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7층짜리 큰 건물이고 그 안의 전시장 또한 지하 몇 층까지 내려가는 규모를 가지고 있는 스페이스 C라 할지라도, 작품 천여 점 가량이 전시되었다하면, 실제로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전시인지 궁금할 법도 하다. 말 그대로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는 공모전인가?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아카이브 전시인가? 아니면 유명 작가의 컨셉을 장식하기 위해 단순히 동원된 들러리들의 모임인가? ‘춘계예술대전’이라는 다소 구닥다리 스타일의 전시제목은 한 해 에도 수백 건이 넘는 공모전이 열리고 있는 이 땅의 문화현실을 풍자함과 동시에, 엄청난 수의 작가가 참가한 전시의 성격을 적절하게 규정짓는다.

아트 디렉터를 맡은 최정화와 젊은 작가들이 함께한 ‘춘계예술 대전 드림팀’이 전체 전시를 기획하였고, 2월 말 ‘제 1회 인터내셔날 영 아티스트 춘계미술대전’ 작품 공모를 통해 1032점을 접수받았다고 한다. 공모전처럼 심의를 통해 당선작을 따로 선정했지만, 대부분의 공모전 심사가 그러하듯 관객으로서는 심사 기준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 어렵다. 당선작 6점이 전시된 살롱 전의 경우, 낙선작에 비해 좀 더 성글게 배치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낙선작 1026점이 당선작과 함께 전시된 형식 자체가 기존 공모전과 틀리지만, 낙선작과 당선작의 공존을 통해 미학적 기준의 애매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공모전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비평적 의도도 드러난다.





두 번째 가능성인 아카이브 전시는 더더욱 아니다. 395명이 참여한 1000점 넘는 작품을 어떤 기록적 가치로 엮어줄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전시 작품은 회화, 영상, 설치, 사진, 공에, 디자인, 퍼포먼스 등에 걸쳐 있으며, 한국은 물론 영국, 미국, 프랑스에서도 작품이 접수되었고, 6세부터 67세에 이르는 연령 군이 참여했으며, 기성 작가 외에도 요리 모형제작사, 청자 장인 등 다양한 직업군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불특정한 방식 자체가 한국미술 현장을 단면처럼 잘라낸 증후적인 면이 있지만, 타임 캡슐같은 표본적 대표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공모전 참가 작가 377명 외에 지명 작가 18명이 참여하여, 전시 전체를 조율하는 모종의 역할을 맡았음을 짐작케 한다.

공간 공포증을 느끼게 할 만큼 가득 붙어있는 평면작품들이 막대한 수의 작품 확보에 도움을 주었고, 입체, 설치, 영상작품도 빈 곳이 있는 어디에나 배치된다. 전시 주최 측은 예술의 우연과 필연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는 서로 이항대립적인 용어를 병치하면서, 모든 것을 포괄하겠다는 수사학이 드러난다. 필자는 ‘예술의 우연과 필연’이라는 말을 ‘예술과 사물’이라는 또 다른 대립 항으로 고쳐 부르고 싶지만, 그 어느 것이든, 판단이 정지될 만큼 쇄도하는 압도적인 물량 공세를 적절히 분석할 수 있는 용어를 따로 찾기 힘들 것이다. 관객에 따라서는 아무리 작품 수가 많더라도 그 각각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시는 각자의 ‘예술세계’를 파악하기에는 미적 거리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전시는 회화나 사진 등 평면 작품조차도 설치의 개념으로 풀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부분들의 합이 만들어내는 총체적 분위기는 개별 작품의 의도라는 것을 무색하게 하고 각자의 예술성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빼곡히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는 멋진 것도, 후진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것들 대다수가 예술작품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라는 점이 이 전시의 진면목이다. 각자의 예술적 질이야 어떻든 간에 그것들은 대부분이 하나의 작품으로 제작되었고, 각각의 감정의 밀도와 육체적인 수고가 결정화 된 것이다. 가령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들로 건물 내 외부 전체를 도배 한들, 비슷한 분위기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다양한 형식의 미술품이 가지는 여러 두께의 물질성과 아카이브가 가지는 균질적 코드 사이에 밀도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가능성으로, 1000여점의 작품들이 유명작가의 컨셉을 구현하기 위한 익명적 수단으로 동원되었을 확률은 어떤가. 아트 디렉터인 최정화는 ‘문화의 시대’라고 불리는 90년대에 부상한 ‘신세대 미술’의 주역답게, 이 대규모 전시에도 유감없이 자신의 감성과 방법론을 관철 시켰다. 가령 영구설치물인 전시장 카페의 인테리어는 선택이라는 최소한의 개입을 통하여 대상을 작품(또는 흥미로운 사물)으로 변모시키는 작가의 취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각 작품들의 면면 보다 전체 분위기가 중요한 이 전시 오픈 이후에 들려왔던 몇몇 참여 작가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에서 얻어지는 인상은 압도적이다. 이 전시는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이고도 주요한 미술 제도인 공모전이나 현대미술 전시를 사건화 된 형태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새삼 한국에 작가들 많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 바지만, 그렇다고 작품들이 함부로 다루어 진 것도 아니다. 작품 수에 비해 좁아 보이는 전시 공간에서도 관객의 선택에 따라 작품들을 하나하나 음미할 수 있는 기회가 봉쇄된 것은 아니다. 너무나 민주주의적이고 균등한 전시 방식 자체가 ‘작가의 신화’에 사로잡힌 일부 참가자들에게는 불만일 수도 있겠지만, 관객에게 일정한 미학적 의도를 주입하려는 기성의 방식과는 거리를 두었다는 점이 이 전시의 매력이다. 수백 명의 작가가 십시일반 식의 출품으로 막강한 양의 작품이 모였고, 이것이 질적 전화를 이루었다고나 할까. 다수의 참여 작가들이 아트 디렉터인 최정화와 ‘드림 팀’이 견지했던 전시의 조율자, 또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에 동의했으리라고 믿는다.

