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공원의 실태를 탐방하기 위해 들른 호수공원은 친절하게도 지하철 역 입구와 맞닿아 있어 길 눈 어두운 필자에게 반가운 코스였다. 일산 근교의 조각 작업실 방문 때마다 차를 타고 지나친 적은 있었지만, 호수가 펼쳐져 있는 깊숙이까지 들어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불가피하게 이 글은 처음 가본 장소에 대한 인상기가 될 것이며, 개별 조각 작품에 대한 분석보다는 조각이 놓여있는 전체적인 맥락에 대한 문화 비평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호수공원은 처음부터 계획된 신도시답게, 도시 핵심부에 널찍한 안마당으로 조성되었다. 마침 날씨 좋은 4월의 휴일이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공원을 찾았다. 앞서가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산 시민의 1/5정도는 나온 것 같다고 한탄할 정도로 공원은 붐볐다. 공원 들머리에는 원래 거기에서 자생했을 것 같지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요즘 고급 아파트 주변에 유행처럼 식목되는 키 큰 소나무로, 비록 수많은 지지대의 도움으로 서있을 망정, 포플라나 은행나무 일색이었던 가로수를 대체하는 우아함을 뽐내고 있다. 기존에 있던 나무들을 굳이 뽑아내고 식목되기 시작한 이런 종류의 ‘명품’ 가로수들은 토종이라는 반가움보다는 벼락부자의 갑작스런 교양미를 떠오르게 한다.
키 큰 소나무 숲은 관주도로 발주되고 조성되어, 온통 수직 중심의 기념비적 특성이 강한 공원의 조각 작품들을 예시하는 듯하다. 가령 소나무 숲 뒤에 있는 작은 작품 [비상](2003)(도1)은 거대 소나무들의 수직적 구조를 작은 규모로 반복한다. 소나무 숲을 지나 안쪽에는 작지만 넉넉한 그늘을 조성하는 느티나무들이 시민들의 작은 휴식공간을 마련해 준다. 느티나무 벤치들을 지나면 가운데가 뻥 뚫린 광장이 이어진다. 이 거대한 광장을 통해서 비로소 공원을 에워싸고 있는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온다. 대형 교회, 백화점, 마트, 상가건물에 둘러싸여 있는 공원은 온통 물건만 사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쇼핑 타운 한가운데에 놓인 고요한 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곳이 아수라장 같은 도시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공원은 휴식을 위해 애써 그곳을 찾아간 이들을 맞는 일종의 역지대liminal zone가 되어 주지 못했다. 그곳은 느긋하게 머물거나 거닐기 보다는 빨리 통과해야 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복잡한 도심과 다를 바 없다. 그늘 한 점 없는 광대한 공간에 대여된 미니 오토바이들이 사방으로 질주하고, 전국 막걸리 축제(?)가 벌어지는 광장은 교통지옥과 소음으로 번잡한 도시를 그대로 복사한다.
광장을 빙 둘러 싼 막걸리 시음 및 판매 천막들과 뒤편의 행사 차량들, 그리고 앞 무대에서는 벌어지는 제사 비슷한 퍼포먼스와 노래방 기계를 동원한 어르신들의 노래자랑은 시간이 지나도 잠잠해지질 않고 점입가경이다. 관청의 허락을 받았겠지만, 소수의 조직된 이익 집단이 휴식을 찾아 온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잠재적 소비자로 삼고 벌이는 대대적인 캠페인이 시민 축제의 외양을 띠고 나타난다. 모르긴 몰라도, 드넓게 조성해 놓은 광장은 이번 뿐 아니라 그동안에도 상업적, 관제적 행사들의 주 무대가 되어 왔음이 틀림없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다수의 시민을 소외시키는 이 번잡하고 시끄러운 행사장에서 유일하게 눈을 끄는 고요한 형태가 광장 한가운데 30미터 높이로 세워진 [일산 신도시 건설 기념비](1997)(도2)이다. 그것은 폭원 3m의 스테인리스 원통 9개가 하나의 축에 줄줄이 꽂혀있는 형태로, 일산문화 광장의 조성자인 한국 토지공사가 발주한 기념 조형물이다. 공원의 어느 장소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높다. 공원을 하나의 소우주로 본다면, 이 작품은 위치나 규모로 보아 세계의 중심이나 세계수와 같은 위상을 가진다. 있는 듯 없는 듯 공원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다른 조각 작품과 비교한다면, 이곳이 조각 공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증거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원추형 화강석 기단 위에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조형물은 텅 빈 광장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규모로 놀라움을 자아낸다. 