운치와 여운을 가진 이미지로 변화된다. 작가의 심미적 태도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판자로 만들어진 풍경화들이다. 그것은 바닥이나 벽에 설치된 조각 작품의 회화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캔버스에 아크릴을 칠하고 바닥에 설치되어있는 집들과 같은 재료로 만든 장면들은 어둠에 잠긴 작은 집들 위로 달, 우주선, 전봇대 등이 색색의 면으로 드러나는 동화적 풍경화이다. 벽에 직접 붙인 집들은 삶의 중력을 이겨내고 둥 떠있는 듯 보인다. 작가는 집과 같은 재료로 그늘을 만들어 붙여, 무형의 가치를 물질적인 것과 동일한 비중으로 설정하고 있다. 수집된 불규칙적인 크기의 판들을 그때그때의 맥락에 잘라 맞춰 만든 집들은 컴퓨터 같은 정확한 계측 기구를 활용하지 않고 수년간 수백채의 집을 만들어온, 거의 체화되다시피 한 솜씨로 완성된 것이다.
이길렬의 작품은 집을 모델로 했지만, 현실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대략 1/20로 축소된 집들은 현실 속의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축소 모델의 개념이 아니다. 비눗물 칠한 떡이 더 맛있어 보이듯, 관념상의 집이 실제와 더 닮을 수 있다. 심지어 상상 속에서 만든 집이 현실 속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현실속의 집처럼 일정하게 패턴이 정해져 있다. 지붕과 담이 집 외곽의 기본을 이룬다. 실제와 비교해 본다면 지붕은 덜 튀어나오고, 담의 높이는 약간 낮아진다. 집의 크기는 대개 25x25cm 안쪽인데, 작가는 이보다 커지면 개집에 가깝고 더 작아지면 미니어처의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일정한 크기의 밀도 있는 집의 기본형에서 출발하여 가족 유사성을 가지는 수많은 집들은 유형별로 묶을 수는 있지만, 동일한 것은 없다. 여태 만든 집이 750개 정도 된다니, 조합의 방식은 거의 무한대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나는 일련의 형태를 완성해 놓고, 그때그때의 전시 맥락에 따라 집들을 선택하여 배치하는 식이다.

공산품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길거리나 공사판 등에서 주워온 판자를 정교하게 잘라 붙여 삶의 터전들을 재현하지만, 재료의 특성상 발견된 오브제의 느낌도 가지고 있다. 이는 작품을 전적으로 조형적인 것(필연성)만으로도,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만으로도 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족성을 지향하는 미적 형식주의와 우연적 삶으로의 트임 사이에 균형 감각이 발견된다. 이길렬은 우리의 초라한 삶의 구석들을 섬세하게 응시하지만 그 자체에 매몰되거나 감상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이 가져야 하는 절제, 즉 미적 거리감이라고 할 수 있다. 발견된 오브제와 그것을 가공하는 것을 통해 삶과 예술 사이에 난 적정 거리, 즉 ‘고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공업적으로 생산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폐기된 재료들은 시간의 흐름을 각인하면서, 유용성과 기능으로 규정된 상품에서 그 실체가 모호한 사물로 변모한다.
현실 속에서 집은 언제부터인가 시세차익을 위해 사고파는 상품으로서 자리 잡았지만, 이길렬의 작업에서는 아늑한 둥지 같은 자연적 대상, 또는 현대적 기준에 의해 코드화 할 수 없는 오래된 사물의 면모가 있다. 아마도 그곳은 오래전에 인간들이 태어났음직한 그러한 원초적 공간들이다. 나지막한 지붕으로 덮여 있으며 따개비처럼 수평면에 바짝 붙은 형태들은 휴식과 평화의 느낌을 주며, 인간의 심신을 보호해 주는 방어막이 된다. 개별적 존재들이 웅크리고 있는 응집된 형태는 은신처로서의 집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폐쇄가 아니라 내밀성을 위한 장치들이다. 새 집 같은 크기의 집은 집과 존재의 일치를 떠오르게 한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어느 작가를 인용하면서, 새의 몸에 의해서 지어지는 집의 예를 든다. 바깥에서 주워온 잡다한 재료들을 모아 몸으로 압력을 가함으로 만들어지는 새집에서 집은 새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그것을 가장 밀접한 보호의 꿈, 우리들의 몸에 꼭 맞춘 보호의 꿈으로부터 온다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세계는 인간의 새집이다. 그것들은 새집처럼 피난처를 위해 본능적으로 축조된 것이다. 이렇게 축조된 집은 우리의 몸과 영혼과 밀접하다.
바슐라르는 예술가들이 우리들을 집의 중심으로, 마치 어떤 힘의 중심, 어떤 잘 지켜져 있는 보호구역 안으로 불러들인다고 말한다. 마치 은자의 오두막집처럼, 그 중심적인 고독 주위로 하나의 명상하는 세계가 빛을 발한다. 은자의 오두막집은 스스로를 헐벗고 헐벗기는 가운데, 그것은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피난처에 이르게 한다. 그것들은 존재에의 확신이 응집되는 거소, 집을 에워싸서 공격하는 힘을 적대하여 싸우는 집의 보호적 가치를 상징한다. 반면 도시의 전형적인 주거 공간, 가령 아파트 같은 건물은 이러한 원초적 상징가치가 박탈되어 있다. 한 층 속에 박혀있는 뿌리 없는 공간에서 집은 일체가 기계이자 상품이어서 내밀한 삶은 어느 부분에서나 사라져 버리고 만다. 같은 맥락에서 이길렬의 작은 집들은 삶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쟁여져 있는 작은 서랍이나 상자같은 느낌을 준다.
그 서랍은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들처럼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여 활용할 수 있는 전능한 도구라기보다는, 오래된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박혀있는 잡동사니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밖으로 뚫린 굴뚝과 창문이 안 보이는 그의 집들처럼, 이 오래된 서랍이나 상자들에는 개봉과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의 무의식과 몽상이 저장되어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열리거나 읽히는 것은 아닌, 내밀한 삶의 모델이다. 이러한 서랍이나 상자를 채우는 수집물들은 두서가 없어서 대개 정확한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시적인 조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킨다. 그것들의 크기는 정해져 있지만, 그 밑바닥이 어디까지 인지는 계측되지 않는다. 어느 방향으로나 확장될 수 있는 정방형, 혹은 장방형의 설치 구조는, 기본 단위를 이루는 집들이 이루는 수평적이고 탈구성적인 방식, 즉 미니멀리즘적인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물이 가지는 깊은 내밀성을 외적 차원으로 반향하면서, 유한과 무한이 가지는 역동적 관계를 예시한다.
출전 | 경기문화 재단 시각예술 부분 지원 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