전시가 이루어진 장소는 건물 내부와 외부, 전시 공간과 비전시 공간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건물 외벽에 초록 그물 사이로 오색 천들을 묶어 놓은 형태가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으며, 건물의 중정에는 각종 천으로 성황당처럼 꾸며 놓아 정신 사나운 분위기를 예시한다. 전시장 입구 아래위로 이어지는 계단참에는 신문지 더미를 쌓아 놓고 그것을 묶은 노끈 줄을 풀어 선택된 사물에 예술적 솜씨를 첨가했다. 버려진 분첩으로 만든 화환은 전시 스폰서가 화장품 회사라는 것을 익살적으로 알려주며, 금색 가장 무도회 의상 입은 마네킹이 도열된 입구는, 관객들에게 전시를 파티처럼 가볍게 즐기라고 제안한다.

버튼을 누르면 움직이는 나무천사 인형이나 작은 플라스틱 장난감을 이어 만든 샹들리에, 그리고 동전을 넣으면 나오는 작은 장난감들은, 변화된 인간의 위상이나 세계, 그리고 예술 또는 사물에 대한 생각을 압축한다. 주체적 의지의 존재가 아닌 자동인형 같은 인간, 멀리서 보면 그럴싸하지만 복제품으로 줄줄이 연결된 소우주로서의 세계,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도록 패키지화된 사물이나 예술의 방식 말이다. 전시장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영상작품에서 나는 사운드와 둔탁하게 돌아가는 한 키네틱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마찰음이 뒤섞여 들리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술과 사물이 어우러진 전시장에 알맞은 효과음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은 전시장의 원통 기둥까지 뒤덮은 것은 물론이고, 계단참에서 화장실 앞까지 붙어있어 전시장의 흰 벽을 남김없이 가리고 있다. 가히 ‘예술지상주의’(?)라 할만도 하다. 전시장은 원래 건물의 일부에 불과했는데, 이번 전시회에서 전시장 이외의 장소까지 침범함으로서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지우고자 했다. 가령 깨진 기왓장으로 만든 연꽃모양이 자리한 계단참은 관객의 보행을 방해한다. 마치 거기까지가 작품이 전시된 공식적 공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건물 창고의 어수선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장면이 나오고, 그 아래층은 열린 문 뒤가 스크린인 작품이 상영된다. 그 아래층은 완전한 암흑이다.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툭 튀어나오는 작품과 사물, 또는 무대화된 장치들은 기대감과 의혹, 그리고 재미와 불안이 뒤섞인 감정을 자아낸다. 아트 디렉터의 취향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은 예술품 곳곳에 자리한 키치적인 사물들이다. 특히 전시장의 제일 아래층은 이번 전시를 추동하는 무의식이 꿈틀대는 장소이다. 지하 전시장 구석구석 설치되어 있는 남성 휴게실과 피부 관리 간판이 빙빙 돌아가는 이발소 마크, 열려 있는 빈 냉장고, 풍선 로봇,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만든 날개 등은 부질없이 소진된 욕망의 찌꺼기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폐기된 오리 모양의 보트, 어린이 놀이용 자동차는 어린 시절에 품었을 법한 환상적 세계의 실체가 드러나는 듯하다.

