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공미술의 맥락
공공미술이란 공공영역에서의 미술이다. 공공영역(public sphere)이란 ‘공론에 따라 형성될 수 있는 사회생활의 영역’(테리 이글턴)으로 규정된다. 공공영역이 전제하고 있는 주체는 이성적 합리성을 갖춘 시민이지만, 시민 대신 소비자 대중, 민주주의 대신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영역이란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기 보다는 이상형으로 남아있다. 공공영역 자체가 물리적인 공간성을 넘어 비물질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상형이라는 점에서 공공과 미술의 만남을 지향하는 공공미술은 처음부터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그것을 둘러싼 인접 분야와의 관계 속에서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공공영역에서의 미술은 예술성을 우선시하는 예술지상주의 보다는 정치적이며, 대중문화 보다는 실험적이다.
공공미술의 한편이 정치적인 이유는, 위협받는 공공영역을 지키려는 사회 운동과 동반자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미술은 민중미술이라는 오해를 낳기도 하였다. 공공미술은 소외된 현실을 주목하고 있지만, 민중, 민족, 해방, 혁명, 전망 등 진보주의가 구사해왔던 거대담론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념보다는 국지적 개입을, 총체성 보다는 국지적 실천들을 그물망처럼 엮으려 한다. 공공미술의 작가들은 분업화된 시스템 속의 전문가나 역사에서의 이성의 영위를 논구하는 총체적 지식인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를 지배하는 하나의 질서가 아닌 다른 질서를 기획하는 소박한 실천가일 뿐이다. 특히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공미술은 누군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생산자와 수용자 간의 순발력 있는 직통 채널을 구축하려는 노력으로 가능해 진다.
공공미술의 한편이 실험적인 이유는, 사이비 공공영역으로 자처하고 있는 시장의 문화, 요컨대 문화산업이나 대중문화의 목적인 사적 이윤 추구의 동기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중추수주의적인 명백한 코드를 찾지 않으며, 미술을 공적 영역에 재맥락화 하기 위해 미술관용 미술에 대한 개념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실용이라는 면에서 공공미술은 공공디자인이나 사회복지와도 다르다. 2006년의 ‘아트 인 시티’가 내걸었던 ‘소외 지역 생활환경 개선’이나 ‘양극화 해소’는 디자인과 복지 분야와의 중첩된 영역을 예시하고 있지만, 공공디자인이나 사회복지는 공공미술과 예산과 규모, 그리고 접근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공공디자인은 도시나 지역 전체의 미관이나 이미지를 개선 등에 몰두한다. 공공디자인과 복지는 실용이나 물질적인 개선에 치중하는 개념이다.
2. 상징적 교환으로서의 미술
대규모 공공 디자인 사업은 국가적 이익이나 경쟁력의 차원에서 많이 논의 되지만, 공공미술은 사회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가치로서의 집단 이익이나 생산성에 호소하지 않는다. 생산성의 기준에 의하면 공공미술은 오히려 낭비적이다. 그것은 이익을 낳는 물건을 생산하기 보다는 주고받는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생산중심주의는 자연과 인간을 객관화, 도구화시키며 경제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며, 경제적 합리주의라는 하나의 모델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을 제한한다.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체제에서 가혹하게 배제된다. 공공미술은 생산과 경제의 영역을 벗어난 상징적 교환의 장에서 이루어진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상징적 교환은 모든 잉여와 생산을 배제한다. 여기에서 풍요의 본질은 희소성이 아니라 교환 속에 있다.
소유와 무한한 축적의 과정, 즉 생산된 것은 더 이상 상징적으로 교환되지 않으며, 상징적으로 교환되지 않은 것(상품)은 권력과 착취의 사회관계를 유지한다. 예술은 생산중심주의에 내재해 있는 억압과 폭력성을 상징적 교환을 통해 해소시킨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회적 기능을 가진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공공미술은 무한경쟁을 통한 생산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의제기 이다. 신자유주의는 공공영역을 축소시키고, 사회적 책임과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 분야의 경우, 다수의 미술인들과는 무관한 미술계 ‘큰 손’들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미술시장은 미술작품을 물신주의의 정점에 올려놓으면서 일반인은 근접할 수 없는 고가의 사유재산이라는 이미지를 낳는다. 공공미술은 사적 소유에 의한 소수의 자유 보다는 평등과 연대를 중시한다. 자유는 자율과 마찬가지로 그자체로 매력적인 개념이지만, 소유의 불평등은 타인의 자유를 제한한다.
