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창수가 사용하는 재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푹신푹신한 스폰지가 아니라, 소파나 침대 등의 부속물이나 방음, 방열 재료로 쓰이는 공업용 스폰지이다. 스폰지로 조각한 후, 표면을 다듬고 실리콘으로 작업한 후 주물로 뜨는데, 주물로 완성된 최종 작품에는 스폰지 고유의 뽀글뽀글한 기포자국이 금속으로 떠내져서 표면에 오묘한 텍스추어가 남겨진다. 스폰지의 부드러움은 금속 주물을 통해 단단하게 고정된다. ‘fabric’의 사전적인 정의는 직물 이외에도, 구조, 조직, 짜임새, 구조물 등을 내포한다. 그는 이번 15점의 작품을 통해 천의 주름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구조, 그리고 스폰지와 주물이라는 복제 매개물에 의한 특이한 표면 질감의 결합을 실험한다. 와이셔츠나 커튼의 주름과 손이 결합된 작품이나 천을 씌워 조각한 판 같은 부조, 그리고 빨랫감을 접어놓은 작품들은 중력에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선을 만드는 천의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전달한다.
공중에 매단 작품은 호두나 뇌처럼 복잡하게 접힌 형태 사이로 무엇인가가 용출되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천이라는 소재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생성되는 과정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드러낸다. 화분 포장에서 영감을 얻은 접힌 형태에 5개의 꽃술이 음표처럼 돋아난 작품에서는 봄날 아지랑이처럼 충만한 생명의 기운이 올라오는 듯하다. 목련 나무를 조각한 작품도 가을 잎과 봄 가지를 결합시켜, 고정된 순간보다는 과정과 도약에 대한 상상을 일깨운다. 천의 모티브는 스테인레스 판과 결합하여 보다 구체적인 서사로 나아간다. 스테인레스 판은 연마 정도에 따라 여러 단계가 있지만, 대체로 대상을 비추는 거울 같은 효과를 준다. 구겨진 천 뒤에 스테인레스 판과 동판을 붙여 벽에 거는 작품, 여성을 상징하는 삼각형과 뒷면에 붙은 스텐인레스 판 등은 착의 및 탈의와 관련된 세트로서 거울을 연상시킨다.
개어진 양복 뒤에는 스테인레스 판이 아니라 프레임이 서 있는데, 거울 이쪽저쪽의 왕래가 가능한 뻥 뚫린 형태를 통해, 작가는 반영이나 재현에 대한 상식적 시선을 따돌린다. 보자기에 싸인 상자가 드리우는 그림자 부분이 거울용 스테인레스 판으로 제작된 작품은. 상자 뒤로 떨어지는 그림자 형태의 이질적인 형상을 통하여, 거울반사나 그림자 형상에 내재된 타자성을 드러낸다. 거울이나 그림자는 기대와는 달리, 우리가 보고 싶은 모습만을 비춰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울이나 그림자는 분신이라는 테마와 연결되어 자아의 심리에 관한 상상을 촉발시킨다. 작가가 겨울마다 쓰고 다닌다는 토시를 표현한 작품과 남성 성기같이 길쭉한 형태가 묶이고 씌워 있는 느낌을 주는 또 다른 작품은, 이 땅에서 남성 작가로서 살아가는 이가 가질법한 심리적 압박감을 드러낸다. 이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은 높이 2미터, 가로 4-5미터 가량의 커튼 조각이다. 무대 천 같은 느낌으로 전시장 벽 하나를 모두 가리는데,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놓이거나 천정에 매단 작품 등, 모든 설치 작품의 연극적 배경 막이 되어주는 동시에, 접히고 펼쳐지는 세계에 대한 은유가 된다.

