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싸고 푸는 행위는 유목민의 삶의 방식이다. 정착민은 짐을 싸고 풀지 않는다. 짐을 싸고 푸는 유목민의 행위는 그 이면에 이곳에 대한 부정의식과 저곳을 지향하는 이상주의가 내포돼 있다. 그러나 짐을 푼 저곳 또한 이내 이곳이 돼버린다. 저곳과 이곳이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곳으로 이주하기를 그만둘 수도 없다. 저곳과 이곳이 다를 바 없고, 이상이 일상에 비해 더 나을 것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이주를 향한 욕망에 추동되는 것, 이상을 꿈꾸는 것, 그것이 바로 유목민의 자의식이다. 이는 그대로 실존적 존재조건으로서의 부조리의식과 통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기다리는 인물을 소재로 한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나,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괜찮다’는 보들레르의 전언은 이러한 부조리 의식을, 부정의식과 이상주의와의 공모를 드러낸다. 그런가하면 프로이드는 중세 기사도의 매너로 알려진 궁정풍의 사랑(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정하고, 그 불가능한 사랑의 아픔을 매너로까지 승화시킨)이 보편의식임을 보여주고, 라캉은 정작 그 불가능한 것이 성취되었을 때 또 다른 불가능한 것을 상정하는 부조리의식을 보여준다. 결여의식이나 결핍의식이야말로 존재를 살게 하는 힘이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하이, 지누. ‘안녕, 진우’작가는 이렇게 자신에게 인사한다. 그런데 그는 거대한 바비인형이다. 바비인형으로 분장한 작가가 작은 바비인형을 들고 있고, 그 바비인형의 손에는 그 보다 더 작은 바비인형이 들려있다. 사실 바비인형은 유아들의 친구이며, 서구의 인종담론과 특히 남성주체의 관음증이 투사된 이상적인 여성이다(금발은 아름답다). 바비인형은 인형이면서 동시에 여성인 것이다. 인형을 상대하는 작가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키덜트(애어른)다. 세상과 대면하는 대신에 자신의 꿈속에 안주하고 싶은 거다. 그러나 그 인형은 이내 싫증을 불러일으키고, 인형과 동격인 자신이 지리멸렬해질 수 있다. 바비인형은 이상적인 친구 혹은 여성을 상징하지만, 이때의 상징은 순수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고 그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를 낳는 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시뮬라크라 놀이에서처럼 나 또한 한갓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싸이코패스. 작가는 반은 남자, 반은 여자로 분장한다. 이상적인 여성을 상징하는 신부의 웨딩드레스와 이상적인 남성(혹은 권력의 주체)을 상징하는 군복을 절반씩 짜 맞춰 만든 옷을 걸치고, 얼굴 역시 이에 맞춰 분장한다. 나는 야누스처럼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자아이며, 도플갱어처럼 그 자아들 간에는 어떠한 내적 필연성이나 개연성도 없다. 마르셀 뒤샹은 남성주체로서의 자신을 마르셀 뒤샹으로, 그리고 여성주체로서의 자신을 로즈 세라비로 부르지 않았던가. 아니무스 속에 아니마가 내재돼 있고, 아니마 속에 아니무스가 깃들어 있다. 나는 여성이면서 동시에 남성이다. 아니, 여성과 남성은 인식행위가 만든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여성 혹은 남성으로 명명되기 이전의 자연인이다. 분열증, 자기소외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정상적인 보편의식이다. 아바타, 분신, 얼터에고, 무의식적 자아는 의식적 자아만큼이나 뚜렷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 이로써 작가는 스스로를 결정적인 주체로 보기보다는 인식 행위나 명명행위 이전의 비결정적인 가능태로 가정한다.

레인보우 세트. 작가는 각기 다른 의자를 수집해서, 이를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재구성한다. 각양각색으로 생겨먹은 7가지 오브제와 그 표면에 덧입혀진 7가지 색채들. 그것들은 의자를 닮아 있긴 하지만 이미 의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기묘한 오브제에 지나지 않는다. 경첩을 사용해 접었다 폈다 할 수도 있고, 모양을 바꿀 수도 있다. 의자에 대한 상식에 견주어 볼 때 불구나 기형처럼 보이는 이 오브제들은 그러나 불구 혹은 기형이란 합리적 사유체계에 의한 배타적 논리일 뿐임을 주지시킨다. 7가지 색채가 게이의 상징색인 무지개와 일치한다는 점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상성과 비정상성, 합리와 비합리를 구분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안진우의 전작의 제목에서 비롯된 (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하는 행위)는 그의 의식이 유목주의에 의해 견인되고 있음을 말해주며, 이것이 그대로 근작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되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과 함께 현실로부터의 일탈에 바탕을 둔 이상주의에 의해 추동되고 있으며, 이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보편의식과도 통하는 것이다. 사유의 유목을 실천하고, 세계를 비결정화의 방식으로 바라보려는 기획의 이면으로부터 ‘세계를 재편할 수만 있다면’이라고 중얼거린 발터 벤야민의 불가능한 독백이 들려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