공공미술은 보다 많은 이들의 자유, 즉 평등의 구현에 힘써야 하며,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제동을 걸고 사회가 개입할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 따라서 공공미술에 대한 공공기금의 지원과 제도적 안착은 위로부터의 수혜가 아니다. 시민과 사회의 견제 없을 때, 공공을 위한 기금이 수백억짜리 청사를 짓거나 일회성 지역 축제에 대한 지원, 건물만 덩 그란 문화예술 관련 건물 등으로 낭비되는 예를 많이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가 가정하고 있는 합리적 경제인은 매우 이기적인 인간이다. 이기적인 개체가 지배적 힘을 행사할 수 없는 제도의 역할이 필요하다. 희소가치로의 조작을 통한 소수의 이익추구라는 미술시장의 경향과는 반대 방향에서 미술 역시, 공기, 물, 전기, 교육, 건강, 출산, 육아, 매체, 담론 등과 같은 공공재라는 인식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공공미술은 공공의 관심과 비평과 담론의 차원이 전무한 채, 행정적 편의와 기득권 미술인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기존의 공공미술에 대안성을 가진다. 미술은 관료주의나 상업주의에 대해 공공성은 물론 자율성도 가지지 못했다. 공공미술은 미술장식품으로 불리워졌던 관료적인 기념비 미술과 미술관에 갇힌 창백한 미술에 대해, 대안적 사회 시스템의 구축에 미술가들도 참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예술적 노동을 작가 개인의 사적 노동이 아닌 사회적 몫으로 승화시킨다. 그것은 시장의 교환가치에만 의존해온 기존의 가치체계를 공생적이고 공익적인 가치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공공적인 미술은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틀’(헤겔)을 생성시키려는 노력이 드러나야 한다.
대규모 공공 디자인 사업은 국가적 이익이나 경쟁력의 차원에서 많이 논의 되지만, 공공미술은 사회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가치로서의 집단 이익이나 생산성에 호소하지 않는다. 생산성의 기준에 의하면 공공미술은 오히려 낭비적이다. 그것은 이익을 낳는 물건을 생산하기 보다는 주고받는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생산중심주의는 자연과 인간을 객관화, 도구화시키며 경제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며, 경제적 합리주의라는 하나의 모델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을 제한한다.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체제에서 가혹하게 배제된다. 공공미술은 생산과 경제의 영역을 벗어난 상징적 교환의 장에서 이루어진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상징적 교환은 모든 잉여와 생산을 배제한다. 여기에서 풍요의 본질은 희소성이 아니라 교환 속에 있다.
소유와 무한한 축적의 과정, 즉 생산된 것은 더 이상 상징적으로 교환되지 않으며, 상징적으로 교환되지 않은 것(상품)은 권력과 착취의 사회관계를 유지한다. 예술은 생산중심주의에 내재해 있는 억압과 폭력성을 상징적 교환을 통해 해소시킨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회적 기능을 가진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공공미술은 무한경쟁을 통한 생산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의제기 이다. 신자유주의는 공공영역을 축소시키고, 사회적 책임과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 분야의 경우, 다수의 미술인들과는 무관한 미술계 ‘큰 손’들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미술시장은 미술작품을 물신주의의 정점에 올려놓으면서 일반인은 근접할 수 없는 고가의 사유재산이라는 이미지를 낳는다. 공공미술은 사적 소유에 의한 소수의 자유 보다는 평등과 연대를 중시한다. 자유는 자율과 마찬가지로 그자체로 매력적인 개념이지만, 소유의 불평등은 타인의 자유를 제한한다.
공공미술은 보다 많은 이들의 자유, 즉 평등의 구현에 힘써야 하며,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제동을 걸고 사회가 개입할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 따라서 공공미술에 대한 공공기금의 지원과 제도적 안착은 위로부터의 수혜가 아니다. 시민과 사회의 견제 없을 때, 공공을 위한 기금이 수백억짜리 청사를 짓거나 일회성 지역 축제에 대한 지원, 건물만 덩 그란 문화예술 관련 건물 등으로 낭비되는 예를 많이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가 가정하고 있는 합리적 경제인은 매우 이기적인 인간이다. 이기적인 개체가 지배적 힘을 행사할 수 없는 제도의 역할이 필요하다. 희소가치로의 조작을 통한 소수의 이익추구라는 미술시장의 경향과는 반대 방향에서 미술 역시, 공기, 물, 전기, 교육, 건강, 출산, 육아, 매체, 담론 등과 같은 공공재라는 인식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공공미술은 공공의 관심과 비평과 담론의 차원이 전무한 채, 행정적 편의와 기득권 미술인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기존의 공공미술에 대안성을 가진다. 미술은 관료주의나 상업주의에 대해 공공성은 물론 자율성도 가지지 못했다. 공공미술은 미술장식품으로 불리워졌던 관료적인 기념비 미술과 미술관에 갇힌 창백한 미술에 대해, 대안적 사회 시스템의 구축에 미술가들도 참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예술적 노동을 작가 개인의 사적 노동이 아닌 사회적 몫으로 승화시킨다. 그것은 시장의 교환가치에만 의존해온 기존의 가치체계를 공생적이고 공익적인 가치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공공적인 미술은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틀’(헤겔)을 생성시키려는 노력이 드러나야 한다.
