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미는 1996년 첫 개인전 ‘자라나는 나무들, 그리고 그 숲에서’와 2006년 두 번째 개인전의 ‘나무에 빠지다’전 등을 통해, 나무나 숲 같은 자연적 소재에 집중해 왔다. 2008년 3번째 개인전인 ‘또 다른 정원’에서는 숲과 나무 외에 정원이라는 테마를 들여온다. 첫 개인전에서 나무들이 둥근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면, 2회 개인전에서는 둥근 나무가 뾰족하게 변형되었고, 이러한 추세는 세 번째 전시까지 이어진다. 아이들이 나무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둥근 형태와 달리, 뾰족한 말단은 나무의 상승에 대한 의지를 강조한다. 초록빛 정원 밖의 공간은 보색을 이루는 붉은 색 계열로 칠해진 작품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것은 다양한 색으로 물드는 하늘빛의 사실적인 모습이기도 하고, 자전적 요소와 얽힌 상징적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나무는 감정이 이입된 대상으로 나타난다.

나무들은 담장이 둘러쳐진 안전한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담장 밖에서 내부를 들여다보는 키 큰 나무로 나타나기도 하며, 대지로부터 놓여나 하늘로 승천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풀인지 나무인지 분간되지 않으며, 식물의 뾰족한 선은 물고기나 새의 부리같이 종을 알 수 없는 애매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원 안 식물은 식물에 대한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 면으로 재구성 되어있다. 작품의 기본구조는 연회색 또는 미색 담장이 둘러쳐진 정원 내부의 모습과 그 밖 풍경과의 다양한 상호작용이다. 담장은 뚫린 문을 가지고 있어 바깥의 것들과 소통하는 통로가 된다. 작품 [궁금한 그들의 이야기]는 연회색 담장이 둘러쳐지고 양쪽에 문이 뚫려 있다. 꽃송이 형태의 구름들이 분홍빛 하늘에 떠있고 나무와 풀이 가득한 정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오려고 기웃거린다.

담장의 형태는 작품에 따라 변주를 보여주지만, 여러 모양과 방향으로 뚫린 문이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느리게-쉼]에는 분홍 빛 하늘 밖에서 들어온 꽃송이 형태의 구름이 녹색 식물로 정착하는 듯한 모습이다. 꽃구름의 모티브는 2007년 스페인 여행에서 사막에서 본 낙타 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구름과 꽃, 정원의 식생들은 서로 호환될 수 있는 동질이상(同質異像)의 것들을 이룬다. 이 작품에서 바깥은 하늘일 수도 있고, 낙타초가 있었던 사막일 수도 있다. 정원은 하늘이나 사막과는 달리 일정한 선이 그어진 자족적인 공간이지만, 한상미의 작품에서 바깥과 안은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통로는 담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가령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는 담장 밖, 하늘 위로 올라가는 큰 나무들이 있는 풍경인데, 여기에는 정원 안에 뚫린 사다리꼴 형태의 구멍이 있다.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는 큰 나무의 실루엣을 비춘다. 정원 자체가 하늘에 떠있는 것인지, 정원 안 인공호수인지, 호수에 하늘이 비친 것인지 모호하지만, 그것이 문이 뚫리지 않은 담장에 문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정원 유희]에서는 기하학적으로 다듬어진 정원이 나오는데, 정원 가운데 뚫린 구멍에는 하늘로 올라가는 큰 나무가 보인다. 정원의 면 자체가 하늘로 설정된 것이다. [하늘 정원에 가다]에서 나오는 구멍은 거울인지 그림인지, 또는 단순한 창틀인지 알 수 없는 통로이다. 그것은 상승중인 큰 나무들이 보여주는 바처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매개가 된다. 정원 안에서도 움직임은 있다. 정원 안의 식물들은 서로의 몸을 부비면서 빛을 향한 강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녹색 식물들에는 불같은 또는 파도 같은 강력한 선의 흐름이 존재한다.




정원 안의 또 다른 동적 요소는 얼룩말, 코끼리 같은 초식 동물이다. [일요일 오후]나 [바람 속에서 웃고-웃다]같은 작품 제목은 정원 안에서 뛰노는 얼룩말에 투사된 작가의 감정이 투사되어 있다. 한상미의 작품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얼룩말이 달리는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중첩시킨다. [바람을 쫒다], [run, run, run] 등도 풍요로운 정원 안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얼룩말들이 있는 풍경이다. 또한 [맛있는 정원]속에서 코끼리는 느릿느릿 달콤한 산책을 즐기고 있다. [숨어있는 그들과 이야기 하다]는 가장 큰 작품으로, 이 전시에 나온 다른 작품들에 존재하는 모든 모티브들이 등장한다. 담장은 복잡한 다각형으로 둘러쳐지고 큰 문도 두개 뚫려있다. 붉은 하늘 위에 뜬 분홍빛 꽃구름이 문으로 들어오려 하고, 초록 풀과 포인트를 주는 여러 가지 색 면의 추상적인 나무, 그리고 통통한 얼룩말이 등장한다.

