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에 로봇이 등장하는 작품이 발표된 이래, 박용식의 작품에는 만화 캐릭터를 닮은 귀여운 동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로 인간과 친근한 동물인 강아지, 오리, 말, 고양이, 쥐 등인데, 실제와 거의 유사한 크기의 캐릭터들은 일상이나 자연, 연출된 상황 속에 배치되어 조각 작품 뿐 아니라 사진이나 영상, 설치, 드로잉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된다. 나뭇가지들을 짜 맞추어 만든 요즘의 작품들은 명확한 실체나 대상성보다는 관계성에 주력하고 있지만, 인간과 가까운 동물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소재적 특성 때문에 친숙해 보이지만, 연출된 상황들이 쉽게 읽혀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 한 조각씩 들어가 있지만, 구체적인 사건사고를 묘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개와 말, 그리고 나중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오리나 쥐 같은 것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은밀한 승부수를 던지는 포커페이스처럼 아예 무표정하다.

첫 개인전 작품인 마징가 제트 시리즈에는 로봇 보철물을 착용한 작가가 직접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이후의 작품에서 캐릭터들은 자아의 투사라 할 만한 단서들이 배제된다. 자아의 표현은 상황으로 편재된다. 캐릭터들이 주로 가축이며, 인간 사회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점, 그리고 여러 가지 의상을 걸친 모습이 있는 그의 작품에서, 관객들이 인간에 대한 비유를 읽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어떤 줄거리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지만, 동물이 등장하는 일련의 드라마에서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 우화적으로 나타난다. 박용식의 작품은 캐릭터의 몸짓 언어나 상황의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데, 거기에는 동물과 인간이 공유할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유산이 존재한다. 이렇듯 인간과 동물의 공유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어두운 파괴 본능이 아니라, 평화와 공존에 대한 메시지와 관련된다. 동물은 인간처럼 다른 종들은 물론 스스로를 파괴시킬 만큼 무모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인간 사회의 갈등과 폭력은 과도한 밀집과 경쟁에 의한 것이다. 동물학자들은 정글같은 자연의 판은 그러한 부자연스러운 집중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무표정하고 다소간 기계적으로도 보이는 박용식의 캐릭터들은 인간보다는 동물의 이상적인 전형을 가진다. D. 르스텔은 [동물성]에서 동물의 완전함은 인간의 불완전함과는 또 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지적한다. 동물의 ‘완전함’은 인간의 ‘완전화 가능성’과 대립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다양한 행동은 그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인간만의 특징으로 지적되곤 하는 (개의)웃음, (쥐의)직립 등은, 동물들이 가지는 기계적 결정성과 인간의 불확실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의 작품의 캐릭터는 동물과 인간의 낯선 면모, 즉 타자성을 가지고 있다. 동일자와 타자의 문제는 곧 경계의 문제이다. 박용식은 지금까지 6번에 걸친 개인전에서 지속적으로 염두에 두었던 주제는 경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경계 짓기나 경계와해가 아니라, 경계의 모호함과 그러한 경계의 확장과 인정’이다.




2008년 프랑스에서 전시한 작품 [경계 흐리기]에서는 경계선이 와해된 스케치와 그 앞에 드리워진 나뭇가지로 엮은 집이 나온다. 드로잉은 잡지나 인터넷 속에 떠도는 사람과 사물을 두꺼운 종이에 그린 후 문질러서 명료한 형태를 소멸시켰다. 나뭇가지로 얽은 작품은 2007년 5회 개인전 ‘선상(線上)에 서다’에서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가지치기된 나무를 잘라 엮어 만든 동물형상은 우선 그 거대한 크기로 이전 캐릭터들과 차이가 있다. 고무 스폰지를 깍아서 만들어 나뭇가지 그물망 여기저기에 붙인 분홍 꽃들은 동물성에 식물성을 가미한다. 이 작품들은 정확한 점과 그 점을 이어서 만든 선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니다. 나무의 ‘온전한’ 형태를 위해 버려진 곁가지들은 그의 주요 캐릭터였던 쥐나 개의 형상을 향하고 있지만, 복잡한 선들과 구조, 여기에 교란성을 더하는 꺽꽂이 식물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경계의 구분은 불확실해진다. 그의 작품에서 경계를 이루는 선들은 모호한 장(場)이 된다.

