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 정 전 | 3.14-4.20 | 일민미술관
샌 정과 런 샤오린의 작품전은 아시아 태생의 40대 현대 화가가 유화로 그린 풍경과 인물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구상적 형태가 화면에 남아있지만, 어떤 원형이나 명확한 구조가 없는 불확정적 이미지가 특징이다. 샌 정의 그림에는 여인의 초상이 많이 나타나고, 런 샤오린의 그림에는 다양한 성애적 장면이 두드러지지만, 둘 다 시간과 장소, 인물의 특정성이 없으려 명확한 내러티브도 부재하다. 그들의 회화는 자연, 역사, 사회 등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는 어떤 기운이나 개인의 감성 표현에 집중한다. 샌 정은 인물이 입고 있는 의상의 패턴을 통해, 런 샤오린은 번지는 색채 같은 사소한 디테일을 통해 시적 심상을 전달한다. 의미가 모호한 이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개인성은 주체나 자아 같은 철학적, 심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소수자로서의 내밀성에 속한다. 그림 속 인간들은 특정한 정체성을 가지는 개성적 인물이 아니라, 그들을 뒤덮거나 관통하는 다양한 배치와 흐름의 매개체가 될 뿐인 몰개성적 인물이다.

샌 정의 인물상은 구체적인 대상이나 일관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쓱쓱 칠해진 듯하면서도, 형상들이 전달하는 여운이 강하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땡땡이나 줄무늬, 다각형 패턴 등과 뗄 수 없이 얽혀 있으며, 형상은 때로 배경과 질적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화려함과 밝음, 다채로움만이 화면 속 인물이 여성이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 여성적 인물들은 화면 밖의 작가나 관객을 향해 포즈를 취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있는 듯하고, 포착된 순간들 역시 그림 같은 장면들이 아니다. 화려한 옷 무늬가 밖으로 튕겨 나오는 듯한 작품이나 폭발하는 색채의 패턴에 함입된 인물을 표현한 작품을 양 극으로 하여, 패턴과 인물 간에 설정된 여러 가지 관계는, 관객에게 어떤 단서도 주지 않으려는 [무제]라는 제목 아래 엇비슷해 보이는 그림들에 차이를 부여한다. 인물 뒤에 펼쳐진 칙칙하거나 희끄무레한 배경은 급조된 무대 막처럼 단조롭고, 원근법과도 무관하다. 인물의 몸체나 배경을 채우는 무늬는 단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체크, 마름모, 얼룩같은 추상적 형태는 거울이나 창이라는 은유와 결합하면서 회화의 복잡한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샌 정의 인물들은 인간적 표정이 아니라, 선과 색, 패턴을 통해 그들, 또는 작가의 심상을 전달한다. 그 점에서 그의 인물상은 비인간적이다. 몇 개의 선이나 색 얼룩으로 뒤덮여 있으며, 패턴으로 잠식된 몸체와 따로 노는 얼굴은 ‘형식이 없는 흰 벽과 차원이 없는 검은 구멍이라는 체계’(들뢰즈와 가타리)만을 공통적으로 가졌을 뿐, 우연적 다양성으로 얼룩진 모호한 표면들을 이룬다. 오밀조밀한 얼굴의 조직화를 느슨하게 풀어놓은 인물상들은 가면을 쓴 인간처럼 낯설고 원초적이다. 구체적인 대상이나 의미, 성격에서 벗어난 느슨한 선과 얼룩의 흐름들은 때로 얼굴을 벗어나 풍경이 되며, 형상은 배경의 물질적 구조와 직접 접속한다. 검은 구멍과 흰 벽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흰 화폭과 검은 균열의 회화적 구성과 중첩된다. 샌 정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여성은 작가에게 ‘자연이라는 개념과 대립되는 직감적이며 감정적으로 변화하는 사람의 존재를 상징 한다’고 한다. 자연과 차이를 두려는 샌 정의 작품에서 여성은 주체로서의 여성이나 남성의 대립 항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이 말하는 ‘여성되기’라는 개념과 가깝다.
‘여성되기’는 주체로서의 여성이나 여성의 모습은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입자들의 방출이라는 분자적 차원이나 운동과 정지를 창조하는 문제이다. 샌 정의 그림에서 무정형으로 얼룩진 얼굴이나 기하적 패턴이나 색채로 뒤덮인 몸체는 유기적 조직을 파열시킨다. 속도감 있는 필치는 남과 여라는 이원론 사이를 지나가면서 개인의 심리적 기억이나 집착도 지나쳐 간다. 기존의 유기체적 조성이나 심리적 기억 대신에 다양한 결합, 즉 생성이 추구된다. 이 모든 생성들은 지각될 수 없는 것(탈 기관적인 것), 식별 불가능한 것(탈 의미적인 것), 그리고 비인칭적인 것(탈 주체적인 것)으로 향한다. 마치 풀과 같은 익명적 창조 속으로 진입하는 여성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면서도 미지의 거대한 영역을 품고 있는 흥미로운 존재가 된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에 의하면 ‘여성되기’는 다른 모든 ‘되기’--동물 되기, 분자 되기, 비인간 되기 등--의 열쇄이다. 그것은 인간을 가로지르면서도 인간을 포함하고 변용시키는 특수한 생성이다. 샌 정의 그림 속 여성은 자연적, 심리적 존재로서의 여성과 동일화된 모방이나 유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계통과는 다른 질서, 요컨대 다양한 차원들과의 리좀적인 결연과 관계된다.