이 대작에서 정원은 한계 지워져 있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자족적인 소우주로서의 면모를 가진다. 가브리엘 반 쥘랑은 [세계의 정원]에서 정원의 기원에 에덴동산을 놓는다. 성서의 신화적 정원인 에덴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장소였으며, 인류는 끊임없이 신화에 나오는 이러한 낙원을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한다. 아랍인이 전파한 낙원 역시 폐쇄된 정원의 개념을 가진다고 한다. 정원은 거친 야생의 자연과는 달리 보호된 공간이다. 그곳은 주위의 모든 것이 살아있다고 느꼈던 유년의 마법적 공간이기도 하다. 정원의 기원에 존재하는 에덴동산의 이미지는 개인의 유년기와 계통 발생적으로 중첩된다. 유년기적 천진함은 역사 이전의 자연의 상태, 원초적인 출발선 상에 서 있는, 만물이 비롯된 때의 신선하고 신성한 시공간을 상징한다.

물론 유년기에 행복과 환희만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공포와 신비가 착종된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다. 한상미의 작품에서 둘러쳐진 담장은 야생의 위험을 차단하면서 원초적 자연의 매력과 풍요로움을 구가한다. 그곳은 야생의 숲이 내포하는 위험 뿐 아니라, 고된 노동을 연상시키는 경작지와도 구별되는 곳이다. 한상미가 표현하는 정원은 위험스런 야생의 숲과 성인의 지루한 일상적 노동의 공간인 경작지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여기에서 자연은 정원사가 부여하는 규칙과 질서에 복종하지만, 정원사의 일은 생산적인 노동이라 할 수 없다. 생산적인 노동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이 짊어진 굴레였다. 철학자 롬바흐는 [정원의 철학]에서 경작지는 정원의 반대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노동을 의미하고 대지에 대한 폭력, 땀, 괴로움, 법규, 인공적 질서, 많은 조건들에게 복종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풍부한 수확물과 법과 공공성과 공동체를 가져다준다. 즉 문화를, 보다 높은 단계의 안정성과 자의식을 갖는 삶을 도래하게 한다. 개인적, 역사적 유년기를 벗어난다 함은 이러한 지속적인 일방성에 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정원은 경작지에 선행했다. 자크 브로스는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적절한 무질서 속에서 자라나는 정원이 일상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해주었던 경작지 보다 먼저 등장하였다고 말한다. 가장 오래된 정원은 바로 다듬어지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이 자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한되어 있고 폐쇄되어 있는 공간을 말한다. 정원 술은 경작과는 달리, 생산을 위해 자연적 과정에 폭력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 없이 문명은 발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설 때문에 개인적, 역사적 유년기의 시공간으로서의 정원은 애틋함을 간직하게 된다.




경작지가 가지는 생산성이나 자연적으로 주어진 거친 야생성이 아닌, 정원은 인간세계와 자연 세계 사이에 위치한다. 정원 안에서 자연은 스스로 펼쳐질 수 있도록 인간의 조정을 거친다. 한상미의 작품에서 정원은 자연과 인공의 결합으로서 인생 및 예술에 대한 풍부한 비유의 원천이 된다. 화면을 수평적, 또는 사선으로 가르는 담장의 선 안에 존재하는 자연적 경관은 균형 잡히고 조절된 하나의 예술작품이자, 이상적인 삶의 양식이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한상미의 작품에서 정원 안팎에 존재하는 나무는 작가의 정서를 투사하는 상징적 존재들이다. 담장 안을 넘나보는 거대한 나무, 풀과 나무의 중간적 형태의 정원수들은 상상 뿐 아니라, 물리적인 면에서도 인간에 대한 비유가 된다. 대지 위에 뿌리 내리고 서서 하늘을 향하는 나무는 신인동성동형적(Anthropomorphism)을 상징주의를 내포해왔다.

정원 안의 나무는 배려와 보호의 대상이 되고, 어른나무로 성숙하면 담장 밖으로, 더 시간이 지나면 하늘로 올라간다. 여러 단계의 나무들은 인생이 그렇듯이 성장과 소멸의 과정을 보여준다. 한상미의 작품에서 나무는 강한 상승 지향적 움직임을 가진다. 구름 위로 올라가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땅에 뿌리박고 있는 식물도 내재적 율동성이 존재한다. 가령 [당신의 정원-나무가 피었습니다]는 지평선 위에 펼쳐진 하늘과 닿으려는 나무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홀씨처럼 하늘로 수직이동 하는 큰 나무는 아버지가 있는 곳을 향한다.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붉거나 연분홍빛으로 물든 하늘로 향하는 상승 기류에 실린 나무의 모습들은 몇 년 전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서 나온 것이다. 땅과 하늘의 연결과 교류는 거대한 수직축인 나무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축을 통해 상상은 비상과 초월을 향한다. 서로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여행의 도정에서 나무는 세계의 중심축이라는 강고한 이미지를 벗어난다. 한상미의 작품에서 나무는 자신의 축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럿으로 흩어진다. 하늘로 올라가는 큰 나무의 형상은 가볍디가벼운 홀씨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원 속 식물들은 잔디 같은 것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나무라고도 볼 수 없다. 그것은 풀이 가지는 수평성과 나무의 수직성을 동시에 가진다. 거기에는 수직 방향 뿐 아니라, 수평적으로 뻗어가는 운동감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수평적 방향성에서 대지 위의 다른 존재들과의 연결이 이루어진다. 벽으로 바닥으로 뚫린 문들은 이러한 연결을 원활하게 해준다. 한상미의 정원 술은 자족적인 완결성을 갖추면서도 폐쇄성을 벗어나려는 예술 고유의 지향과도 닿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