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것으로서의 원초성을 향해


홍성민 전 | 2007.12.29-2008.1.20 | 갤러리 27




생소한 전시부제인 ‘Palimpsest; Paintings’의 ‘팰림세스트’는 ‘겹쳐 쓰여진 양피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회화작품이 걸린 이번 전시는 몇 년 동안 총체극 형태로 벌어진 홍성민의 팰림세스트 시리즈의 회화 판이라고 할 수 있다. 지워진 흔적이 남아있는 양피지라는 비유는 의미의 투명함보다는 알레고리같은 수수께끼의 성격을 강조한다. 비평가 크레이그 오웬스는 [알레고리적 충동]에서 알레고리적인 작품에 대해 적용되는 패러다임은 바로 수정한 자국이 역력한 거듭 쓴 양피지이라고 말한다. 이 논문에서는 그는 형식주의적 모더니즘이 알레고리를 억압한 것에 비해, 1980년대 이후의 미술에서는 알레고리가 부활하였다고 지적한다. 알레고리는 ‘사후에 완결된 작품에 붙여지는 것, 다른 표현에 외적으로 덧붙여진 표현으로 낭비적이며, 잉여가치를 소비하는 것’(크로체)로 평가된다. 알레고리는 항상 과도한 상태이다.

크로체는 하나의 형식에다 두 개의 내용을 입력시키는 알레고리의 성격 때문에, 알레고리를 괴물같은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알레고리는 이전의 의미를 대체하며 이전의 의미는 따라서 지워지거나 불분명해진다. 홍성민의 ‘팰림세스트’ 시리즈처럼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또 하나의 텍스트에 의해 중첩되는 모든 경우에 알레고리가 발생한다. 알레고리적 구조 내에서 두 텍스트들 간의 관계가 단편적이며 혼란스러운 것일지라도,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통해 읽혀진다. 알레고리적 예술작품은 깨지지 않은 통일성으로서의 기호가 아니라, ‘기호를 의미로부터, 기표를 기의로부터 유리시키는 거리’(오웬스)를 가진다. 여기에서 기호는 끊임없이 동요하고, 기의 없는 기표가 명멸하는 장인 작품은 꽉 짜여진 유기적 구조가 아니라 임의성과 우연성으로 채워진다.

알레고리를 즐겨 쓰는 작가는 상실되거나 마멸될 수 있는 원래의 의미를 보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이미지에다 또 다른 의미를 덧붙인다. 여러 작품과 작가, 장르를 가로지르며, 겹쳐 쓰기를 선호하는 홍성민은 알레고리가 가지는 모호함을 풍부함의 원천으로 삼고자 한다. 여기에서의 독창성은 기호나 기표처럼 한 화가에서 다른 화가로 통과하거나 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미술사가 리차드 시프도 속성이나 기호는 공유의 실체이지만 개인적인 특질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즉 그것들은 예술적인 언어에 대한 접근 방법과 그것을 사용하는 권한을 가진 어느 누구에 의해서라도 전유될 수 있다. 그것은 텍스트처럼 다양한 기원을 가지는 것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것의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향하는 지점(독자)에 있다. 그러나 이 지향점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다. 이 독자는 단순히 ‘씌여진 텍스트를 구성하는 모든 흔적을 단일한 영역 내에 통합하는 어떤 존재’(바르트)이다.




홍성민은 작가로서의 자기의 위상을 남이 한 것에 끼어드는 존재이며, 단지 끝맺음을 하는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작과 마무리는 얼마나 힘든 것인가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작가상(또는 독자상)은 결코 소박하거나 겸손한 개념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홍성민은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자로서 먼저 많은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된다. 안양 유원지에서 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립싱크 한 작품 [팰림세스트; 오페랄라라](2006)와 스페이스 C 앞의 최고급 아파트에 사는 가상의 인물을 한국 미술품 거래사상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는 박수근 화백으로 설정한 [팰림세스트; 하이츠파크](2006) 등이 겹쳐 쓴 작품의 예이다. 아르코 미술관과 마로니에 공원, 쌈지길 등에서 진행했던 [토탈 시어터 앨리스](2005, 2006)년 역시 여러 텍스트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어린왕자,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등--이 교차된 상호 텍스트적인 작품이다.

