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은 세계를 원통이나 원뿔 등의 최소한의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할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세잔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그림보다 더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형식의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불어 몬드리안은 그 논리의 연장성에서 수평선과 수직선의 교직을 조율하는 것만으로도 형상을 다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지평선을 배경화면 삼아 근경에 서있는 키 큰 나무와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몬드리안은 똑같은 등식을 도심의 정경에다 적용하고 있다. 마천루에서 내려다 본 도심의 밤 풍경을 자잘한 격자무늬의 콤포지션으로 형상화한 것이다(부기우기). 이러한 기하학적 환원은 아무래도 자연보다는 도심이 더 어울릴 듯싶다. 왜냐하면 자연은 보다 더 유기적이고 우연적이고 비정형적인 형태가 많은 반면에 도심은 상대적으로 기하학적이고 정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반듯한 건물들, 빌딩이나 아파트, 각종 철골 구조물이나 창문 등 도시적 삶을 사는 현대인들은 온통 기하학적인 형태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몬드리안의 반듯한 그림들은 어쩌면 인상주의 화가들이 도회적 삶에 반응한 것(사물의 감각적 표면현상에 천착한 것으로 나타난)과는 다른 방식으로 막 달라지기 시작한 환경에 반응하고, 이를 그림의 구실로 삼은(복잡한 사물의 이면에 내재된 최소한의 구조를 겨냥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사유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그저 그림이라고만 부르기는 어려운, 직접 만든 각종 크고 작은 형태의 입체의 구조물 위에다 색면이나 색띠를 그려 넣은 임소아의 작업은 세계의 기하학적 환원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도시적 삶을 살아가면서 맞닥트리는 정경이나 이에 따른 인상을 최소한의 기하학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소위 모더니즘 서사에 바탕을 둔 순수한 형식논리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특정의 색채를 통해 정서적 환기를 꾀하는가 하면, 특히 관객의 참여에 의해 작품이 변주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경첩을 이용해 여닫거나, 작품이 큰 경우 그 속을 드나들 수 있게 한 일련의 작품들이 마치 서랍을 열어 보거나 장롱 속을 기웃거리는 것 같은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일부 전통적인 자개를 도입한 작품에서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작품의 표면질감이 달라지는가 하면, 자개와 빛이 반응하여 환상적인 시각효과를 연출하기도 한다. 특히 작가의 작업에서 주목되는 것은 관객참여를 유도한다는 점인데, 작가가 제안한 처음의 형태를 관객들이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관객들이 일방적인 향수자로서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자신만의 미감을 가지고 창작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한 이 일련의 작업들은 모든 결정적인 것을 의심하고 비결정의 가능성을 실험하는(그것이 형식이든 아니면 사유든) 예술의 전통적인 미덕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논의와도 통한다. 즉 작품이 최종적으로 완결되는 지점을 저자(작가)가 아닌 독자 즉 관객의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간섭행위나 해석행위에 의한 변형이나 변주로 본 것이다.
이번에 작가는 일종의 설치미술을 보여준다. 작가가 직접 찍은 도심의 각종 건물들 사진과 함께 도심에서 받은 인상을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한 추상화면을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에 세워 설치한 것이다. 그렇게 서 있는 모습이 실제로 건물들이 중첩된 형태를 띠면서, 그 전체형상은 우리나라 지도 모양을 닮아있다. 일종의 (도시적) 삶의 메타포를 재현 혹은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그 전체형상의 가장자리를 지나 작품의 뒤쪽으로 가면, 회색의 면과 선들만이 드러나 보이는데, 이로써 회색 콘크리트로 대변되는 도시의 삭막한 삶의 이면을 엿보게 한 것이다. 온갖 현란한 불빛들로써 유혹하는 도심의 전면(파사드)과 함께 그 유혹에 숙명처럼 드리워진 그림자(예컨대 인간성 상실과 같은)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심의 건축물을 소재로 한, 색면과 색띠의 콤포지션 그리고 여기에 입체의 구조물이 하나로 어우러진 이 일련의 작업들은 일종의 후기 미니멀리즘의 한 경향으로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조형물 속을 거닐거나 드나들 수 있게 한 작가의 작업은 대표적인 미니멀리즘 논객인 마이클 프리드의 전언을 상기시킨다. 프리드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서 그 속을 거닐 수 있게 한 일련의 작업들을 (레디메이드나 오브제와 구별해서) 리터럴오브제(문자 그대로의 오브제 혹은 즉물적 오브제)라고 일컫는다. 이로부터 마치 삶을 그대로 흉내 낸 듯한 일종의 연극적 상황이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마치 건축물들의 숲속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도심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것 같은 추체험을 실현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