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근원적 형상과 자연의 원형



이길래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인 직조(直彫)라는 전통적인 조각의 미덕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탈조각의 가능성을 띠고 있다. 그러니까 매스를 결여한 형태나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구조 그리고 특히 조각이면서도 회화적인 상황의 연출로써 전통적인 조각과의 이중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의 작업이 갖는 특질이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유래한다. 그 주제를 볼라치면, 대략 잃어버린 성, 고고학적 발굴, 생성과 응집, 그리고 근작에서의 나무 시리즈 작업에 이르기까지 근원적 형상이나 자연의 원형을 일관되게 추구해오고 있다.

잃어버린 성. 이길래의 초기 조각 <잃어버린 성> 시리즈는 문명사회의 폐허화된 잔해를 떠올리게 한다. 그 발상이나 인상이 고도로 문명화된 삶을 향유하다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것으로 알려진 전설의 섬 아틀란티스나, 고전주의자들을 열광케 한 고대 로마의 폼페이 유적을 떠올리게 하며, 이로써 삶보다 죽음과 더 친숙한 삶을 살았던 낭만주의자들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주지하다시피 낭만주의자는 현재보다는 과거에, 일상보다는 이상에, 삶보다는 죽음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무덤이나 폐허화된 장소 같은 문명의 흔적에 열광한다. 그들이 삶 자체가 아닌 삶의 흔적에 열광하는 것은 단순히 고대 문명에로의 회귀의식에 대한 반영이기보다는, 그것이 잃어버린 것들, 상실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흔적으로부터 일종의 결여와 결핍에 바탕을 둔 존재론적 자의식마저 끌어내는 것에서는 유미주의 내지는 탐미주의자로서의 자질마저 느껴진다. 미학이 아니면 삶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는 니체의 말마따나 예술적인 삶을 살았던 그들이기에, 비현실적 비전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이기는커녕 오히려 예술의 이유이며 현실적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계기였던 것이다.
이길래의 의식은 이처럼 현실적 삶보다는 과거를 향해있다. <잃어버린 성>에서 성은 작가의 유년시절을 상징하며, 작가가 자신의 내부로부터 축조해낸 유토피아를 상징하며,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던 모래성과도 같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공상도시를 상징한다. 그 신기루와 함께 자신을 유년시절로 되돌려놓는 한편, 자신의 또 다른 분신과 만나는 것이다. 이로써 단순히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이나 도피행각을 넘어 보다 본질적인 자기 반성적 사유의 일면을 드러낸다. 도대체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혹은 아예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에 대한(주지하다시피 성은 집이 변형된 것이며, 집은 정체성을 상징한다).




고고학적 발굴. 아득한 전설 저편으로 사라진 문명의 폐허화된 잔해에 경도된 작가는 그 잔해를 재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예 발굴 개념 자체를 도입한다. 땅을 파낸 후 그 파낸 땅의 형(形)을 따라 폴리코트를 부어 덧바르고 재차 흙으로 파묻기도 하고, 미리 만들어 둔 형상을 땅에 묻기도 한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연후에 그 형상을 발굴한다. 이때 그 대략적인 형상을 상상정도 할 뿐, 작가 자신조차도 최종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알지는 못한다. 폴리코트가 굳으면서 땅의 지세와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통해 형상과 땅의 표면질감이 일체화된 그 형상은 말하자면 우연한 형상, 예기치 못한 형상, 반쯤은 자연(땅)이 만든 형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형상이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계기야 작가가 제공했지만, 그 최종적인 형상만큼은 땅의 생리와 재료 자체의 내적 원리에 의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의식적인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형상이 저절로 드러나도록 돕는 작가의 태도는 작업에 대한 방관자적 태도이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이 원래 품고 있었을 형상(근원적 혹은 원형적 형상)을 모방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출인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흙 혹은 땅의 질감을 그대로 빼닮은 형상이 만들어진다. 