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색, 푸른색, 회색 등으로 뒤덮인 단색조 화면들은 ‘풍경(paysage)’이라는 부제가 무색하게 아무 풍경도 보이지 않는다. 구체적인 대상은 물론, 작가 고유의 필획이라 할 만한 흔적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효성의 회화는 무엇의 재현도 표현도 아니다. 그의 그림에는 닮음(유사)이나 상징주의가 없다. 오렌지색의 따뜻함과 세속성, 푸른색의 차가움과 정신성, 회색의 중성성 등, 각 색채가 연상시키는 바가 없지는 않으나 각 색채 별로 명확한 형식적, 질적 차이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가는 굳이 색채의 상징적 의미를 확정짓지 않는다.

색이 칠해져 있다기 보다는, 두터운 색유리를 덧붙여 놓은 듯한 캔버스는 프레임 저 너머로 무엇인가를 반영하는 투명한 창이기를 포기한다. 바탕 면과 비슷한 색조의 기하학적 형상들이 겹쳐져 있어 희미한 원근감이 있지만, 시선이 명확히 고정되는 지점이 없기 때문에, 중첩된 사각형들은 두터운 밀도를 가진 유동적 바탕 면에서 서서히 이동 혹은 표류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뭔가 건져보려는 심사로 텅 빈 화면을 휘휘 저어보는 눈길에 걸리는 기하학적인 형상들은 외부의 지시대상과 무관한 회화적인 코드를 만들 뿐이다. 색 면들은 바탕과 형태라는, 그림을 이루는 최소한의 요건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칠하거나 그리지 않고 안료를 붓고 말리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다. 시간차를 두고 균등하게 처리된 표면들의 집적이 만들어내는 밀도의 차이를 통한 추상적 원근감을 만들고, 이를 통해 화면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평면들의 겹침이 이루는 깊이는 강하지 않고 표면적이다. 몇 개의 기하학적 형상이 겹쳐지면서 문 너머의 문 같은 환영이 떠오르지만, 제일 마지막 문이 열리면서 개봉될 궁극의 핵심은 부재하다. 캔버스 안의 중첩된 기하학적 형태와 또 눈으로는 감지할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색채의 층들은 매번 어떤 한계를 구획 지으면서도 무엇을 확정짓고 있는지 끝없이 연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폭의 평면성을 위해 바닥에 펼쳐놓고 안료를 부으면서 만들어진 화면은 시간이라는 흔적 외에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순수 시각적인 공간이다. 균질의 표면들이 중첩된 화면은 무한한 시간의 층위를 증거 한다. 명암 대비에 의한 광학적 공간이 아닌, 밀도의 차이에 의해 만들어지는 색의 계열은 수축하고 팽창하는 이중적인 움직임을 낳는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축을 따라 지속적으로 변모하는 주형이다.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빛은 시간이고 색은 공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효성의 작품에서도 공간화 된 색이 빛이 되는 것은 시간을 통해서이다.

출전 | 미술세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