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담론은, 예술에 있어 공공성의 활성화라는 자못 훌륭한 명분을 갖춘 공공미술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미술이 뿌리 내리는 사회의 지속 가능성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지속 가능성은 한 사회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뿐 아니라, 미술처럼 사회에 속해 있는 다양한 하위 범주들의 존립 기반이 된다. 또한 지속 가능성이란 근대이래, ‘보편적’ 진보의 여정에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진입한 대다수의 인간 집단이 당면한 사회적, 생태적 난맥의 핵심에 놓여있는 문제이다. 공공미술의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한 공공성은 공공의 운명을 가늠하는 사회의 지속 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다양한 문화운동--생태, 환경, 전통, 민주주의와 평등--과 연계될 수밖에 없다.
과학과 기술을 생산력의 발전과 결합시킨 서구 사회에서 진보는 우연과 무질서를 필연과 질서의 편에 서게 하는 전능한 힘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진보사상은 현대사를 거치면서 널리 전파되어 자유민주주와 공산주의라는 상반된 이념의 공통된 기반을 이루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폐허에서 다시 시작하는 사회들에서 빈곤에서의 해방을 약속하는 개발 지상주의의 근간이 된 것도 진보에 대한 신념이었다. 각자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방황하지 않기 위해 일직선으로 전진하라는 데카르트적 은유는 강력하였다. 그러나 근대의 믿음과는 달리, 직선이 아닌 이리저리 꼬여있는 미로 같은 여정에서 시간의 화살은 예측 가능한 미래로 향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 세계화를 통한 집중화는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극대화시킨다. ‘과학으로부터의 예측, 예측으로부터의 행동’(콩트)이라는 실증주의적 논리는 위험에 처한 사회를 제어하는 원칙이 더 이상 되지 못한다.
과거를 성급하게 백지화하는 단선화 된 진보는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에서 비롯된다. 물질적 생산력을 추동하는 것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수단을 보증해줄 뿐 목적을 지시하지 않는다. 현대사회는 물질적 진보를 이루었지만, 진보의 가능성이 온전히 실현되고 유지되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사회적 제 관계에 달려 있다. 근대성의 명암이 지난 세기 후반부터 극적으로 엇갈리면서, 아름다움과 진리, 선함을 구분하고 자율화시켰던 모더니즘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적 이의제기는 이완과 해체라는 측면으로 기울어진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공공성을 중시하는 미술에서 해체는 필요조건일 뿐, 종합이라는 충분조건이 있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대안의 질서를 구상함에 있어, 공공미술은 흩어져 있는 개별적인 실천들을 아우를 수 있는 틀이 될 수 있다.
기존 질서의 해체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결정적인 연결고리를 파악해야 한다. 현대사회는 진보라는 틀 속에서 구조화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고도의 집중화를 통한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진보에 대한 지배적인 비전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한 발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름다움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제도의 울타리에 안주하는 현대미술의 상황 역시 지속 가능하지 않다. 미술은 거대한 분업화 체계의 일부분에 속해 있으면서 이제는 소수자만이 알아보는 ‘형식의 내전(內戰)’에만 집중함으로서 스스로 사회적 기반에서 이탈해왔다. 예술은 진보하는 형식의 역사로서 근대의 단선적인 노선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지속가능한 조건을 묻는 총체적인 문화행위가 되어야 한다.
2. 진보의 일방향성에 대한 이의제기
한 문화의 지속가능성을 묻는 것은 동시에 진보에 대해 묻는 것이다. 오늘날 진보가 문제시 되는 것은 하나의 모델로 모든 것을 쓸어 담는 거대한 강제력 때문이다. 경제는 갈수록 커지는 전문화와 중앙 집중화 그리고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 생활양식으로 세계를 빠르게 끌고 간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1992)에서 서구식의 개발이 전통의 사회적, 생태적 균형을 희생시킨다고 강조한다. 한 문화가 파괴될 때마다 수세기 동안 누적된 지식이 말살되고 다양한 인종집단이 자신들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갈등과 사회 붕괴가 뒤따른다. 자연에 대한 파괴력의 규모와 속도가 이렇게 컸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기술자체가 파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개발은 개인의 탐욕을 자극함으로서 추동되고 있다.
