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세환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사진적 기술을 통해, 평범한 일상적 장면을 기념비적인 차원으로 고양시킨다. 좌우로 길게 조율된 파노라마식 화면에는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기 위해 서있는 무리들, 스쳐 지나가는 자연 등이 등장한다. 잘 찍힌 사진들이기는 하지만, 멋지거나 극적인 장면도 진귀한 풍경도 아니다. 대부분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 너무나 흔해서 되돌아보지 않는 장면들이다. 작가는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 가서도 비슷한 장면들만 건져오기 때문에, 외국 풍광사진이라면 의례 갖추어야 할 이국적 매력 같은 것도 부족하다. 가령 횡단보도 뒤편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 앞에 서있는 사람들은 뉴욕이나 서울이나 큰 차이가 없다. 물론 계절이나 날씨, 지역, 시간대 등에 따른 사람들의 미묘한 차이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차이는 주로 사진과 사진 사이에서 발생한다. 작가는 한 장소를 시간차를 두고 여러 번 찍어 변화된 모습을 비교하기도 하는데, 다큐멘타리의 성격을 가지는 이러한 작업은 철저한 분류 작업과 함께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중이다.

횡단보도가 있는 장소는 대개 유명 브랜드 간판이 걸린 큰 건물들이 있다. 그 앞에 겹겹으로 도열한 대중들이나 도로의 차들은 신호를 주시한다. 일상은 신호체계에 의해 움직여진다. 노세환의 작품에서 이러한 체계들은 단지 억압적이기 보다는, 많은 이들이 도시에 함께 모여살기 위해 필요한 합리적인 통제로 나타난다. 불특정의 직업과 세대, 성별, 인종으로 이루어진 일시적 공동체인 도보자들은 신호대기 중인 2분 10여초의 시간 동안에 바쁜 걸음을 멈추고, 대개 무의미하고 무의식적인 동작들로 희미한 궤적을 남긴다. 대개 맞은편에서 찍는데 찍는 순간인 1초를 작가는 ‘조금 긴 찰나’라고 이름 붙인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각(各) 1초는 작가가 부여한 1초들이 익명의 대중들에게 각기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주목한다. 1초는 사람이 느끼기는 매우 짧지만, 카메라 셔터 스피드로서는 매우 긴 시간이다. 1초 안에 포착된 것은 자본과 욕망이 결집된 현대적 건물을 배경으로 하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전방을 향하여 배열된 무리이며, 어느 순간에 일시적으로 모여든 불특정 다수에 대한 기념사진이다.

지하철, 횡단보도 같은 곳은 전형적인 도시의 장소이다. 작가는 단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기다리는 장소 곧 집단을 움직이는 도시의 규율이 작동하는 곳을 선택한다. 횡단보도 시리즈와 같은 맥락에서, 지하철의 플랫폼을 찍은 작품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열차의 긴 궤적이 각자의 관심으로 흩어져 있는 승객들을 일시적으로 묶어준다. 고층 빌딩이나 교각 주위를 밝히는 가로등, 그 아래 차량의 희미한 궤적이 남아있는 인적 없는 밤풍경도 전형적인 도시의 장소이다. 일과가 끝난 밤에야 인근 공원에서 운동할 수 있는 도시적 일상의 리듬이 반영된 것이다. 한적한 밤의 도시 아래에 깔린 실타래 같은 궤적은 대상의 움직임과 광량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연속적인 다양함으로 나타나는 흐름과 패턴은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찍은 풍경에서도 나타난다. 국내외의 도로변 풍경은 형태가 뭉개져 추상적 선들로 배열된 아래 장면과 구상적 형태가 남아있는 윗부분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풍경 윗부분은 풍성한 구름, 숲 등의 실루엣이 보존되어 있으나, 아래 부분은 차선이나 가드레일같은 인공적 구조물이 추상적 선의 흐름에 실린다. 그것은 너무 빨리 지나가 거의 정지된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동하면서 보는 풍경 역시, 현대적 일상의 산물이다. 그것은 두 시간 가까이 되는 긴 왕복거리를 규칙적으로 오가야 했던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차에 내려서 풍경을 차분하게 음미할 시간이 없었던 작가가 달리는 차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달리는 카메라’시리즈이다. 이는 끝없이 이동하는 사람들의 시점, 그리고 이동하면서 잠시 멈춘 이들을 포착한 사진들과 함께 도시적 일상의 핵심을 보여준다. 신호등을 24시간 스틸 컷으로 찍은 사진을 이어 붙여 만든 영상이 느린 음악에 실려 나오는 작품은, 보다 많은 장면을 압축된 시간에 연속적으로 보여줌으로서, 도시적 일상의 패턴을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조망한다.