3. 다중(多衆)의 매개자로서의 미술가
아트인 시티 사업을 비롯해 실전에서 벌어진 공공미술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야기했다. 필자는 여기에서 공공미술의 주체와 대상 간에 설정되어야할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이 점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싶다. 새로운 공공미술이 추구하는 공동체와 참여라는 가치는, 시장 중심주의가 지향하는 부에 기초한 자유 보다는 평등의 가치에 무게 중심을 두면서,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회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작가에 대한 또 다른 상이 필요하다. ‘개인’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나뉘어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개인을 바탕으로 독창성을 지닌 천재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R. 윌리엄스가 지적하듯이, 부르주아 전통에서 ‘개인적’이란 말이 ‘사적’이란 말로 왜곡되어 왔듯이, ‘사회적’이란 말이 ‘집단적’이란 의미로 왜곡되어 왔다.
개인, 즉 그의 개성, 권리, 그리고 자유라는 현대 서구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 근대적 주체에 대한 개념이 이제 의심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구성한 상징적인 형태, 그 거대한 문화적 공간으로부터 온다. 우리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이러한 거대한 공간에서 언어를 습득하면서 우리의 무의식과 주체가 구성된다. 우리의 자아는 언설적 구성물이며, 주체는 단지 언어의 결과일 뿐이다. 주체는 기표에 종속되고, 기표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예술적 기술에 있어서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조직하고 조직되는 관계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실증주의의 산물인 작가라는 개념은, 아직도 작가의 인성과 작품을 통일시키려고 안달하는 의식 속에 군림하고 있다. 마치 작품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속내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품 생산자 동일한 인간의 목소리인 것처럼 말이다.
현대의 작가는 텍스트와 동시적으로 태어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작품에 선행하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가 아니다. 텍스트는 신과 같은 작가의 전언인 하나의 신학적인 의미를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이지 않은 다양한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부딪히는 다면적인 공간이다. 말하자면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원천에서 이끌어낸 일단의 인용들로 짜여지는 피륙과 같다. 여기서 작가는 지고한 창조자라기보다는, 단지 변화시키는 기술과 결합의 기술만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텍스트의 주도권을 가지는 것은 작가가 아니다. 텍스트는 여러 문화에서 비롯되어 대화로, 패로디로, 논쟁으로 넘어가는 다양한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다양함이 수렴되는 자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주장된 것처럼 작가가 아니라 독자이다.
고전적인 텍스트는 독자에게 수동적인 수용을 강요한다. 그러나 새로운 텍스트의 척도는 더 이상 그 목적성(종결된 생산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이끄는 생산 작업 자체에 있다. 그것은 독자에게 보다 능동적인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작품은 쉽게 읽혀지거나 보여지기 보다는 새로운 생산을 가능하도록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키기 좋게 포장되어 수동적인 소비만을 강요할 뿐인 상품문화와는 구별되는 예술의 본질적 특징을 주목하게 된다. 작가는 작품을 주도하는 꽉 찬 의식적 존재이기 보다는 특정 매개물을 가지는 텅 빈 매개자의 위상을 지닌다. 공공미술의 대상은 집단적인 의미가 강한 민중이나 대중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포함된 다중(多衆)이다. 역사가들은 집단적 존재가 인간 해방이나 행복을 달성하는 것은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공공미술은 ‘자율적인 개체의 민주적 연대’(네그리)인 다중을 발견해야 한다.
4. 전망
공공미술은 단지 대중에 봉사(복지)하거나 또 다른 물건(디자인, 상품, 예술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작품, 관객에 대한 새로운 방향설정이 필요한 또 다른 현대미술이다. 그것은 최종산물이 아니라 과정이 중시되고, 일회성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만큼, 여기에만 헌신할 수 있는 작가 군과 제도적 지원(재원조달, 담론적 활성화)이 필요하다. 작가주의적 의식으로 가득한 전문 작가가 잠깐 외도 하는 식의 작업은 기존의 공공미술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 공공미술가는 그림을 잘 그리고 조각을 잘 만드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전문성을 변화무쌍한 현실 속에서 배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삶과 현실에 용해되려고 할수록 예술가에게는 더 많은 역량이 요구된다. 미술은 그 자체만을 추구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현실에 개방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위상을 정립할 것이다.
