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중의 하나를 보내는 곳이며, 교문은 단지 그곳을 들락거리는 기능을 넘어서는 장소이다. 70-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필자가 기억하는 교문은 매우 삭막했다. 대개 시멘트나 콘크리트 된 멋대가리 없는 기둥 사이에 쇠로 된 커다란 문이 달려있고, 등하교 시간이 아닌 때는 굳게 닫혀 있었다. 그곳을 매일 통과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복장 검사와 등교시간을 검열당하는 강제적 규율이 작동하는 곳이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즈음에는 최루탄 밀도가 가장 높은 마의 지대이기도 하였다. 사회의 관심과 자본이 몰리는 대학교의 경우 2000년대를 전후해서 재개발 열풍이 불어 대대적으로 변모하였다. 교문 옆의 정답던 큰 나무는 베어지고 교내의 모든 장소들이 도보자가 아니라, 학내로 몰려든 자동차의 동선을 중심으로 구조 조정이 된다. 교문들은 광장처럼 넓어졌지만,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전 보다 더욱 급박해졌다.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치부되는 초중고교의 교문들은 변화된 시대에도 불구하고 맞지 않은 옷처럼 그대로 방치된 경우가 많다.

학교라는 공공장소에 소리 없는 점령군인 상업주의의 침투가 그 안의 공동체의 의지와 무관한 소외된 개발을 주도했다면, 방치된 교문들은 그나마 소외로부터도 소외된 곳이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팀인 ‘문화수리공’(기획자 이탈)이 작년에 이어 인천에서 벌인 교문 만들기 사업은 공공미술이 펼쳐지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 중의 하나로 주목된다. 거기에는 조직화된 공동체가 존재하고, 구성원들이 만족할만한 생산물을 낳아야 한다는 점에서 공공미술의 목표가 보다 명료하게 설정될 수 있다. 그것은 공동체와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물일 뿐 아니라,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에도 현실 속에서 단단하게 뿌리박고 반영구적으로 남아있을 상징적 기념비가 된다. 이와 반대의 경우, 가령 공공미술의 수행자가 목표로 하는 장소가 너무 광범위하고 대상이 모호하며 참여 작가들이 공공영역에서 작업을 수행해본 경험이 없고, 더구나 시간까지 부족 할 때,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지는 몇 년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벌어진 공공미술의 현장에서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동학교에 갔을 때의 첫인상은, 지하철 입구와도 닿아있으나 다소간 한적한 그곳이 들고나는 사람을 감시하고 조절하는 출입구가 아니라,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에 놓인 평상같다는 느낌이었다. 학교 안의 큰 나무를 에워싸며 층층이 깔린 방부 목 데크들은 나지막한 높이로 거리를 향해 활짝 열려있고, 여기저기 머무를 수 있는 면이 많이 마련되어 있다. 프로젝트의 부제로 설정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말의 놀이적 기원을 생각해 볼 때, 그곳은 그저 통과하는 곳이 아니라, 멈추어 서고 둘러앉아서 소통하기를 제안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교문 안쪽의 타일 벽화는 교문에 대한 아이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물로, 그들이 생각하는 교문의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다. 노랑색이 칠해진 그림 뒷 건물은 다소간 칙칙한 학교건물과 그 주변을 화사하게 변화시키고, 건물 모서리에 학교 이름이 크게 붙어있어 학교의 존재를 주변에 널리 알리고 있다. 프로젝트를 위해 할애된 공간이 넓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개방감이 높은 디자인과 다수의 잠재적인 동선들로 인해 주변과의 접면이 최대로 확보된다.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드러내면서도 주변과의 어우러짐을 꾀하는 독특한 구조이다.




그것은 고급 아파트를 비롯해 도시의 대형 건물들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서 지역의 랜드 마크를 자처하며, 사유지의 폐쇄성을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의 방향이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숨 가쁘게 달려왔던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도시는 물론 전국토가 항시적인 (재)개발의 와중에 있다. 기존에 있던 것을 깡그리 밀어내고 고층건물을 들어앉히고 소유와 지배의 욕망에 물든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것이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대중을 위한 효율적인 공간구조 같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은 소통이 부재한 개별적 입자들로 이합집산 될 뿐이다. 건축과 몸의 관계를 탐구해온 저자 리차드 세넷은 [살과 돌]에서 근대적 개발이 창조하려고 하는 순수한 부피의 공간,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투명한 공간이 창조된 기원을 밝힌다. 근대의 혁명가들은 어떤 장애물도 없는 광장같은 공간에서 자유와 진보를 꿈꾸었다. 그러나 새로운 출발이 가능할 것 같은 이 텅 빈 공간에서 도시의 움직이는 군중은 자주 멈춰서고 침묵에 빠져들고 흩어져 버렸다. 한계도 없는 거대한 부피의 자유로운 공간이 군중의 혁명적인 육체를 누그려 뜨렸다는 이 역설은 현대도시에서 더욱 잘 이해된다.