전 지구적인 거시경제는 지역 문화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중심으로의 집중을 야기한다. 사람들은 옛날보다 더욱 가까이 붙어살고 있지만, 개인들 간의 거리는 더욱 커진다. 익명의 관료제도가 사람들끼리의 상호작용을 대신한다. 획일화된 노동 방식은 타인을 잠재적인 경쟁자로 배척하게 만든다. 지역 기반에서 이탈된 도시적 삶은 더 많은 소비를 부추키며, 소비를 위해 체제로의 적응은 필수가 되었다. 더 많은 물량을 동원한 현혹 속에서, 무엇인가를 스스로 만들어 소통하려는 태도를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예술 뿐 아니라, 상품화의 회로에 편입되지 못하는 많은 독립적인 생산 방식이 비슷한 운명에 처해진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다.
노르베리 호지는 현대화 과정 자체가 엄청난 일반화라고 지적한다. 현대화란 지역적인 다양성과 독립성을 하나의 단일문화와 경제체제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식량, 의복, 주거를 스스로 마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불안정한 현금수입을 위해 자신의 문화와 독립성을 버림으로서 삶의 맥락이 단절된다. 스스로 생산하던 것을 현금으로 사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이 강요된다.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생명의 씨앗은 이제 표준화된 종을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으로 집중된다. 기업의 필요에 맞도록 자연이 조작될 때 그 결과는 더 큰 표준화와 획일화이고 그에 따라 취약성이 증대된다. 문화의 씨앗도 같은 운명에 처해있다. 물량주의적 투자를 통해 생산된 문화만이 시장에서 우위를 점유해가는 경향이 있다.
촘촘히 뻗은 시장의 그물망을 통해 대량적으로 문화를 유통시켜 순간적으로 자극되고 소모될 뿐인 문화적 쓰레기를 양산한다. 민주적인 통제 영역 밖에 있는 다국적 기업의 유전자 공학이 종 다양성을 파괴하고 생물학적 상호의존의 그물망을 와해시키듯이, 문화적 우세 종으로 군림하는 대중문화는 토속 문화와 예술 모두를 위협한다. 토속 언어의 도태와 더불어 그 언어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세계관이 사라져 간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이 동일한 시기에 출시된 같은 동화책을 같은 언어로 읽는 것이 교육적 배려나 미래의 경쟁력이라는 맥락에서 고무되곤 한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개발이라 할 만한 것으로, 같은 문화적 입맛을 가진 미래의 소비자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세계화는 각지의 다양한 문화를 하나의 단일문화로 축소시킨다. 균일화와 집중은 동일한 과정의 양면이다. 세계화를 통해 대규모의 경제 통제권이 다국적 기업에 넘어가는 것은 호혜적인 이익이 아니라, 약자의 지위가 더욱 하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시장은 상호 교류가 아니라, 분열과 극심한 경쟁을 낳는다. 한정된 동일한 것을 소비하려는 욕망의 균질 화는 바람직한 차이들을 소멸시킴으로서 문화의 다양성을 파괴한다. 진보의 탈을 쓴 개발주의는 자기 주변의 것을 활용하던 토착문화가 먼 곳으로부터 온 유력한 소비품에 의존함으로서 인공적인 결핍을 재생산하고, 표준적인 선진 시장의 모델을 따르라는 압력을 가한다.
현금경제 체제라는 단일한 모델에 쉽게 편입되지 못한 ‘낙오자들’이나 스스로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가지는 박탈감은 갈수록 커진다. 사회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비공식 부문)이 구별됨으로서 여성이나 아이, 노인의 지위도 하락한다. 예술가도 그들과 비슷한 처지가 된다. 현금경제의 사회에서 그들은 생산이 아닌, 그림자 노동에 복무한다. 사회학자들은 현대사회가 학습, 노동, 은퇴라는 세 박자의 동력으로 건설됐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을 받기만하는 유년기는 너무 길고, 노동 시장에서의 신분은 불안정하며, 무기력한 은퇴는 앞당겨진다. 공부하는 기계, 돈 버는 기계, 무료함이라는 극단적으로 획일화된 생애 주기 속에서 예술은 교육을 위한 수단이나 잉여적인 장식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3. 단선적 시간의 양극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시간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여가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문화는 소비적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문화 생산물의 편향적 소비를 야기한다. 짧은 시간 동안에 정보 소비의 형태로 흡수되는 패키지화된 문화상품의 번성은 현대인들의 바쁜 생활주기와 관련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전체적으로 노동시간을 절약해주지 않는다는 것, 시간 역시 기계적으로 잘려서 소비되는 상품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사회학자 스코트 래쉬는 시간과 공간이 독립적 자원으로 등장한 것은 현대사회를 정의하는 특성이라고 말한다. 현대는 인간을 시간적 주체로, 시간에 대한 지향을 가짐과 동시에 시간에 의해 규율되는 존재로 구성한다. 시간은 계획되고 계산되고 세분되며, 자본처럼 지위와 권력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운용된다.