회화에서는 어떤 상호적 텍스트가 생산되었을까. 홍성민은 이번 전시에서 삼각지에서 구입한 상화들을 전용appropriation한 작품들을 걸어 놓았다. 전시장 바닥에는 백장미를 그린 같은 그림 두 장이 겹쳐서 배열되어 있고 작가는 거기에 영롱한 물방울을 첨가했다. 꽃은 ‘아름다운 그림’의 전형을 이루고 있으며, 첨가된 물방울은 어떤 유명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확립되어진 도상이기도 하다. 작가는 상화를 통해서 진부한 구상회화와 사유화한 창안으로서의 모더니즘 회화를 한 묶음으로 배열해 놓는다. 같은 그림을 두 장 배열한 형식은 언제라도 프린터에서 대량으로 출력할 수 있는 복제품이라는 불길한 분위기를 덧씌운다. 보다 적극적인 덧붙이기도 있다. 정물화 밑에 깔린 천을 수정한 작품은 사람얼굴이나 혓바닥 같은 이미지가 중첩되는데, 그것은 작가가 그 그림을 보고 있다가 떠오른 이미지라고 한다. 오웬스에 의하면 차용된 이미지를 응시gaze하는 시선이 바라는 것은 그림들 속에 간직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약속을 보증하는 동시에 유예한다. 그 결과 이미지들은 암호처럼 해독되어야하는 마술적 문자나 파편들과 같이 기묘하게 미완성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작가는 평범한 것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그린 정물화를 볼 때, 그 안에 새겨져 있는 편집증적인 환상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다. 동양적인 분위기의 몽롱한 여인상을 서양적인 것으로 변형시킨 작품이나 젊은 남녀가 함께 달려가는 신화적 장면과 꽃 그림을 꼴라주한 작품은 최소한의 가필과 병치를 통해서 작품이 본래 내포하고 있는 상투성을 극화한다. 아예 손대지 않고 구입한 그대로의 것을 내놓은 작품도 있다. 나란히 걸린 풍경화 3점은 서명조차 들어가지 않은 일종의 레디 메이드이다. 최소한의 변형이라는 과정조차 생략된 것이다. 2층 전시장에 벽에 걸리지도 않은 채 벽면에 기울여져 있는 10여점의 풍경화들은 원생산자와 작가의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여의도에서 벌어진 공공미술 전람회에 ‘삼각지 화가’를 초대하여 일당을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한 산물이다. 삼각지 화가는 일종의 연기자가 홍성민은 디렉터의 역할을 맡으면서 그림을 공연예술의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작품의 연원에 대한 텍스트가 덧붙여진 또 하나의 작품은 거대한 빈 좌대이다. 빈 좌대 앞에 씌여진 텍스트에는 국내외의 전시장에서 전시되거나 전시될 예정이었던 곰 인형과 판피린 소녀상의 행적들과 그것이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적어 놓았다. 좌대는 그 거대하고 견고한 모습으로 원작에 대한 전설을 증거하고 있다. 필자도 서울의 한 전시장에서 실제로 본 이 조각은, 곰인형도 그렇고 판피린 소녀도 그렇고 이미 존재하는 것의 편집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의 창조라는 기존의 시각 이데올로기에 의한다면, 처음부터 부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홍성민에게 작가의 창조성과 독창성은 이미 있는 것들을 조합해서 전혀 다른 분위기의 것으로 재탄생시키는 역량에 있다. 실제로 공연을 포함한 그의 많은 환상적인 작품들이 머리에서 쥐어짜낸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요소들이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고 의미 있다. 이렇게 여러 기원을 가지는 텍스트를 뒤섞는 방식은, 홀로 영감 받아 전무후무한 창조적 걸작을 완성하는 작가로서의 개념을 수정하면서, 일종의 끼어들기와 함께하기라는 모종의 공동 작업을 예시한다.




