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용 전 11.14-11.27 |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
김용철 전 11.21-12.4 | 빛 갤러리
황인기 전 11.21-12.5 | 갤러리 인





2007년 끝자락 사간동 일대에서 열린 김용철, 황인기, 신창용 전은 새로움과 진보, 그리고 혁신이라는 시대의 강박관념에 거슬러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본다. 작가의 세계관과 기술이 평면에 집약되어 화이트 큐브에 정갈하게 걸린 형식 역시, 사방에서 번쩍거리는 전자 매체 환경에 둘러싸여 사는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풍스런 면이 있다. 그러나 소재와 형식의 의고성에 비해, 작품 내적인 부분은 시뮬레이션이라는 동시대 미학의 핵심을 보여준다는 역설이 있다. 황인기의 작품에서 산수화의 균형 잡힌 구도는 그리드 구조의 치밀함으로 재구성되었고, 김용철의 작품에서 행복을 기원하는 민화의 보편적 염원은 튀는 감수성으로 업그레이드 된 새로운 버전을 마련한다. 신창용의 작품에서는 얼마 전에 지나간 대중문화가 호출되었는데, 셋 중 가장 젊은 세대인 작가에게 작품의 소재인 70-80년대 대중문화의 영웅은, 산수화와 민화의 시대 못지않은 시간적 거리감을 가진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회고적이다. 그의 작품은 스타에 자신의 정체성을 투사하고 몰입시키는 대중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작품의 밀도 있는 형식들은 이들의 작품이 과거에 대한 단순한 차용이기 보다는, 각자의 감수성과 깊숙하게 연관된 것임을 알려준다. 평면으로 딱 떨어지는 형식은 회화라는 고급문화의 전통에 존재하는 내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작품 소재들은 대중성과 일상성에 밀착된다. 관객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는 소재들을 발견하고 그것이 순도 높은 형식 속에 어떻게 각색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의 소재인 산수화나 민화,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은 진부한 일상으로부터 날아오르려는 유토피아적인 기획을 가지지만, 전시대의 모더니즘처럼 내향적이고 초월적이기 보다는 세속성과 통속성이 두드러진다. 그들의 작품은 편안함 속의 유희라는 키치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다. 이 노선에 의해 작품은 깊이 대신에 표면을 선택하였지만, 그 표면은 또 다른 밀도를 획득하면서 미학적 기만이나 자기향수에 머무르는데 그치는 키치적 결론을 피해간다. 그것들은 과거의 무거움을 떨치고 아름다움 고유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김용철의 작가노트에 작품의 의중을 명료하게 밝혀 놓았다. 그는 모란을 그린 이유에 대해 ‘우리의 생활에서 김치와 온돌문화가 살아남아 이어가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 아직은 살아있는 것들은 무엇일까’를 물으면서, 이에 대한 답으로 ‘가정의 화평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것은 상투적으로 들릴 정도지만, 여전히 반복되어야 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트가 있는 모란도]는 화면 뒤편에 해와 달, 한가운데 하트가 같은 색으로 칠해진 그림인데, 하트라는 현대적인 도상을 둘러싸고 있는 모란은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공존함을 보여준다. 형태를 둘러친 외곽선과 그 안을 채우는 색감이 화려하다. [모란이 활짝 핀 날-다복]과 [-만복]은 서로 짝을 이루듯 연결된 구도를 가진다. 작품 [모란이 활짝 핀 날]은 모란의 앞뒤를 채우는 기암괴석이나 산의 색상이 원래의 자연적 색보다 더 튀며, 짧게 그어 내린 리드미컬한 색선의 병치는 빛보다 눈부신 색채의 향연을 보여준다.

김용철의 작품에는 ‘다복’, ‘만복’같은 어휘와 더불어,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반갑게 서로를 맞는 의미를 가진 문장들이 선명하게 배치된다. 문자도나 시서화의 전통과 연관될 수 있는 형식이지만, 심오한 사색이나 모호한 선문답이 아닌 단순간결한 문자적 메시지는 유치찬란한 민화적 색감과 더불어 즉시적으로 전달된다. 배후에 숨겨놓은 복잡한 은유의 실타래가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행복과 안녕에 대한 메시지는 소외와 분리를 야기하는 근대사회를 거슬러 유기적 공동체에 대한 희구와 맞닿아있다. 자연의 순환과 순리에 어긋나지 않는 유기적 공동체의 시대는 오랜 경험으로부터 추출된 패턴화 된 수공예 문화를 통해 사회 구성원 상호간에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이루었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와 같은 과도한 선택 가능성과 자기표현 보다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창출했다. 안정적 행복의 추구라는 민중적 정서에 바탕을 둔 김용철의 작품은 대량 생산과 소비라는 광란의 주기 속에서 요동치는 급격한 상대주의와 변화 자체에 대한 맹목적인 지향을 거부한다.