그 형상이 영락없는 부장품의 생리와 표면질감을 떠올리게 하지만, 결정적인 형태(예컨대 기물이나 제기와 같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느 부장품과는 다르다. 마치 발굴 현장에서 막 출토된 부장품을 보는 듯한 알 수 없는 형상들이 땅의 지세를 발하고, 자연의 응축된 에너지를 내뿜는다. 여기에 거대한 스케일마저 더해진 기묘한 덩어리들이 기념비적 인상을 불러일으키면서, 우뚝 서 있는 고대의 거석문화의 유적(예컨대 스톤헨지나 고인돌)을 보는 듯하다. 보기에 따라선 세 개의 발이 달린 제기나 거대한 남근석 혹은 이도저도 아니면 마구 엉겨 붙은 거목의 뿌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말 그대로 연상에 지나지 않으며, 기본적으론 비결정적이고 가역적인 형상, 우연적인 형상들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아마도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불가지적 형상,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형상, 형상 자체로 부를 만한 원형적 형상을 겨냥하고 있는 듯싶다. 이처럼 땅의 본성, 흙의 본성, 궁극적으론 자연의 본성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과정을 통해 근원적 형상을 발굴해내려는 작가의 의지는 영락없이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의 생리를 닮아있다. 그리고 그 자체 예술 혹은 미술과 여타 인문학과의 연접 내지는 이접 가능성을 모색하는 최근의 학제간 연구방식(이를테면 미술과 고고학과의 만남으로 나타난)을 선취한 것이다.

생성과 응집. 땅의 본성, 흙의 본성, 자연의 본성을 겨냥하는 이길래의 의식은 자연스레 자연적인 소재에 미친다. 나무나 철 그리고 석재와 같은 조각과 관련한 전통적인 재료는 물론이거니와, 조개껍질, 석화(굴)껍질, 다슬기껍질, 그리고 옹기 파편과 같은 자연소재 등이 도입된다. 공교롭게도 옹기 파편을 제외한 모든 재료들이 바다로부터 유래한 것인데, 아마도 이는 작가의 내면에 무의식으로 각인된 유년시절의 추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친화적인 형상을 겨냥한 작가의 의식이나, 자연으로부터 채집된 소재가 자연의 본성을 더 잘 형상화할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감과 함께, 일종의 생리적 동화현상이나 끌림 현상 같은 것이 작용했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자연소재들을 폴리코트 등의 조각 재료와 함께 덧붙여나가는 식의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전체적인 형상을 구축한다. 그 형상을 보면, 대체로 원형이거나 변형사각형 그리고 세로로 서 있는 기둥 형상으로서, 군더더기가 제거된 최소한의 기하학적 형상들이다. 이로부터 미니멀리즘에 바탕을 둔 환원주의적 의식이 엿보인다. 이를테면 모든 형상의 근원인 원형적 형상이나 절대형상을 지향하는 경향성과 함께, 특히 형상을 최소한의 구조로 한정하려는 태도로부터는 구조주의(모든 불투명한 현상의 이면에는 그 현상을 투명하게 설명하게 해주는 구조가 놓여져 있다는, 문학으로 치자면 난해한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에 해당하는)에 대한 공감마저 느껴진다. 이처럼 기하학적이고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형상들이 정작 자연으로부터 채집된, 유기적인 소재들로 축조된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론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관념적인 형상과 유기적인 소재가 서로 어우러져서 일종의 내적 울림을, 내적 에너지를, 내적 생명력을 응축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길래의 작업에 있어서 형상과 소재와의 관계는 단순한 재료 이상의 의미론적인 차원(이를테면 순수관념과 자연의 생명력이 만나는 접점을 겨냥한)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한편, 작가는 이러한 자연소재들과 함께 단추나 기계부품 등의 기성 오브제들마저 소재로 차용하고 있다. 나무와 철 등의 전통적인 조각재료와 조개껍질이나 옹기 편과 같은 자연재료, 그리고 일상적 소재인 레디메이드마저 재료로 도입함으로써 조각적 소재로 사용하지 못할 재료가 없는 것 같다. 이 플라스틱 소재나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인공의 오브제들을 집적해 만든 형상들은 현저하게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데, 그 인상이 작가의 여느 작업들에서의 원시적이고 질박한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여느 작업들의 생리가 자연의 본성을 닮았다고 한다면, 현저하게 문명의 본성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업들은 그 이면에서 일상성 담론에의 공감을 자아낸다. 