라창수의 작품에서 천이라는 모티브는 스폰지, 그리고 금속의 언어로 번역된다. 그것은 오톨도톨한 촉각성이라는, 천은 물론이거니와 스폰지와도 금속과도 다른 물성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질감이라는 표면적 관심사에 한정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서로 완전히 구별되는 두 가지 생각을 순차적으로 표현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홈이 패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을 구별한 바 있다. 라창수의 작품 모티브인 천은 [천개의 고원]의 분류법에 의하면, 홈이 패인 공간이다. 직물의 길이는 무한하더라도, 폭은 날실의 틀에 의해 한정된다. 반면 펠트는 천과 전혀 다른 방식이다. 그것은 압축에 의해 얻어지는 섬유의 얽힘만이 있을 뿐이다. 직물과 달리 펠트는 무한하며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어 한계를 갖지 않는다. 스폰지를 두 가지 직조술과 비유하자면, 펠트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짜여진 것이 아니라, 거품 형태의 화학 물질이 합성되고 압축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을 스폰지로 조각하는 것은, 홈이 패인 공간에서 매끈한 공간으로의 전이에 해당된다. 이후의 주물 작업은 조각의 연장에 불과하다.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홈이 패인 것이란 고정된 것과 가변적인 것을 교차시켜서 서로 구별되는 형식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연속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홈이 패인 공간에서는 형식들이 하나의 질료를 조직하는데 반해, 매끈한 공간에서는 재료들이 힘들을 지시하거나 힘들의 징후가 된다. 홈이 패인 공간에서 매끈한 공간으로의 전이는 외연적 공간에서 강렬한 내포적 공간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물론 양자는 단순히 대립되지 않고, 복합, 교대, 중첩되어 존재한다. 이 두 공간의 본성은 전혀 다르지만, 양자는 사실상 서로 혼합된 채로 존재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홈이 패인 공간을 통해 비유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노동이다. 노동은 시간-공간의 홈파기라는 일반화된 조작이며, 자유로운 행동의 예속이기 때문이다.
반면 매끈한 공간을 그리는 것은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고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는 선, 부단히 방향을 바꾸며 시작도 끝도 없는 변이하는 선, 다시 말해 연속적 변주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는 추상적인 선이다. 이 선은 비유기적이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다. 여러 곡률을 가지며 자유롭게 흐르는 선은 유기체를 가둬놓은 경계를 트고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다. 홈이 패인 공간이 재현과 관련된다면, 매끈한 공간은 윤곽이나 형태에 제한받지 않는 추상적인 선으로 그려진다. 다(多) 방향적이며 안과 바깥도, 형태나 배경도 갖지 않은 이 선은 얼룩과 점들 사이를 통과해 매끈한 공간을 채우며, 촉지적이고 시각적 질료를 뒤섞는다. 천의 주름과 스폰지 표면의 질감이 뒤섞인 라창수의 작품에는 크고 작은 주름이 가득하다. 작품의 형태를 결정짓는 구조적인 주름과 굴곡진 표면 전체를 뒤덮는all over 미시적인 주름은, 또한 내생적인 주름과 외생적인 주름으로 나뉘어 진다.

유기체는 내생(內生)적인 주름들에 의해 정의되는 반면, 비유기체적 물질은 언제나 외부에서, 즉 주위의 것들로부터 규정되는 외생적인 주름들을 갖는다. 인간과 사물이 함께 등장하는 그의 작품에서 여러 차원의 주름들은 덩어리를 조직하면서 조형화된다. 곡률 또는 변곡의 무한한 계열을 이루는 작품들은 이 세계에 대한 비유이다. 규모면에서 세계에 대한 비유가 충족시키는 구현물이 이 전시의 가장 큰 작품인 커튼 조각이다. 그것은 접혀지고 펼쳐지는 주름의 성질을 최대한 드러낸다. 들뢰즈는 [주름]에서 펼침은 증가함, 자라남이고 또한 접힘은 감소함, 줄어듦, 세상의 외진 곳으로 되돌아옴이라고 말한다. 펼침은 접힘의 반대나 소멸이 아니라, 접힘 작용의 연속 또는 확장, 접힘이 현시되는 조건이다. 여기에서 펼침은 결코 접힘의 반대가 아니며, 그것은 주름들에서 또 다른 주름들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라창수의 조각은 예술작품 역시 이러한 운동을 통해 창조됨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