자본은 타인의 서비스 구매를 통해 양질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며, 권력은 그것의 통제 하에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구조화할 수 있다. 진보는 서구적 시간체제의 헤게모니를 가져왔고, 세계의 다른 모든 시간 체제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야기했다. 표준적이고 규율적인 시간권력에 의한 사회생활의 정량화는 전 지구를 가로지르는 동시화 된 생활척도를 출현시켰다. 그러나 기술적, 생태적 위험이 집중되는 경향이 강한 현대는 일상적 노동을 지배하는 기계적 시간 외에, 컴퓨터로 상징되는 시공간의 유례없는 가속화와 더불어 자연과 역사에 대한 관심에 상응하는 장기 지속의 시간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스코트 래쉬는 기술혁명에 의해 야기된 즉시적 시간은 우리가 체험하지 못할 시간 영역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컴퓨터 세계에서 처리되고 있는 사건들은 ‘시간의 최종적인 추상화를 뜻하며 인간체험과 자연 리듬으로부터의 시간의 완전한 분리’(제레미 리프킨)를 의미한다. 즉시적 시간의 반대편에 어마어마하게 길고 느낄 수도 없이 변화하는 진화적 또는 빙하적 시간이 자리한다. 현대성의 조직 원리였던 시계시간의 양극단을 이루는 즉시적 시간과 진화적 시간은 순간적인 직관과 메타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을 내재하고 있으면서, 강한 심미적인 특성을 가진다. 즉시적 시간은 첨단의 과학기술과, 진화적 시간은 보다 장기 지속적인 인류학적 생태적 세계관과 연관된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는 즉시적 시간을 더 강하게 강조하고, 기호의 소비에 기초한 경제의 회전주기는 점차 빨라진다. 그것은 대량소비 패턴이 더욱 다양하고 분화된 패턴들로 대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기술의 가속된 발전 역시 시간의 균질성을 완화시킬 가능성을 준다. 한편 과학기술이 자연에 주는 영향이 극대화됨에 따라 인간은 자신들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장기적인 전망이 요구된다. 과학기술의 영향력과 위험이 동시에 커지면서 즉시적 시간과 진화적 시간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근대를 특징 지웠던 기계적 시간 외에, 여러 가지 시간관 아래 한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미래를 전망하는가는 예술의 몫으로 남는다. 단선적인 시간이 아닌 다양한 시간의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익명적 소비자를 향해 서있는 대도시의 거대한 기념물들은 기계적 시간의 잔해들로 보인다.
4. 대안의 문화로서의 공공미술
현대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 예술은 익명적 다수로서의 소비자가 아닌, 공동체를 지향한다. 대안의 미술은 생태적이고 공동체 중심의 생활방식을 재건하는데 힘써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나 생태 지향의 대안문화는 과거 지향적이며 낭만적인 인상을 준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과거 자체가 이상적인 것도 아니다. 미술이 조화로운 삶의 총체성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던 이상적 모델을 찾는데 있어 시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연대기적인 과거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환경이 조화를 이루었던 과거,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미지의 것, 즉 ‘오래된 미래’의 문화적 성찰을 요구한다. 하나의 성장과 개발로 축소된 진보가 아닌, 보다 지속가능한 진보를 모색해야 한다.
시장의 세계화를 향한 추세가 권력과 자원을 소수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인 진보는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다. 집중화와 전문화가 낳는 다양한 지역문화의 말살에 저항하고, 문화적 생태적 다양성의 유지에 힘써야 하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공공미술은 탈 중심화 된 진보의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대규모의 획일성이 아닌 소규모이며, 다양한 것을 낳는 자급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공공미술은 주변부를 문화예술 소비 및 수입국으로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중심 집중의 속도를 완화하고, 지역과 전통 그리고 자연에 기반 하는 탈 중심화의 기획에 동참함으로서, 그 스스로가 속한 사회와 더불어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출전 | 공공미술 콜로키움 ‘아트 인 시티 2008, 지역의 공공미술을 말하다’
한 문화의 지속가능성을 묻는 것은 동시에 진보에 대해 묻는 것이다. 오늘날 진보가 문제시 되는 것은 하나의 모델로 모든 것을 쓸어 담는 거대한 강제력 때문이다. 경제는 갈수록 커지는 전문화와 중앙 집중화 그리고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 생활양식으로 세계를 빠르게 끌고 간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1992)에서 서구식의 개발이 전통의 사회적, 생태적 균형을 희생시킨다고 강조한다. 한 문화가 파괴될 때마다 수세기 동안 누적된 지식이 말살되고 다양한 인종집단이 자신들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갈등과 사회 붕괴가 뒤따른다. 자연에 대한 파괴력의 규모와 속도가 이렇게 컸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기술자체가 파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개발은 개인의 탐욕을 자극함으로서 추동되고 있다.