이를테면 문명의 잔해와 원형의 탐색에 맞춰졌던 작가의 관심이 마침내 주변의 일상적 소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상성에의 공감에 대해 말하자면 단순히 소재의 범위가 확장된 정도를 넘어 작가의 의식이 원형으로 대변되는 이상성 혹은 이상주의와 더불어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일상성 혹은 일상주의마저 아우르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는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이 느껴진다. 즉 각 부분들이 개체적 특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전체 형상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분들이 모여 전체형상을 일궈낸다는 발상 자체는 세계나 우주의 기원론 혹은 발생론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체형상이 최소한의 단위원소인 조개껍질이나 옹기 편 그리고 단추 하나하나의 집합으로써 구조화돼 있다는 사실에의 인식은 최초의 입자, 모나드, 단자들의 유기적인 집합으로써 축조된 세계와 우주의 생성원리에 대한 유비적 표현처럼 읽힌다.
이러한 인식 즉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은 동 파이프를 소재로 한 작업에서 상대적으로 더 선명해지고 정형화된 형식을 획득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동 파이프를 일정한 간격으로 자른 연후에, 그 둥근 형태를 단위원소 삼아 반복적으로 덧붙여나가는데, 그 형태나 크기가 균일한 탓에 다소간 비정형적인 자연소재를 재료로 한 작업들에 비해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는 편이다.
이렇게 축조된 최종적인 형상 역시 다른 작업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자연소재를 재료로 한 작업들이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킬 만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상을 통해 순수관념의 형식으로 응축된 자연의 생명력을 표상하고 있다면, 동 파이프를 소재로 한 작업들은 한눈에도 그 구체적인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재현의 논리, 모방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 형상이 때로 거대한 크기로 증대된 전구도 있지만, 대개는 호박, 고추, 마늘, 양파, 조롱박, 메론, 감, 앵두, 버섯 등의 과일이나 채소류들이다. 이처럼 소재가 암시적이고 추상적인 데서 재현적인 것으로 변화한 것에 대해서는 우선은 이상적인 것에서 일상적인 것에로 작가의 관심이 미친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활환경(작가는 실제로 작업 틈틈이 텃밭을 가꾸기도 한다)에 따른 생활철학의 변화로부터 자연스레 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이로부터는 단순한 환경적 요인 이상의 생명에 대한 경외감마저 감지된다. 즉 부분이 모여 전체적인 형상을 빗어내는 동 파이프 절편 하나하나가 자연형상을 일궈내는 생명의 최소단위원소, 생명의 씨앗, 소우주, 세포와 의미론적으로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나무. 자연에 대한 이길래의 관심은 자연에 응축된 내적 생명력과 자연의 감각적 형태가 서로 결합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러니까 암시적이고 관념적인 형상을 빌려 자연에 내재된 에너지를 표현하던 것(여기서 자연은 다만 표상의 형식 즉 상징형식으로서만 암시되고 드러난다)에서 마침내 감각적 닮은꼴을 통해서도 똑같은 강도로 자연의 생명력을, 그 생성원리를 표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대략적인 과정이나 방법은 과일을 소재로 한 전작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동 파이프를 일정한 간격으로 잘게 자른 연후에 그 단면에 나타난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에 그 측면을 눌러 옆으로 긴 타원형을 만든다. 이 타원형을 단위원소 삼아 용접으로 덧붙여나가는 과정을 통해 나무 형상을 축조해나간다. 이렇게 타원형의 입자들이 모여 빗어낸 나무 형상은 놀랍게도 실제 나무의 표면질감을 그대로 닮아있다. 우뚝 솟은 것이 있는가하면, 자연스레 휘어진 것도 있고, 우람한 것이 있는가하면 가녀린 것도 있다. 나무 중에서도 특히 소나무를 연상시키는 이 형상들은 세월과 풍화가 만들어준, 자연스럽게 왜곡된 형태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왜 나무인가. 전작에서 과일과 채소류를 경유해온 작가가 자연스레 정박한 소재일 수도 있지만, 이처럼 나무를 소재로 선택한 이면에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가 내장돼 있다. 