그러나 미술을 지탱해온 신화, 또는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려는 열정적 의지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은 썰렁했다.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물만을 보여줄 뿐인 회화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상투성의 극치를 달리는 상화의 퍼레이드라는 특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공공기금으로 타인의 노동력을 편취한 것일 수도 있는 작업 방식에 대한 미심쩍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전용이라는 방식이 창조적 작가를 또 다른 방식으로 확증할 뿐이라는 모순적 상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커다란 전시장에 비해 작품 수가 적고, 유난히 추웠던 날씨 때문이었을까. 아쉽게도 전시장에서 편집된 영상자료로만 보았지만, 근 몇 년 동안 그가 진행한 공연예술의 열기에 비한다면 ‘팰림세스트 회화 판’의 썰렁함은 더더욱 배가된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더 이상 그림이라는 것을 그리고 싶지 않은 작가의 생각을 확증해 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같은 뿌리를 가진 아이디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원이 생략되는 회화와, 중첩된 차원들이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내는 시간예술로서의 공연의 차이가 실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 역시도 연극이나 춤이라는 전문적인 입장에서만 보고자 할 때, 뭔가 핵심이 빠진 것 같은 헐렁함을 가지지는 않을까. 홍성민은 주변적인 것에서 길어낸 요소들로 부재하는 중심들을 채워나간다. 그의 작품은 그림이나 조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이나 춤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변모된 공간예술과 시간예술의 만남이다. 그의 공연예술 작품들은 확립된 장르들을 물리적으로 묶어내는 방식과는 다른 화학반응이 존재하기 때문에, 각 장르의 기준을 가지고 읽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각 장르의 기준에서 볼 때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모호한 영역을 가리키는 ‘다원예술’이라는 말도 등장한 듯하다. 그림들과 함께 상영된 [오페라의 요령]은 이 전시가 시작된 같은 해에 아르코 극장에서 한 공연으로, 원래 러닝 타임 90분짜리를 30분으로 편집한 것이다.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원래의 텍스트 [오페라의 유령]을 말장난 식으로 바꾼 [-요령]은 실제 배우들인 연기자와 무용수들을 홍성민이 직접 안무한 작품이다.

미술인이 안무가로까지 진출한 전례 없는 일인데, 미술계에서는 공연계에서 그가 회자되는 만큼 깊이 있게 조명된 바가 없었던 듯하다. 이 작품을 비롯한 몇몇의 공연을 동영상 형태로 같이 보여준 것은 그림과 공연을 동시에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기 때문이다. 투여된 에너지와 규모를 비교하면, 홍성민은 그림을 등한시하고 공연을 선호하는 것 같지만, 공연 역시도 그 장르에서 전통적으로 확립되어온 신화들을 비트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공연계의 종사자들로서는 달갑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관객을 향해 뚫려있는 암묵적인 제 4의 투명한 벽 뒤에서 겉도는 가발과 의상, 과장된 몸짓과 분장으로 대사를 읊고 노래하는 배우들과 그들 뒤에 숨어있는 전능한 감독의 존재는 전통적인 그림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한 것들이 야기하는 시대착오적 제스추어는 조용한 인터페이스 앞에 홀로 앉아 소통하는 오늘날의 대중들과 큰 괴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계승되어야 할 인류의 보고로서의 ‘클래식’이라는 명분으로 천연기념물이나 희귀동물처럼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이 전시는 현실의 감수성과 맞지 않는 괴리를 자못 자족적인 완성감으로 충만한 것으로 가정된 작품 내부의 균열을 드러낸다. 그러나 균열이 균열로만 끝난다면 허무하다. ‘네가티브’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어떻게 부재를 통해서 또 다른 충만함을 이끌 것 인가가 관건인 것이다. 춤, 오페라, 연극, 마당극, 굿 등 각 장르 고유의 장치들을 가지고 노는 공연 형식을 띈 홍성민의 작품은 미술계 출신자답게 비주얼 부분이 매우 강력하다. 그림이 그림으로서만 남을 때 찻잔 속의 폭풍같은 발상이, 무대라는 공간에서는 실제의 폭풍같은 열기로 달아올라 거대한 에너지로 방출되곤 한다. 그것은 다양한 것이 섞이는 무대라는 가능성 때문일까. 홍성민은 지난해 창간된 잡지 [판 vol.1]과의 인터뷰에서 ‘-와 -의 만남’이라는 발상과 기획을 혐오한다고 말한다. 그는 장르들이 서로 만나기 위해서는 해체하고 만나야한다고 한다. 즉 서로 간에 ‘무장해제하고’, ‘하모니가 아니라 충돌’ 시키자고 말한다.