전 지구적인 거시경제는 지역 문화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중심으로의 집중을 야기한다. 사람들은 옛날보다 더욱 가까이 붙어살고 있지만, 개인들 간의 거리는 더욱 커진다. 익명의 관료제도가 사람들끼리의 상호작용을 대신한다. 획일화된 노동 방식은 타인을 잠재적인 경쟁자로 배척하게 만든다. 지역 기반에서 이탈된 도시적 삶은 더 많은 소비를 부추키며, 소비를 위해 체제로의 적응은 필수가 되었다. 더 많은 물량을 동원한 현혹 속에서, 무엇인가를 스스로 만들어 소통하려는 태도를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예술 뿐 아니라, 상품화의 회로에 편입되지 못하는 많은 독립적인 생산 방식이 비슷한 운명에 처해진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다.
노르베리 호지는 현대화 과정 자체가 엄청난 일반화라고 지적한다. 현대화란 지역적인 다양성과 독립성을 하나의 단일문화와 경제체제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식량, 의복, 주거를 스스로 마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불안정한 현금수입을 위해 자신의 문화와 독립성을 버림으로서 삶의 맥락이 단절된다. 스스로 생산하던 것을 현금으로 사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이 강요된다.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생명의 씨앗은 이제 표준화된 종을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으로 집중된다. 기업의 필요에 맞도록 자연이 조작될 때 그 결과는 더 큰 표준화와 획일화이고 그에 따라 취약성이 증대된다. 문화의 씨앗도 같은 운명에 처해있다. 물량주의적 투자를 통해 생산된 문화만이 시장에서 우위를 점유해가는 경향이 있다.
촘촘히 뻗은 시장의 그물망을 통해 대량적으로 문화를 유통시켜 순간적으로 자극되고 소모될 뿐인 문화적 쓰레기를 양산한다. 민주적인 통제 영역 밖에 있는 다국적 기업의 유전자 공학이 종 다양성을 파괴하고 생물학적 상호의존의 그물망을 와해시키듯이, 문화적 우세 종으로 군림하는 대중문화는 토속 문화와 예술 모두를 위협한다. 토속 언어의 도태와 더불어 그 언어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세계관이 사라져 간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이 동일한 시기에 출시된 같은 동화책을 같은 언어로 읽는 것이 교육적 배려나 미래의 경쟁력이라는 맥락에서 고무되곤 한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개발이라 할 만한 것으로, 같은 문화적 입맛을 가진 미래의 소비자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세계화는 각지의 다양한 문화를 하나의 단일문화로 축소시킨다. 균일화와 집중은 동일한 과정의 양면이다. 세계화를 통해 대규모의 경제 통제권이 다국적 기업에 넘어가는 것은 호혜적인 이익이 아니라, 약자의 지위가 더욱 하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시장은 상호 교류가 아니라, 분열과 극심한 경쟁을 낳는다. 한정된 동일한 것을 소비하려는 욕망의 균질 화는 바람직한 차이들을 소멸시킴으로서 문화의 다양성을 파괴한다. 진보의 탈을 쓴 개발주의는 자기 주변의 것을 활용하던 토착문화가 먼 곳으로부터 온 유력한 소비품에 의존함으로서 인공적인 결핍을 재생산하고, 표준적인 선진 시장의 모델을 따르라는 압력을 가한다.
현금경제 체제라는 단일한 모델에 쉽게 편입되지 못한 ‘낙오자들’이나 스스로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가지는 박탈감은 갈수록 커진다. 사회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비공식 부문)이 구별됨으로서 여성이나 아이, 노인의 지위도 하락한다. 예술가도 그들과 비슷한 처지가 된다. 현금경제의 사회에서 그들은 생산이 아닌, 그림자 노동에 복무한다. 사회학자들은 현대사회가 학습, 노동, 은퇴라는 세 박자의 동력으로 건설됐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을 받기만하는 유년기는 너무 길고, 노동 시장에서의 신분은 불안정하며, 무기력한 은퇴는 앞당겨진다. 공부하는 기계, 돈 버는 기계, 무료함이라는 극단적으로 획일화된 생애 주기 속에서 예술은 교육을 위한 수단이나 잉여적인 장식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3. 단선적 시간의 양극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시간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여가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문화는 소비적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문화 생산물의 편향적 소비를 야기한다. 짧은 시간 동안에 정보 소비의 형태로 흡수되는 패키지화된 문화상품의 번성은 현대인들의 바쁜 생활주기와 관련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전체적으로 노동시간을 절약해주지 않는다는 것, 시간 역시 기계적으로 잘려서 소비되는 상품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사회학자 스코트 래쉬는 시간과 공간이 독립적 자원으로 등장한 것은 현대사회를 정의하는 특성이라고 말한다. 현대는 인간을 시간적 주체로, 시간에 대한 지향을 가짐과 동시에 시간에 의해 규율되는 존재로 구성한다. 시간은 계획되고 계산되고 세분되며, 자본처럼 지위와 권력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운용된다.