노세환의 작품 속 일상은 질서 있는 체계 속에서 흘러가는 인간과 자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권태로우면서도 평온하고, 고정되어 있으면서도 서서히 변화한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같이 지금 이후가 어떻게 될지 예측 불가능한 불안정한 나라에서 질서 잡힌 일상이란 회복되어야 할 사회의 이상일지도 모른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일상은 더 단단히 고정되어 있고, 그만큼 일탈에의 욕구도 크지만, 일탈은 체계의 테두리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해프닝으로 끝나곤 한다. 그러한 사회는 급격한 단절과 변화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모여 제각각의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현대사회는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조절된다. 시스템은 반복과 순환을 야기하며, 이러한 일상성이 펼쳐지는 장소가 바로 도시이다. 그러나 일상을 일상으로 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차원이 필요하다. 사실은 멈추지 않는 흐름들을 1초의 시간에 고정시키는 것, 그것을 주목할 만한 대상으로 만들어 음미하는 작가의 행위는 의미의 원천으로서의 일상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것은 일상 그 자체에는 없지만, 잠재되어 있는 어떤 충만함을 끌어내는 작업이다. 노세환은 매일의 일상을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과 결합시키려 한다. 여기에서 시간은 중요한 변수가 된다. 시간은 모든 것을 서서히 또는 급격히 변화시킨다. 가령 100년 전 평범한 이의 하루 일상이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 것인가를 상상해 보라. 그가 주목하는 횡단보도에서의 2분여 시간, 장면을 고착하는데 걸리는 1초 등, 짧은 시간의 편린들은 반복되면서도 서서히 변화하는 어떤 흐름을 담는다. 변화는 무수한 시간의 축적에서 발생한다. 짧은 시간 동안에 발생한 변화의 흐름은 흐릿한 궤적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이들은 삶의 순환 속에 진입한 불특정 다수의 인물들로 얼굴을 정확히 알아 볼 수 없다. 여기에서는 명확한 주체와 대상 보다는, 흐르는 것만이 실체로 간주된다. 흐름을 야기하는 체계를 강조할 경우 흐릿한 사람들 뒤의 건물의 존재감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사람이든 자동차든 자연이든 인공적 구조물이든 정도의 차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짧은 시간들을 한없이 확대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도시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노세환의 작품에서 일상성은 또한 현대성이다.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일상성과 현대성은 오늘날 시대정신의 두 측면이라고 말한다. 그는 현대성이 일상성을 후광으로 장식하고 또 그것을 뒤덮는다고 지적한다. 일상이란 보잘 것 없으면서도 견고한 것이다. 무의미의 집합체인 일상에 의미의 집합체인 현대성이 답을 한다. 노세환의 작품에서 현대성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새롭고 신기하고 모험적인 측면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현대의 역동적 측면인‘모든 사회적 상태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확실성과 운동’(마르크스)은 수평적 색 띠나 희미한 궤적 등 추상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서 모더니티는 모더니즘과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신호가 지배하는 일상은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회의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짓는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소비이다. 신호등 앞에 일렬로 선 사람들은 그들 앞뒤로 펼쳐진 거대 기호의 복합체 속에서 생산하고 소비한다.




일을 하기 위한 출근이든 놀기 위한 관광이든, 흐름 자체를 만들어내는 배후에 소비 조작의 관료 사회가 있다. 점차 강화되는 생산과 소비의 촘촘한 그물망은 거대한 상호반사 효과를 자아낸다. 사진에 찍힌 횡단보도 맞은편에는 마치 거울상 비슷한 장면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마치 대개 횡단보도가 있는 곳은 거대한 소비의 흐름들이 만나는 결절점이다. 이 결절점 주변에서 대중들은 이합집산을 반복한다. 작가는 현재를 고정하는 기술적 수단--그자체가 현대성의 산물인--을 이용하여 구체적인 현실과 융합되는 기호의 흐름을 가시화한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일상성과 현대성을 지금의 현재 속에 응결시키기에 적합하다. 일상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 르페브르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피드백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장으로서 정의한다. 문화는 사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노세환은 피사체가 된 대중들에게 부여하는 1초의 시간들을 통해 그들에게 하나의 양식을 부여하고자 한다. 자연스럽게 전래된 양식의 지배를 받아 왔던 전통사회와 달리, 현대사회에서 양식은 사라졌지만 의식적으로 추구되는 것이다.

작가는 흩트러진 일상의 부스러기들을 작은 단절을 통해 한데 모아놓는다. 이를 통해 일상은 역사화 된다. 여기에서 역사는 ‘동질적이고 비어있는 시간 속에서 구성되는 대상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에 의해 메워지는 구조물’(벤야민)이다. 노세환의 작품에서 지금 이 시간으로 응결된 현재는 흩어지는 연기처럼 계시적으로 드러난다. 순간적 사건의 결정화, 즉 정지는 어떤 깨달음을 준다. 정지된 기호들은 융합되어 리듬이 되고 흐름이 된다. 흐름은 현재를 끊임없이 변형시킨다. 흐름들은 붙박힌 기호의 불연속성을 거부하고, 삶의 연속성과 그 의미를 재발견하기를 촉구한다. 변화하는 미세한 순간, 흐름에 대한 작가의 집착은 반복적 일상의 기계적 고정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의지를 담고 있다. 거기에서는 일상의 허구적 합리성이 폭로되기는 하지만, 침울하거나 부정적이지는 않다. 그는 일상의 소외보다는 일상이 가지는 위대성, 즉 지속성에 주목한다. 어쨌든 일상은 삶이 뿌리박고 지속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