경계라는 주제는 개체나 종보다는, 쥐떼같은 무리의 특성을 가지는 박용식의 이전 작업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동물은 무리이며, 무리는 계통이 아니라 전염에 의해 형성된다고 지적한다. 하나의 틀에서 파생된 닮음 꼴들은 유기체적 생식이나 계통적 생산의 결과라기보다는, 리좀적인 생성의 견지에서 이해된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동물들은 종이나 속과 같은 본질적 특징이 아니라, 환경과 맥락에 따라 가변적이다. 명확한 조직화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연결 접속과 운동관계에 따라 특정한 배치물이 되는 비형식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진다. [선상] 시리즈는 동물뿐 아니라, 미사일, 사람의 손 등으로 변주된다. 그것은 기능을 잃은 기관, 그리고 유기적 조직화가 아닌 기계적인 면모를 보인다. 곁가지들은 배치와 무리지음의 방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모한다.

요즘 박용식이 주로 사용하는 재료인 나무는 유기적 총체성의 전형이지만, 그가 버려진 곁가지들을 임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나무는 뿌리줄기처럼 배치된다. 작가는 점이 중심이 된 기하학적 형태를 구사하기 보다는 선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천개의 공원]은 하나의 점이 언제나 기원적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생성의 선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고 기원도 목적지도 없다. 생성의 선은 중간만을 갖는다. 박용식의 작품에서 수직 수평의 명확한 좌표계 속에서 설정되지 않는 떠도는 선들의 변이가 형상을 만든다. 작가는 나무를 뿌리줄기 식으로 배치하는데, 선들로 이루어진 뿌리줄기는 나무형태의 점을 갖는다. 다양한 연결접속이 행해지는 장은 무한한 변주가능성을 내포한다. 다양한 배치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것은 명확한 성격이나 형식을 가진 주체나 대상이 아니라, 사건이다.

박용식의 주인공들은 기계적이고, 낯설며, 명확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반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영화같은 대중문화에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캐릭터들이 우글거린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중문화 속 캐릭터들과는 달리, 자아나 인간을 반영하는 것을 멈추고 엄격한 몰개성화를 실행한다. 캐스팅이나 사진 작업에 기초를 둔 박용식의 작품은 복제와 관련된다. 여러 마리가 복제되고 같은 색, 또는 다양한 색이 입혀지는 과정에서 원본의 위상은 사라진다. 복제된 것들은 주체의 모방이나 엄격하게 정해진 형식 속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엄격한 사전 설계도 보다는 그때그때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생성된다. 대강의 윤곽이 있을 뿐, 결과는 나와 봐야 알 수 있다. 박용식의 작품에서 동물은 그저 동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모방이 아니라, 생성이다.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이전의 신학적 세계에서 자연은 거대한 미메시스로 여겨졌다. 현대의 작가 박용식의 작품에서 자연은 끝없이 호출되고 있지만, 필연적인 존재의 사슬을 형성하는 유비나 표상적 체계와는 거리를 둔다. 그의 작품에서 동물은 가족이나 국가의 기원을 알리는 감상적이거나 신화적인 모델이 아니라, 사회의 가장자리에 서식하는 개체군이나 무리들과 관련된다. 그것은 인간을 가로지르면서도 인간을 포함하는, 그리고 동물 뿐 아니라, 인간도 변용시키는 특수한 동물 되기이다. 여기에서 되기, 즉 생성은 유사성도 모방도 더욱이 동일화도 아니다. 되기는 계통이 아닌, 결연과 관계된다. 되기는 뿌리줄기이지 분류용 수형도나 계통수가 아니다. 박용식의 작품에서 동물 되기라는 주제는 리좀이라는 현대적 주제와 맞물리면서, 사회의 다수나 표준을 이루는 편협한 인간주의를 벗어나고자 한다.

출전 | 2008 고양 스튜디오 어드바이징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