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 상태에서 필라멘트가 달아올라 빛을 내는 전구는 밀폐된 구조를 가지지만,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밝힌다. 한계와 무한의 접면에서 사건들이 발생하듯, 밀폐는 개방을 위한 조건이 된다. 그것은 밝힘을 통해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든다. 김다영에게 전구는 사회와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보호막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무엇인가를 안전하게 담아내는 밀폐의 느낌은 세트화 된 축소세상의 연출 뿐 아니라, 액체를 담는 것에서도 보여 진다. 작품 [처녀의 모유]나 [유유히 놀다 2]는 전구 안에 우유나 물이 담겨있고, [유유히 놀다]는 아예 전구들을 수족관 속에서 떠돌게 한 작품이다. 전구가 충격에 약한 소재이듯이, 빛나는 작은 세상은 훅 불면 꺼져 사라질 것 같다. 조명이 꺼지면 무대도 사라진다. 세상이란 것이 무대이고, 인간은 무대에 올랐다 주어진 역할 연기를 하고 사라지는 배우에 불과하듯이, 전구들은 자족적인 소우주이자 무대가 된다.
인형들은 연출자로서의 작가의 어떠한 주문에도 순순히 응해준다. 인형들을 에워싸는 세계는 작고 예쁘장해 보이지만, 세상이 그러하듯 아름다운 장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냥팔이 소녀같은 환상적 동화에도 가혹한 현실이 있었듯이, 이 작은 무대들에는 권력관계로 점철된 사회적 풍경을 담고 있다. 초기 작품인 [벗어나야 할 이유에 대해 묻다](2003)는 젖은 머리로 고급 승용차에 올라타는 매춘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피노키오의 비애]는 성장하고 싶은데 그대로 머물러 있는 소년의 비애를 표현하며, [용감한 난쟁이가 백설공주를 차지한다]는 연인을 선택하는 냉혹한 기준이 나타나고, [피터 팬의 여성편력]은 수십 명의 요정을 거느린 피터 팬을 욕정과 소유의 화신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다시 읽혀진 동화에는 더 이상 순수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여성 작가로의 자의식이 보다 강하게 묻어나는 작품들도 있다.

독수리 오형제처럼 여성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캐릭터나, 뽀빠이, 아톰처럼 ‘강해야 한다’는 남성성의 이데올로기를 내포한 캐릭터들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석유 주유기로 남성의 상징을 유머러스하게 은유한 [남자란 이름의 불쌍한 족속들]과 여성성의 화신인 꽃을 대비하기도 한다. 지름 160cm의 거대한 작품 [perfect flower]는 여러 색깔의 꽃을 표현했는데, 암술 부분에 선인장이 들어있는 전구가 박혀있다. 통상적으로 꽃은 여성성의 화신이지만, 이 향기 없는 꽃들은 양성적이다. 하늘하늘한 형태의 반투명 꽃잎 중심에서 솟은 암술을 표현하는 전구 속 선인장이 남성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전구는 그자체가 하나의 자족적인 소우주이기도 하지만, 다른 오브제와 결합하여 만물을 발생시키는 씨앗이나 만개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성적 은유가 강한 작품들에서 전구는 오브제로 사용되지만, 김다영의 작품에서 전구는 주로 빛을 품은 공간으로 나타난다. 첫 개인전 [dress code imagination](목인갤러리, 2007년)까지만 해도 전구는 단순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전구를 줄줄이 이은 설치작품으로 공간을 채운 것에는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번에 필룩스 조명 박물관이 후원하는 전시를 통해 빛은 보다 역동적 요소로 도입된다. 빛을 유연하게 변화시키는 기술은 한 장면으로 고정되기 십상인 정적인 무대에 시간성을 부여한다. 조명의 변화는 무대의 느낌을 달리 만들고, 작품의 시적 함축성 뿐 아니라 서사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차이를 통해 연결된 세계들은 시간성을 매개로 알레고리의 특성을 강조한다. 특히 전구 소켓부분에 새겨진 텍스트들은 볼 수 있는 것과 읽을 수 있는 것의 조합으로, 작품의 알레고리를 구성한다.
다양한 실체를 담아내면서도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전구 안 세계는 일종의 단자monad이다. 바깥으로부터 받아들일 어떤 ‘문도 창문도’ 가지지 않는 폐쇄성은 모나드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E. 클레망이 편집한 [철학 사전]에 의하면, 모나드는 그 자체의 속성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포함한다. 모나드는 자신의 관점에서 이 우주를 표현한다. 모나드는 우주 전체에 메아리를 보내며, 우주 전체의 거울로서 각각의 시각에서 자신을 응축하고 표현한다. 거기에는 폐쇄를 통한 연결이라는 역설이 있다. 드나들 수 있는 구멍도 입구도 갖지 않는 단자적 세계는 하나의 방이다. 그러나 각각의 방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차이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김다영의 근작에서 빛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작품들은 관객을 어두운 바탕에서 빛나는 안쪽의 장소들로 초대한다.
입구나 창이 없는 폐쇄된 방 속에서 내부를 밝게 비추는 빛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을 내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는 모나드를 ‘내부의 자율성, 외부 없는 내부’라고 했다. 그 각각이 하나의 세계이자, 무한히 많은 나누어진 공간들로 이루어진 김다영의 작품은 외부 없이 순수 내부적인 상태로 닫혀 있는 단자의 세계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처럼 각자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연결된 것, 즉 다양함의 공존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체는 심연으로부터 태어나며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전구 내부의 곡률을 따라 전개되는 무한한 계열이 세계를 이루며, 이 세계는 어떤 시선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 시선은 보편적인 유일한 시점이 아니다. 작가는 조각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이루는 구성요소의 면면을 보면 발견된 오브제들이 많다.

작품 뒤에는 전능한 창조자로서의 주체보다는,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겸손한 청취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가능성과 표현의 세계로서의 단자는 타자를 전제하며, 단순한 개인을 넘어서는 많은 것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모나드는 세계를 향해 있으며 동시에 세계는 모나드 안에 있다. 이처럼 세계는 순환하는 이중적 구조 안에 놓여있다. 들뢰즈는 이것이 공존 불가능했던 다양한 세계들을 카오스모스 안에서 서로 교차시키는 단자적 사고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보다는 동화적 알레고리로 가득한 김다영의 작품들은 의식의 지평 뒤를 넘본다. 거기에는 무의식의 심연을 환한 빛 속으로 끌어 올린다. 특히 만화적 캐릭터라는 모티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나 꿈에 내재하는 심미성과 관련된다. 복귀된 것은 유년의 천진함과 순수함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의식에 눈을 뜬 순간에 닥쳐왔던 세계의 어두움이 함께 존재한다. 심연 속에서 빛나는 환상적 우주는 유폐된 현실을 암시하며, 동시에 유폐된 현실로부터의 도피도 함축한다. 냉랭한 현실세계에 직면하여 우리는 낭만주의자들처럼 ‘유동적이고 불명확한 형태들, 변모들과 탄생들의 원초적인 들끓음 속’으로 즐겁게 달아나는 것이다. 전구 안의 소우주들은 단단한 울타리 보다는 포획의 성격을 가진다. 일련의 정해진 규칙을 따라 행해지는 포획이 지향하는 것은 하나이며 여럿인 세계이다. 그것은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예술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그 내부는 기호들의 무작위적인 혼합으로 다양성과 차이로 충만한 계열로 이루어진다. 보이지 않는 행성의 궤도 위에서 찰랑거리는 수많은 소우주 안에는 무한한 계열의 수렴과 발산에서 생성되는 사건들이 명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