즉 작가의 관심은 시종일관 원형적 형상에 맞춰져왔으며, 그 문제의식이 자연스레 자연의 원형에 해당할 만한 존재를 탐색하던 중 그 연장선에서 나무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길래의 근작에서의 나무는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 이상의 원형적 형상(모든 형상이 유래한 근원적 형상)이나 자연의 원형(자연성 즉 감각적 닮은꼴 내부에 응축된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이로써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나무 형상은 세계의 중심, 세계의 배꼽(옴파로스), 오벨리스크, 토템폴, 솟대, 세계수, 우주목의 상징적 의미와 겹친다. 그 자체 기념비적 인상이 강한 이 직립형상으로써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제의적이고 주술적인 염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밤에 나무 형상의 아래쪽에 장착된 조명으로부터 발해지는 은근한 불빛은 이런 제의적이고 주술적인 의미를 강화하는 한편, 일종의 신령스런 기운마저 자아낸다.
그런가하면 이 일련의 나무 형상들은 하나같이 매스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속이 꽉 찬 양감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조각과는 구별된다. 노동집약적인 직조로서의 전통적인 조각의 방법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와 차별화되는 탈조각의 가능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형상들은 이처럼 매스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통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로부터 경계 혹은 탈경계에 대한 인식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작가의 작업이 전통적인 조각과는 다른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보다도 회화적인 경향성을 들 수 있다. 이길래의 작업은 조각이면서도 회화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회화적인 조각으로 부를 만하다. 그린 것 같은 형상은 물론이거니와 동 파이프 조각이 반복적으로 집적된 형태가 마치 드로잉에서의 선묘를 연상케 한다. 작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회화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보다 의식적인 차원에서 그 상황을 이해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테면 그림처럼 나무 형상을 벽면에 걸어 설치하는가 하면, 때론 형상의 가장자리를 따라 테를 두르기도 하는데, 그 형태가 영락없이 그림에서의 액자를 상기시킨다. 심지어는 그림에서의 낙관을 그대로 모방해서 형상 속에 장착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런 일련의 시도들이 단순히 회화를 흉내 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길래의 작업은 조각과 회화의 경계에 대한 인식을 넘어 공간설치 혹은 공간연출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먹으로 그린 전통 산수화에서의 구조와 생리 그대로를 공간에다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벽면에다 직접 그린 듯 설치된 나무 형상들로 인해 마치 산수화 속에 들어와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공간이 그대로 일종의 입체적인 산수화, 공간적인 산수화로 탈바꿈한 것이다. 설치작업에다 공간연출마저 더해진, 재현적인 상황과 공간 자체의 구조적 성질이 일체화된 이 일련의 작업들은 전통적인 조각, 회화, 심지어는 보다 적극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는 설치작업과도 전혀 다른 지점을 예시해준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적인 산수화에서는 비록 그림에 사람이 그려져 있지 않더라도 그 존재가 암시되고 있음을 느낀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여백을 빈 공간으로 보지 않는 것만큼이나 사람의 실체는 부재의 형식으로써 그림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궁극적으론 산수를 벗 삼고 향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를 노자의 논법으로 말하자면 소요유의 경지가 될 것이고, 질 들뢰즈의 화법으로는 사유의 유목이 될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스스로의 상상력의 도움으로 겨우 암시되는 욕망, 산수화 속을 거닐고 싶다는 이 욕망을 작가는 실제로 실현시켜준다. 이로써 이길래의 작업은 공간을 사용하는, 그리고 욕망을 실현하는 전혀 다른 방법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