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공공미술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갇혀있었던 미술은 물론, 도심 빌딩 앞을 장식하는 기념비에 한정되었던 기존의 공공미술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것은 시골의 초등학교, 변두리 장터, 오래된 대합실, 음침한 교도소, 재개발 직전의 산동네 등, 미술과는 거리가 먼 장소로 널리 확산됨과 더불어, 미술에 대한 개념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공공미술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성, 대중성, 공공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두루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성은 작품의 질을, 대중성은 소통을, 공공성은 공동체 회복의 근간을 이루면서 새로운 공공미술의 삼위 일체적 요소를 이룬다. 각기 예술가, 대중, 시민 등이 주체가 되고, 예술적, 경제적, 정치적인 의미가 있는 세 개념은 역사적이고 인과적인 전후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근대에 동시적으로 발생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긴밀한 역학관계를 이루어 왔다.

그림과 조각 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가 동원되는 공공미술은 미술이 개별 장르로 분화되기 이전의 총체적 상태를 회복하려는 듯이 보인다. 동굴 벽화부터 시작되는 이미지의 장구한 역사와는 달리, 순수미술로의 분리는 불과 2-3세기 전의 일이다. 미술이 미술관과 미학 같은 제도적 장치와 담론 속에 안착하게 된 것은 근대부터이다. 그 시대에 미술의 자율성이 확보되었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고매한 신념도 생겨났다. 일단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중요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이 미술 외적인 것을 떨쳐내고 그 순수성을 구가하는 와중에 내적인 질은 높아졌고, 독창성과 새로움, 그리고 진보라는 시대의 요구에 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가 분화되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오늘날에도 미술이 나름의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어떤 명분을 앞세우더라도 성공적일 수 없다. 공공 영역에서 벌어지는 미술은 단순히 순수 미술을 널리 유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맥락을 생각하는 복잡한 차원의 현대미술로, 내용적, 형식적으로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공공미술은 미술 바깥에서 작업하는 와중에 미술이 가지는 고유한 힘을 확인하는 계기도 마련해 준다. 타자를 통해서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타자를 배제하고 동일성에 함몰된 순수 미술은 자신으로만 회귀하는 무익하고 고독한 행위 속에서 사회적 소통의 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물질적 유용성으로부터 벗어나 미적 감각과 순간적인 자기 충만성을 향유하려는 순수 미술은 해방과 소외의 양 극단 사이를 오고간다. 그것은 그자체로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삶의 일부분을 장식하는 잉여로, 불안정한 지위를 감수 한다. 관념적인 미의 영원성을 물신화 시키는 아카데미즘이 교육기관의 형태 등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이러한 현실적 제도들이 삶을 고양시키는 어떤 열기와 자발성을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 새로운 공공미술은 개별 영역으로 분리되고 폐쇄됨으로서 생겨나는 비밀스러운 난해함과 무기력함, 제도로 자리 잡은 아카데미 미술이 강요하는 기능주의를 모두 극복해야 한다.

오늘날 거리에서 펼쳐지는 미술은 개별적 은둔이나 아카데미즘이라는 상아탑을 허물고자 한다. 나름의 의미는 있지만 상처만 남은 예술지상주의를 넘어서 공공성으로 나아가는 와중에 피할 수 없이 맞딱뜨리는 것이 바로 대중성이다. 대중문화는 오늘날 문화적 우세종으로서 지배적인 문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중성은 예술성에 치중한 작품이 담보해지 못하는 쉬운 의미와 이윤의 확보라는 소통적 차원의 장점을 가진다. 근대에 대중 민주주의 시대가 열린 이래, 문화 역시 대량 생산 및 소비 체계에 편입되면서 이윤을 생산하는 상품이 되었다. 상품으로서의 문화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소비 욕망을 야기 시킴으로서 스스로의 존립기반을 가지기 때문에, 겉으로의 다양성과 문화 민주주의 이면에는 획일성과 수동성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예술지상주의가 소수의 작가와 소수의 소비자라는 쌍을 가지고 있다면, 대중문화는 소수의 전문 생산자와 다수의 소비자라는 쌍을 가진다.