군중은 여기에서 집단적으로 훔쳐보는 이가 되었다. 과거의 쓰레기가 사라진 그곳에는 혼돈과 무관심, 둔해진 육체로 채워진 것이다. 대규모로 개발된 현대 도시에서는 대화보다는 침묵의 시선이, 머무름보다는 통과가 지배한다. 세넷은 새로운 도시환경이 속도, 탈출, 수동성을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도시공간이 단지 움직임의 기능만을 할 때 공간은 활기를 잃게 된다. 운전자는 공간을 뚫고 나가고 싶어 할 뿐, 공간에 의해 자극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지형을 항해해 나가는 데는 적은 육체적 노력이 필요하고, 그러므로 접촉도 적다. 수동적인 육체 앞에 스크린처럼 펼쳐진 외부세계는 접촉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켜주며,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성, 그리고 인과관계를 잃고 명멸한다. 현대의 도시는 인간보다는 자동차를 우선시 하는데, 외계를 경험하는 것은 자동차의 창 너머로 보이는 방식으로 수렴된다. 현대 도시에서 길은 차들이 점령하고, 도시를 이루는 기호들은 자동차의 속도와 시야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자동차 중심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바깥에 오래 머물러있지 않고 개별적으로 흩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 도시의 공간 구조 자체가 인간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건축가들이 현재 같은 방식의 자동차 의존 형 도시가 공동체의 결속력 약화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고층건물 대신에 작은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거리를 향해 열린 구조는 고립과 소외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새롭게 디자인 된 성동학교 입구는 밀집 복합형 접면들을 확장하고자 한다. 그것은 특수학교라 늘 대형버스가 드나드는 기능성을 살리면서도 머무름과 소통이라는 또 다른 기능을 고려했다. 교문을 이루는 데크들은 바깥과 안을 경계 짓는 담장이라고 하기는 매우 낮은 높이이며, 한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쪽문부터 널찍한 바퀴 문, 자바라를 설치한 가장 큰 입구까지, 사람들 간의 교류가 가능한 장소의 확장에 집중한다. ‘문화 수리공’들에 의해 재창조된 성동학교의 교문은 접촉 공간의 확대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에 답하고자 한다.




도시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을 몰려 살게 한다. 현대문명이 이러한 이해를 조정하는 방식은 직접적인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오늘날 다양한 과학기술은 전자매체가 접촉에 대한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개개인은 사회적으로 뒤에 물러서며, 익명의 권력은 주변 환경과의 이러한 수동적인 관계와 소외감의 유지를 통해 작동된다. 접촉공포를 벗어나 사적 공간에 칩거하고,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 이 사적 공간을 확보하고 확대하는 것에 개인의 관심이 쏠려있다. 이렇게 환원된 욕망에 대한 통로를 권력이 조절하고 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냉정한 개별자들은 사회적 공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분리되면서 ‘공동의 운명을 생소하게 느끼는 개인들’(토크빌)이 되었다. 도시가 공동운명을 거부하는 개인으로 분리시키는 움직임을 통해 지금의 형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동체의 사라짐과 소외에 직면하여 공공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미술이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사회적 접촉이다. 사회적 접촉은 우리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그 필요성이 부각된다. 현대 도시의 소외를 일반론적인 차원에서 다룬 세넷은 특이한 대안을 내세운다.

그는 무자극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근대적 육체에 대항하여, 고통 받는 육체를 매개로 삼자고 말한다. 육체는 어려움에 맞설 때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자신의 육체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의 차이를 경험할 수 없다. 시민의 연민은 순수한 선의나 정치적인 판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결함에 대한 신체적 인식에서 오는 것이다. 의미 있는 자아의 소외를 경험하지 않으면 타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사회적 차이는 서서히 고착화 된다. 그것은 사회적 사실을 육체의 사실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서로 간의 분리를 낳는 육체적 수동성을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은 이 고독이 피하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그 중에서도 살아서 경험한 고통이다. 교문 만들기 프로젝트가 진행된 성동학교는 장애우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이다. 개방 지향의 교문 만들기는 고통을 통한 소통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그곳은 고통의 공유를 통해 시민의 육체로 거듭나는 장소가 된다. 살(몸)과 돌(건축)의 괴리를 극복하고자 했던 세넷이 강조하듯이, 그곳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불일치하는 부분을 드러내고 인정하며 표현하는 무대로서의 공공장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출전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프레파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