자본은 타인의 서비스 구매를 통해 양질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며, 권력은 그것의 통제 하에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구조화할 수 있다. 진보는 서구적 시간체제의 헤게모니를 가져왔고, 세계의 다른 모든 시간 체제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야기했다. 표준적이고 규율적인 시간권력에 의한 사회생활의 정량화는 전 지구를 가로지르는 동시화 된 생활척도를 출현시켰다. 그러나 기술적, 생태적 위험이 집중되는 경향이 강한 현대는 일상적 노동을 지배하는 기계적 시간 외에, 컴퓨터로 상징되는 시공간의 유례없는 가속화와 더불어 자연과 역사에 대한 관심에 상응하는 장기 지속의 시간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스코트 래쉬는 기술혁명에 의해 야기된 즉시적 시간은 우리가 체험하지 못할 시간 영역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컴퓨터 세계에서 처리되고 있는 사건들은 ‘시간의 최종적인 추상화를 뜻하며 인간체험과 자연 리듬으로부터의 시간의 완전한 분리’(제레미 리프킨)를 의미한다. 즉시적 시간의 반대편에 어마어마하게 길고 느낄 수도 없이 변화하는 진화적 또는 빙하적 시간이 자리한다. 현대성의 조직 원리였던 시계시간의 양극단을 이루는 즉시적 시간과 진화적 시간은 순간적인 직관과 메타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을 내재하고 있으면서, 강한 심미적인 특성을 가진다. 즉시적 시간은 첨단의 과학기술과, 진화적 시간은 보다 장기 지속적인 인류학적 생태적 세계관과 연관된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는 즉시적 시간을 더 강하게 강조하고, 기호의 소비에 기초한 경제의 회전주기는 점차 빨라진다. 그것은 대량소비 패턴이 더욱 다양하고 분화된 패턴들로 대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기술의 가속된 발전 역시 시간의 균질성을 완화시킬 가능성을 준다. 한편 과학기술이 자연에 주는 영향이 극대화됨에 따라 인간은 자신들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장기적인 전망이 요구된다. 과학기술의 영향력과 위험이 동시에 커지면서 즉시적 시간과 진화적 시간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근대를 특징 지웠던 기계적 시간 외에, 여러 가지 시간관 아래 한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미래를 전망하는가는 예술의 몫으로 남는다. 단선적인 시간이 아닌 다양한 시간의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익명적 소비자를 향해 서있는 대도시의 거대한 기념물들은 기계적 시간의 잔해들로 보인다.
4. 대안의 문화로서의 공공미술
현대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 예술은 익명적 다수로서의 소비자가 아닌, 공동체를 지향한다. 대안의 미술은 생태적이고 공동체 중심의 생활방식을 재건하는데 힘써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나 생태 지향의 대안문화는 과거 지향적이며 낭만적인 인상을 준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과거 자체가 이상적인 것도 아니다. 미술이 조화로운 삶의 총체성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던 이상적 모델을 찾는데 있어 시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연대기적인 과거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환경이 조화를 이루었던 과거,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미지의 것, 즉 ‘오래된 미래’의 문화적 성찰을 요구한다. 하나의 성장과 개발로 축소된 진보가 아닌, 보다 지속가능한 진보를 모색해야 한다.
시장의 세계화를 향한 추세가 권력과 자원을 소수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인 진보는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다. 집중화와 전문화가 낳는 다양한 지역문화의 말살에 저항하고, 문화적 생태적 다양성의 유지에 힘써야 하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공공미술은 탈 중심화 된 진보의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대규모의 획일성이 아닌 소규모이며, 다양한 것을 낳는 자급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공공미술은 주변부를 문화예술 소비 및 수입국으로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중심 집중의 속도를 완화하고, 지역과 전통 그리고 자연에 기반 하는 탈 중심화의 기획에 동참함으로서, 그 스스로가 속한 사회와 더불어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출전 | 공공미술 콜로키움 ‘아트 인 시티 2008, 지역의 공공미술을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