런 샤오이의 그림은 번지면서 섞여 들어가는 색채들을 배경으로, 중력을 초월한 듯한 인물들이 떠있는 몽환적인 풍경들이다. 굳이 성애적인 장면이 많이 나와서가 아니라, 샌 정의 그림보다는 부드럽고 따뜻하며 살 냄새가 난다. 작품 제목에 자아, 심성, 산수, 풍수라는 단어도 발견되고,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려진 유화이면서도 동양화 같이 위아래로 긴 형식을 구사하는 등, 작가의 구체적인 정체성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림 속에 시간성과 공간성이 확정되어 있지 않기는 샌 정과 마찬가지이다. 런 샤오이의 그림은 실내인지 실외인지,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현실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으며, 한 화면에서도 스케일의 차이가 큰 폭으로 진동한다. ‘백일몽’(비평가 펑보이의 표현) 같이 펼쳐진 화면에는 자유롭게 흐르는 욕망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특히 경계가 모호하게 변조되는 색채는 몸의 형태학을 넘어선 유체(流體)적 관능을 분출하고 있다. 그림 속 성적 유희는 현실의 금기를 넘어 남성과 남성의 결합같은 다양한 조합을 포함한다. 특히 종이 위에 유화로 그린 [paper] 시리즈에는 몽환적 색채로 물든 배경을 생략하였으며, 연기처럼 방향이 자주 바뀌는 구불구불한 짧은 선들과 얼룩은 육체의 내적인 리비도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런 샤오이의 그림 속 인물의 몸체는 조직화된 유기체가 아니라, 얼룩과 밀도의 흐름이다. 흐름은 확정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접속의 연속을 행하면서 나아가면서 타자와 합체한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기관(器官)은 소실되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구멍들을 통해 욕망을 순환시킨다. 이러한 강렬한 합체들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기관 없는 몸체’를 이룬다. 그들에 의하면 기관 없는 몸체는 유기체를 이루는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기관 없는 몸체는 죽은 몸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몸체이며 유기체와 조직화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더욱 다양하고 생동한다. 유기체 이전의 충만한 몸체들로, 종종 술병이라는 모티브와 더불어 나타나는 작품 속 인물들을 도취적 몸체와 연관시킨다. 배아의 이미지도 그렇지만 도취된 몸체는 연속적인 강렬함의 지역들(고원)을 이루며, 기관들은 항상적인 기능과 위치를 벗어난다. 이러한 배아(胚芽)적 몸체에서 ‘유기체 전체는 짜임과 색채를 변화 시킨다’(버로스). 다양한 방식으로 접촉하는 작품 속 인물들은 주체화와 형식화를 벗어난다. 특히 경계가 모호한 색채와 형태들은 체액의 흐름을 표현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더 이상 자아도 타자도 없는 기관 없는 몸체들을 만들며, 서로의 물질과 욕망을 교환한다.
런 샤오이의 작품에 나타나는 사랑은 다소 퇴행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이를 역행involution이라고 부른다. 퇴행과 달리 역행은 창조적이다. 역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선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 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운동은 오직 또는 주로 계통적 생산을 통해 서가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개체군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여기에서의 체액의 소통은 생식과는 무관한 흐름을 이룬다. 거기에는 남성과 여성 사이를 지나가는 수많은 존재들이 등장 한다. 그것의 그의 작품 속 산수나 풍수처럼, ‘바람을 타고 다른 세계에서 오며, 뿌리들 주변에서 리좀을 형성하고, 생산이 아닌 생성의 견지에서’(들뢰즈와 가타리) 이해된다. 그의 작품에서 우주는 계통 관계에 따라 기능하지 않는 것이다. 지상적인 물질성으로서의 육체는 뒤섞이고 합류하는 가운데, 낯선 타자를 향해 자신을 투사한다. 육체는 명확한 형태를 잃고 액체적 흐름으로 변모한다. 얼룩진 그림은 이 원초적인 흐름을 표현한다. 그의 그림 속 감성의 원초성과 무정부주의는 알폰소 링기스가 [낯선 육체]에서 지적하듯이, 웃음과 눈물, 축복과 저주처럼, 힘의 대가없는 지출을 향한다. 그것들이 발휘하는 힘은 결코 붙들어두거나 회수할 수 없는 것이다.
출전 | 아트 인 컬쳐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