‘특가 코너’에서 판매하는 천 원짜리 플라스틱 장난감, 플라스틱 실패 더미에는 무한대로 찍혀 나오는 상품의 위상을 보여준다. 대상물의 찍혀진 겉틀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는 플라스틱 제품들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인공적인 것이다. 미술품 사이로 뜬금없이 등장하는 민예품들, 빨간 플라스틱 의자 위에 놓인 고려청자 같은 설치 형식은 예술 공예, 상품 간에 애초부터 아슬아슬하게 그어져 있는 경계선들을 무화시킨다.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해체된 이러한 세계에서 인류 세계관의 정수인 종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동서고금이 아우러진 인형이나 가면, 석고 모형 등 복제품으로 구성된 만신전에는 물신주의적 분위기가 강하게 풍겨 나온다. 이 불순한 아우라의 구성성분들은 상품과 예술, 종교 등이며 그것들이 구별 없이 뒤섞이면서 서로의 기원과 결과물이 되어준다.

그러나 전시장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예술작품으로, 여기에서 오늘날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을 소격시키기 위해 동원된 것은 바로 사물이다. 주로 기성품이며, 플라스틱 소재로 나타나는 키치적 사물들은 미술품 사이에 추임새처럼 삽입되면서 전시의 잡다함에 가세하고, 이를 고조시킨다. 현대의 철학자(마르틴 하이데거)나 비평가(마이클 프리드), 미술사가(로잘린드 크라우스)들이 예술과 사물의 변별점을 정의하고자 했지만, 둘의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사물은 예술이 되기도 하고 예술은 사물이 되기도 한다. 흔한 예로, 뒤샹의 변기는 현대 미술책에서는 결코 빠지지 않는 창조적 예술 작품이 되었으며, 기하학적 완결미로 천상의 소리를 창조했다는 바하의 음악도 엘리베이터에서 배경음으로 들릴 때 사물화 된다.

‘예술의 우연과 필연’이라는 주최 측의 표현에는 투명성의 문제가 전제되어 있다. 우연이란 불투명함에, 필연이란 투명함에 가까운 것이다. 투명함/ 불투명함에 대한 선호는 각자의 몫일 것이다. 예술사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비해 모더니즘 시기의 작품들은 투명했다고 평가된다. 모더니즘은 안과 밖, 부분과 전체, 재료와 형식 등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골격이 드러난 빌딩, 구성주의 풍의 조각 등에는 의미의 투명성이라는 요소가 있다. 반면 미로 같은 건물, 초현실주의 풍의 오브제 등에는 수수께끼 같은 불투명성이 두드러진다. 모더니즘 미학은 투명한 예술을 사물의 불투명과 대조시켰고,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미학은 사물의 이질성을 상찬하는 경향을 보인다.

계몽이 극단에 이르면 부조리에 빠지듯이, 극도의 투명성은 불투명성으로 전화하며, 그 역도 성립된다. 모든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식의 발상에서 확실한 의도나 예견되는 의미는 없다. 어떤 몰입적인 효과나 분위기, 연극성 같은 것이 남는다. 예술인가 사물인가의 문제는 본질적인 정의의 문제이기 보다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현대 예술가가 창조하는 것은 물질의 형태로 된 작품이나 사물이 아니라 바로 맥락, 즉 시공간의 재편이다. 플라스틱 장난감은 투명한 구조와 기능성을 가질지 모르지만, 놓인 방식에 따라 불투명한 사물로 전이될 수 있다.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 장난감은 판매될 수 있는 싸구려 예술작품과 교차되면서, 기이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반면 사물화된 예술작품은, 자신만이 소유했다고 가정되는 고유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띄엄띄엄 걸어놓아야 하고, 정확한 캡션과 함께 인쇄물 한 페이지씩을 차지하는 단일한 작품의 이미지를 해체한다. 예술 작품의 동일성은 해체되고, 반면 사물의 타자성은 복원됨으로서, 예술과 사물은 관례적 한계를 벗어나 그 어느 때 보다도 가까워진다. 사물에 괄호치고 언어적 순수성에 사로잡힌 모더니즘의 도정에서도 그 막다른 길에 사물의 타자성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전시는 시인 프랑시스 퐁주처럼, 예술을 희생시키고서라도 예술의 대상으로서의 사물, 즉 ‘다른 것으로서의 대상 그 자체로 되돌아 올 것’을 천명하는 듯하다.

전시장 안팎의 전시공간은 독자성이나 질적인 면을 유지하려는 미학적 순수주의를 벗어나는 불순한 기운들로 충전 되어 있다. 그곳은 예술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규범을 강요하지 않는 장소가 되었으며, ‘다양성’, ‘다원주의’ 같은 또 다른 그럴싸한 포장과도 거리가 있다. 거기에는 불안한 아우성 혹은 신비로운 침묵이 잠재되어 있다. 한술 더 뜨기 전략으로 우회적인 현실 비판을 관철시키고, 이를 통하여 이제는 동의할 수 없는 게임원칙이 통용되는 판을 뒤집고 원점부터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는 충동에서 또 다른 예술적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음이 역설적이다. 또한 대기업이 운영하는 제도적 공간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성공적으로 피어난 전복적 상상력 또한 역설적이다.

출전 | 미술평단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