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영 전
12.5-12.18 | 이화익 갤러리
정보영의 작품은 쉼 없이 흘러가는 현실, 다소간 동질적이고 연속적인 지속을 순간 속에 고정시켜야 하는 회화의 근본적 과제를 새삼 일깨운다. 회화는 그냥 순간이 아니라 충만한 순간, 그냥 현재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 속에서 실재의 감각을 발견하고자 한다. 문학이나 연극같은 시간예술과 달리, 한 장면 속에 작품의 진면목을 모두 드러내야 하는 화가에게 재현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계통 발생적 차원에서 이 문제는, 명료한 시각성으로 귀결된 모더니즘 미술과, 시간적 추이가 극대화된 모더니즘 이후의 흐름으로 나타난 바 있다. 순간과 지속이라는 범주는 현재성과 현존성, 각성된 의식과 최면적인 몰입, 추상성과 연극성, 미술작품과 사물이라는 대립 항으로 반복된다. ‘Still Looking’(전시부제)은 인위적인 현재로 고정된 공간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영의 작품은 한 시점 속에 얼어붙은 물화된 광경이나 모호한 지속으로 흩어지는 우연을 모두 피해간다. 작가는 결정적인 순간의 포착과 삶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지속 사이에서 최적의 장면을 길어 올리려 한다.

최적의 장면을 위한 정보영의 방식은 그림 속에 영상이나 글을 집어넣는 식의 절충이 아니라, 이야기를 회화적인 평면 안으로 접어 넣고 펼치는 식이다. 정보영의 그림은 공간적인 면에서 그림의 구조를 세우는 원근법이 있지만 시점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시간적인 면에서 때를 나타내는 빛은 대기의 풍요로운 기운을 품으면서 화면 속 구조들과 상호 반향 한다. 교외의 건물 내 외부를 묘사한 그림에는 가구도 인간도 등장하지 않는다. 텅 빈 무대 같은 시공간이 작품 곳곳에 펼쳐진다. 그러나 그 장면을 곰곰이 바라보는 시선이 있으며, 장면 안에는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건물 내 외부를 여러 각도에서 포착한 시리즈 작품이나, 밝은 실내에 켜진 난데없는 촛불, 넘어진 컵,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의 연기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순어법의 구사는 단지 역설적 재미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지속과 순간이라는 주요한 두 축을 교차시키는 방식이다. 곧잘 충돌을 일으키는 모순적 범주에서 어느 한쪽을 포기하거나 한쪽 항으로 환원하면 편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문제 제기가 아니라, 이미 나온 답을 가다듬을 뿐인 길, 요컨대 작가가 아닌 장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한창 거품이 일고 있는 한국의 미술시장이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길이 아닌가. 작품 [looking each]은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텅 빈 실내를 비춰준다. 조명의 차원에서 밝은 창가의 촛불은 동어반복이지만, 의미의 차원에서 본다면 촛불은 광학적 공간을 형이상학적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매개가 된다. 작품 [lighting up]은 천장이 트인 실내 공간을 보여주는데, 문이나 창 이기에는 다소 좁은 구멍들 사이로 들어온 빛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명암과 형태들의 유희가 벌어진다. 어둑한 한쪽 켠에 조금씩 타들어가는 작은 촛불은 장면 속에 내재된 위대한 시공간의 드라마를 관조하는 왜소한 인간처럼 보인다. 작품 [certain view]에서 꾸며진 연극 무대 같은 실내의 양쪽 창에서는 바깥의 다른 장면들이 보이지만, 벽의 얼룩은 데칼코마니 같은 대칭을 이룬다. 일과성 장면이 전개되는 창밖 풍경과 대조적으로 실내의 비현실적 공간은 장중한 절대성을 연출한다.
작품 [flowing]은 빛이 대기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시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늦가을 오후의 풍경인데, 전경의 엎질러진 커피 잔이 장면의 정적과 고요를 깨는 작은 사건이다. 정보영의 작품에서 사건이나 행위는 보다 역동적으로 시간의 축을 타고 전개되기도 한다. 그것은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된 여러 캔버스로 나타난다. [another looking]은 건물의 좌측면, 우측면, 정면이 포착된 세 개의 작품으로, 같은 때의 다른 시점을 시리즈처럼 다룬다. 물이 엎질러진 장면을 여러 캔버스로 나눈 작품은 시간의 흐름과 지속을 순간 속에 담는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적인 순서의 나열이 아니라, 긴밀한 압축이 일어나는 순간에 가깝다. [looking] 시리즈는 분할된 거울에 비치는 뮤직 박스 댄서의 다양한 상들과, 인형을 비추는 규칙적으로 조각난 거울 면들의 다양한 반사상을 보여준다. 시리즈가 아닌 하나의 작품 속에서 순간과 지속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연필로 옅게 묘사한 건물 외관을 그린 [looking]은 대지에 뿌리박은 굳건한 괴체를 공기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
출전 | 미술세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