소수의 작가나 생산자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예술성이나 대중성에만 치중하는 작품은 그것이 최상의 결과물을 낳을 경우에도 물신적 신비화와 비민주주의를 피할 수 없다. 그것이 극소수의 문화적 생산물에 흥행성을 보증해 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교환되는 시장 중심의 현대사회는 풍요로움이라는 강한 세속성을 띄며, 사회에 무관심한 말초적 쾌락 지향의 대중을 낳는다. 대중적 가치에만 몰두하는 문화적 산물은 보다 많은 소비자를 확보하기 위해 낮은 공동의 지표에 호소해야 한다.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대중문화의 긍정적인 측면은 대중적인 매체의 활용이다. 극심한 경쟁 속에 부침하는 시장은 생산력의 진보를 낳는다. 생산력의 진보는 대량적으로 소통되는 문화의 전유물이었던 자본 의존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예술가들도 대중에게 보다 친숙해진 경제적인 대중 매체를 활용하여 예술의 소통을 활성화시키고 경제적 자생력을 낳는 이윤도 확보할 수 있다. 오늘날 하위문화subculture가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의 틈새에서 색다른 소재를 유통시키는 매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자에 의지하는 예술지상주의나 다수의 소비자인 대중주의가 가지는 질적, 양적인 보증만으로 충분치 않다. 양 개념에는 공공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공성은 예술성과 대중성에 비해 정치적인 지향이 담겨있는 개념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동시에 소외되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탈 이데올로기 시대라고 지칭되는 시대에 왜 정치가, 더구나 문화 예술에 왜 정치가 필요한가. 그것은 사소한 것까지 시스템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공공성은 어느 시대보다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공공미술이 예술성과 대중성 보다 더 중요시 하는 것이 바로 공공성이다. 그것은 소수의 값비싼 사유물로서의 순수 예술이나 대중을 소외시키는 대량 상품으로서의 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지양하고자 한다. 그것은 순수예술이나 대중문화가 전제하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참여의 가치를 일깨우는데, 근대 초기 시민이 주체가 된 보편적 이성과 합리성에 의한 민주적 공론의 장이었던 공공영역에서 그 역사적 전례가 발견된다.




근대의 공공영역이 지속한 기간도 무척 짧았지만, 예술은 근대의 공공영역에 대응하는 사적 영역에 포함됨으로서 사회적, 정치적 힘을 빼앗기고 개인 취향이나 장식적, 소비적 차원으로 축소되었다. 시장의 확대는 사이비 공공영역이라 할 수 있는 문화산업을 번성시켰다. 시민과 소비자의 관계가 그렇듯이, 민주주의와 시장은 때로 모순을 이루기도 한다. 근대에 짧게 지속된 공공영역에서는 공개적이며 다양한 형태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관료제에 의해 밀실에서 결정되는 예술 관련 법안, 소수에게 유통되는 사유물, 해독되지 않은 비밀스런 의미 같은 보이지 않는 물신적 체계 속에서 순환되는 폐쇄적 통로를 깨는 것이 공공미술의 과제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미술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공재라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깔고 있다. 지금 거리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공공미술은 소수의 이익에 복무하는 시장가치의 창출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통해 공공적 가치를 고양하고자 한다. 그러나 공동체는 현재와 같이 아무런 구심점 없이 각자의 이익과 쾌락에 몰두하는 익명적 다수의 사회에서 현실적이기 보다는 이상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명하게 존재하기보다도 애써서 찾아내야 하는 가치가 되었다. 새롭게 시도되는 공공미술은 공동체의 잠재적인 형태가 현실로 부상하도록 돕는 매개 역할을 자임한다. 그것은 숨 가쁜 근대화의 와중에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주면서, 예술이 본래 있었던 삶의 한가운데에 뿌리 내리려 한다. 그것은 현대미술이 삶과 거리를 두며 방기했던 사회적 책임과 지속 가능성을 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공공미술은 경제, 사회, 정치 분야에서 주장되는 공공성의 개념을 예술 분야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예로 주목된다. 그것은 공적 지원체계를 통하여 학교나 학원 같은 경제적 일자리가 아닌, 사회적 일자리의 창출 기회로 삼는 것이다. 현재 미술은 극소수의 작품이 미술시장을 통해 유통되고 있고, 대부분은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책상 대물림을 위한 교육 분야에서만 활성화되어 있다. 미술은 다수 시민이 향유라는 문화가 되지 못하며, 미술관에는 보이지 않는 문턱이 존재한다. 근자에 활성화된 새로운 공공미술은 고립된 예술가들이 비영리 영역에서 시민사회와 만나는 아름다운 매개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전 | 샤롯데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