변형과 해체는 불가피하다. 연극성을 강조하는 작품은 미술의 지각조건인 질료와 관례convention의 한계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것은 미술 고유의 질’(그린버그)이나 ‘모더니즘적 신념’(프리드) 보다는 ‘예술작품은 단지 흥미를 끌기만 하면 된다’(저드)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란 규범을 벗어난 미적 유희를 말한다. 이제 작품은‘제작이나 구성이 아니라, 결정이나 해체의 견지에서’(리차드 볼하임)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홍성민의 작품의 미술적 선조를 찾는다면 아마도 뒤샹의 레디 메이드일 것이다. 뒤샹은 예술가와 대면한 대상이 임의적이고, 예술창조는 순간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로버트 넬슨은 전용된 기호는 어느 정도 불완전하며 이에 따라 전용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넬슨은 바르트의 말을 빌어, 만일 완전하거나 가득 차 있다면 기호는 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의 전용이 성공할 때 이는 낯선 유기체와 같은 신체의 방어를 깨뜨리고 전용 그 자체를 내부에 심으면서 자연스럽게 작용한다.

전용은 그 자체가 ‘지각이고, 보여진 사물에 대한 반응이며 심지어는 기억이기도 하고 과거에 대한 마음의 재구성’(넬슨)이다. 사실 처음의 기호든 나중에 겹쳐 쓴 기호든, 기호는 원천적인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호들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산물, 가령 알레고리나 수수께끼는 예술 본래의 특성이다. 모더니즘이 알레고리가 없었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알레고리가 복귀했다는 등의 생각은 미술사의 방향을 설정하고 싶은 이론가의 주장 속에만 있지, 실제의 작품에는 없다. 이는 모더니즘의 시조에 있었던 세잔이나 마네의 초기 작품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러 기호를 가지고 유희하려는 자는 그 누구라도 변형되기 전의 순수한 기원이나, 해체되기 전의 응집력 있는 중심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홍성민이 여러 방식의 작품에서 사용하는 전용의 전략은 최초의 것 역시 여러 기원들을 가지는 텍스트라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가 선택한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역사(신화)화 등에서 자신의 복제 능력을 싼값에 판매한 삼각지 화가 뿐 아니라, 수많은 익명의 저자들(과 이에 부응한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선택한 그림들은 대부분 대중에게 시각적 쾌감을 주는 요소들이 양념처럼 조합된 그럴듯한 이미지라는 것이다. 잘 팔리는 상품에는 익명의 공통된 취향이 아로새겨져 있기 마련이다. 내러티브나 알레고리를 지워내고 순수 시각성에만 충실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매체 제한적medium-specific’(M. 프리드)인 작품들 역시, 보다 근본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그림같은 그림’의 정점이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이 자신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전통회화들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홍성민은 미술 뿐 아니라 그가 관심을 가지는 공연예술에서도 매체 제한적인 태도를 버린다.

거기에는 여러 텍스트에서 취해진 기호의 미로가 존재한다. 이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기호의 독해 가능성은 불확실해 진다. 근 몇 년간 쌈지길, 아르코 극장, 안양의 유원지 등에서 벌인 공연들은 매체적 순수성 대신에 장소의 특수성site-specific을 강조하고, 시각중심주의 대신에 몸과 사물이 강조된 연극성theatricality으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각 장르가 배양해온 고유한 관습을 뒤집고 장르 사이의 공간을 헤집는다. 이 사이의 공간들에서 기괴, 엽기, 신비, 몰입, 중독, 금기 위반, 난장의 에너지가 맞부딪힌다. 홍성민은 명확한 것을 반복하거나 확인 사살하는 미술계의 악습 대신에, 자신을 추동하는 본능에 충실하면서 미지의 영역, 또는 원초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그 여정을 이끄는 원형이 되었던 것이 우리의 전통 굿이든 아르토의 잔혹극이든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출전 | 경기문화 재단 시각 예술 부문 지원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