출전 | ‘오늘의 공공미술; 아트인시티를 말하다’ 토론 발제문
아트인 시티 사업을 비롯해 실전에서 벌어진 공공미술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야기했다. 필자는 여기에서 공공미술의 주체와 대상 간에 설정되어야할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이 점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싶다. 새로운 공공미술이 추구하는 공동체와 참여라는 가치는, 시장 중심주의가 지향하는 부에 기초한 자유 보다는 평등의 가치에 무게 중심을 두면서,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회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작가에 대한 또 다른 상이 필요하다. ‘개인’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나뉘어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개인을 바탕으로 독창성을 지닌 천재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R. 윌리엄스가 지적하듯이, 부르주아 전통에서 ‘개인적’이란 말이 ‘사적’이란 말로 왜곡되어 왔듯이, ‘사회적’이란 말이 ‘집단적’이란 의미로 왜곡되어 왔다.
개인, 즉 그의 개성, 권리, 그리고 자유라는 현대 서구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 근대적 주체에 대한 개념이 이제 의심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구성한 상징적인 형태, 그 거대한 문화적 공간으로부터 온다. 우리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이러한 거대한 공간에서 언어를 습득하면서 우리의 무의식과 주체가 구성된다. 우리의 자아는 언설적 구성물이며, 주체는 단지 언어의 결과일 뿐이다. 주체는 기표에 종속되고, 기표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예술적 기술에 있어서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조직하고 조직되는 관계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실증주의의 산물인 작가라는 개념은, 아직도 작가의 인성과 작품을 통일시키려고 안달하는 의식 속에 군림하고 있다. 마치 작품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속내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품 생산자 동일한 인간의 목소리인 것처럼 말이다.
현대의 작가는 텍스트와 동시적으로 태어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작품에 선행하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가 아니다. 텍스트는 신과 같은 작가의 전언인 하나의 신학적인 의미를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이지 않은 다양한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부딪히는 다면적인 공간이다. 말하자면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원천에서 이끌어낸 일단의 인용들로 짜여지는 피륙과 같다. 여기서 작가는 지고한 창조자라기보다는, 단지 변화시키는 기술과 결합의 기술만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텍스트의 주도권을 가지는 것은 작가가 아니다. 텍스트는 여러 문화에서 비롯되어 대화로, 패로디로, 논쟁으로 넘어가는 다양한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다양함이 수렴되는 자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주장된 것처럼 작가가 아니라 독자이다.
고전적인 텍스트는 독자에게 수동적인 수용을 강요한다. 그러나 새로운 텍스트의 척도는 더 이상 그 목적성(종결된 생산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이끄는 생산 작업 자체에 있다. 그것은 독자에게 보다 능동적인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작품은 쉽게 읽혀지거나 보여지기 보다는 새로운 생산을 가능하도록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키기 좋게 포장되어 수동적인 소비만을 강요할 뿐인 상품문화와는 구별되는 예술의 본질적 특징을 주목하게 된다. 작가는 작품을 주도하는 꽉 찬 의식적 존재이기 보다는 특정 매개물을 가지는 텅 빈 매개자의 위상을 지닌다. 공공미술의 대상은 집단적인 의미가 강한 민중이나 대중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포함된 다중(多衆)이다. 역사가들은 집단적 존재가 인간 해방이나 행복을 달성하는 것은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공공미술은 ‘자율적인 개체의 민주적 연대’(네그리)인 다중을 발견해야 한다.
4. 전망
공공미술은 단지 대중에 봉사(복지)하거나 또 다른 물건(디자인, 상품, 예술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작품, 관객에 대한 새로운 방향설정이 필요한 또 다른 현대미술이다. 그것은 최종산물이 아니라 과정이 중시되고, 일회성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만큼, 여기에만 헌신할 수 있는 작가 군과 제도적 지원(재원조달, 담론적 활성화)이 필요하다. 작가주의적 의식으로 가득한 전문 작가가 잠깐 외도 하는 식의 작업은 기존의 공공미술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 공공미술가는 그림을 잘 그리고 조각을 잘 만드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전문성을 변화무쌍한 현실 속에서 배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삶과 현실에 용해되려고 할수록 예술가에게는 더 많은 역량이 요구된다. 미술은 그 자체만을 추구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현실에 개방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위상을 정립할 것이다.
출전 | ‘오늘의 공공미술; 아트인시티를 말하다’ 토론 발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