황인기는 ‘몽유’(전시부제)전의 서문에서 두 신선의 은유적 대화를 통해 문명의 진보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규칙적으로 구획된 그리드 구조 속에서 촘촘하게 드러나는 것은 전형적인 산수화에서 나타나는 유유자적한 삶이다. 여백과 형태로 나눌 수 있는 산수화의 구조는 채색된 나무판이나 캔버스, 플라스틱 등을 바탕 면으로 해서 못, 크리스탈, 레고 블록, 실리콘 등으로 채워진 기계적 약호로 번안된다. 두 가지 색상으로 이루어진 레고 블록 화면이나 무지개빛 영롱한 광학적 반사면을 가진 바탕은 메카닉한 면이 두드러지지만, 낡은 나무판 위에 녹슨 못을 박아서 만든 ‘빈티지’ 스타일도 있다. 구성요소가 규격화된 크리스탈이나 레고 블록에 비해 직접 짜서 찍는 실리콘은 회화적인 느낌도 준다. 그리드 위의 픽셀 구조는 두 가지 색상의 대조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작가는 전통적인 도상을 표준화된 작업으로 환원시켰다. 기본적인 요소들이 정해진 방식으로 조합되는 과정은 0과 1로 구별된 과정을 쉴 새 없이 연산하는 컴퓨터의 방식과 유사하다. 여기에서 물질은 정보로 이동한다.






그의 작품에서 참조대상이나 실재는 픽셀로 사라지지만, 기호는 물질화 되면서 정보형식은 질감과 무게를 획득한다. 황인기의 작품은 재현에 대한 재현이다. 참조모델이 있지만, 참조대상은 없다. 그것은 명시적 지시대상과 암시적 지시대상을 전제하는 재현과 추상미술의 어법을 벗어난다. 유사함은 유지되지만, 유사함의 근거가 되는 실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자세히 보려고 다가갈수록 실재는 원자화 되면서 눈앞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멀찍이서 보면 시원한 여백을 품은 산수풍경이 드러난다. 재현적 표면 아래의 실재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황인기의 작품은 재현에서 시뮬레이션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이동한다. 실재가 결여된 시뮬라크룸은 원형과 복제에 대한 오래된 이분법을 전복한다. 현대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본질과 외양 또는 원형과 복제를 구분하는 플라톤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구분을 제거했다. 원본과 복제 사이의 위계의 철폐는 ‘유일하고 이상적이며 신비적 특권을 가지지 않은 미술작품에 새로운 모범을 제공하는 기회’(미셀 카미유)를 부여한다.

신창용의 작품에는 만화나 영화, 디지털 게임 등에 의해 보존 계승 되어온 대중문화의 도상들이 나타난다. ‘강한 것, 멋진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전시부제에 잘 나타나 있듯이, 작품의 주요 캐릭터들은 근육질의 파이터로부터 헤비메탈 뮤지션까지 두루 분포되어 있으나, 그 중심에는 이소룡이 있다. 이소룡은 강한 사나이의 원형이자 자아가 투사되는 이상형이다. 작품 속 영웅들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힘의 담지자들로,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서 그들의 멋진 모험을 담고자 한다. 절대무적의 강자들은 근육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덩치들끼리, 또는 거대한 호랑이나 용, 거인같은 자연적, 초자연적 상대와 대결한다. 그의 작품에서 강한 것은 절대 권력자나 무기류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초남성성이 집약된 소재들이다. 작가가 숭배해 마지않는 강함은 극적인 대결로 판가름 나고, 비장한 눈빛을 교환하는 멋진 사나이들끼리의 대결은 묘한 동성애의 분위기마저 풍긴다. 이소룡의 수행원이자 동행인 작가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있다.

만화적 주인공들을 과도한 미학적 무게를 지고 있는 회화라는 형식에 출몰시키는 것에 대한 화가로서의 심각한 자의식은 없다. 그들은 멋지고 강한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이고, 당연히 작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신창용 세대에게 정규교육을 통해 습득된 순수미술에 대한 비중은 그들 주위를 공기처럼 맴도는 미술 이외의 이미지들과 동급이거나, 심지어 그보다 낮은 듯이 보인다. 사실 미술사를 보아도 고급/저급 문화를 나눌 명백한 근거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물론이고 모더니즘조차도 동시대 대중문화 및 하위문화와 얽히고설키면서 함께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다만 신창용 세대에게는 여러 기원을 가지는 이미지의 세례가 전자매체를 통해 더욱 가속도가 붙으면서 시각예술의 근간을 이루었던 미메시스의 환상성이 극대화된다. 무한몰입을 조장하는 스크린화된 현실에서 무대 이편과 저편, 그와 나와의 구별은 사라진다. 그러나 전체가 가상이 되면 가상은 또한 실재가 된다. 신창용의 작품에서 가상의 왕국 속 영웅들은 대결과 죽음이 만연한 현실을 물신 숭배적으로 반영하는 셈이다.

출전 | 아트 인 컬처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