마치 초대형 서치라이트처럼 원통형이 여러 방향을 향해 있어 반복된 구조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려 한다. 이 기념비적인 수직성은 ‘일산 신도시의 번영을 상징 한다’는 앞의 설명문을 안 봐도, 하늘 높이 솟아오른 형태 자체에서 성장 제일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거대한 해시계처럼 반경 몇 십 미터 이내에 그늘 한 점 없는 콘크리트 바닥에 오직 자기만의 그림자를 떨구고 있는 이 거대한 기념비는 마치 도시의 대형 랜드 마크 빌딩처럼 다가서기 힘든 고립된 섬을 이룬다. 그것은 복잡한 선을 그으며 빠르게 이동하는 미니 오토바이, 장난감 차, 인라인 스케이트의 탑돌이 코스의 중심이 되어 준다. 거대한 광장의 중심에 서있는 조형물은 원추형 중심으로 지상세계로부터의 최소함의 접촉점을 유지하면서 다급하게 저 탈속의 세계로 달아나고 있는 듯하다. 비록 그것이 예술이라는 고급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광장을 채울 잡다한 행사들의 비속함을 정화시켜주진 못할 것이다. 이 기념비는 수도권에서 부가가치를 급상승시킨 성공적인 신도시 상을 상징한다는 점에서는 꽤 성공적이지만, 공공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기분 나쁜 관제적, 상업적 행사들만큼이나 시민과 동떨어져 있다. (도3)
드높은 기념비는 이 장소를 시작했고 관장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조적 권력을, 그 안을 채우는 잡다한 행사들은 권력과 영합된 크고 작은 이익집단들의 존재를 떠오르게 한다. 거대한 광장은 이처럼 관료적 상상력과 장사꾼의 활기만 느껴질 뿐이다. 양자는 사이비 공공성이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시민의 참여를 일깨우고자 하는 광장의 주체인 시민성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리차드 세넷은 [살과 돌]에서 과거의 유물을 싹 쓸어버리고 순수한 부피의 공간을 창조하려 했던 근대 혁명가들의 상상력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의 상상력을 통해 근현대의 광장이나 공원의 모델이 생성되었다. 저자는 모든 것이 숨김없는 드러나는 투명한 공간에서 시민의 자유가 구가되기 보다는, 무심한 시각적 아고라가 된 역설을 분석한다. 장애물을 제거하고 공허한 빈 판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자유 대신에, 혼돈과 무관심이 군림한다. 비어있는 부피는 파악하기 어려운 권력 작동을 위한 적절한 공간으로, 그곳의 군중은 집단적으로 훔쳐보는 이가 되었다. 공원은 시민 다수가 모이는 공간이지만 권력의 진정한 형태인 소외감이 유지된다. 움직이는 공간과 육체는 분리되고, 이 공공영역에서 사람들은 개별자로 존재할 뿐이다.

이전의 흔적을 싹 밀어 없애고 원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구조화한 공간으로서의 광장이 소외감을 준다면, 건너편의 호수는 상대적으로 자연의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수평적인 호수의 탁 트인 전망에는, 광장에서와 같은 위화감이나 번잡함이 없다. 매순간 높이가 달라지는 호수 안의 분수대가 유일한 수직적 형태를 이룬다. 한편 조각의 입장에서 본다면, 압도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호수와 비할 바가 못 되는 초라한 상황에 처해 있다. 호수 쪽 조각의 주변성은 위치나 존재감 뿐 아니라, 작품성과도 관계가 있다. 1990년대 말에 조성된 작품들이지만, 지나간 시대의 구상, 또는 추상의 변주를 보여주면서 평범한 대중성에 머물고 있다. 대중의 접근성이 용이한 잔디밭에 놓인 작품 [발아](1997)(도4)는 호수 쪽을 바라보는 모자 상이며, 작품 [정](1996)(도5)은 유선형 외곽선에 가운데가 뚫린 전형적인 모더니즘 조각이다. 근처에 놓인 외국 작가의 작품 [세 개의 돌 더미](1994)(도6)는 뭔가를 기념하느라고 위로만 솟아있는 공원 내 다른 조각품과는 달리, 안정된 수평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대중들이 이것이 예술작품인지 알아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미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조각품에 비해 탁 트인 호수를 감아 도는 강한 건축적 구조물들은 자연과 인공의 합작품으로서의 공원의 면모를 보여준다.
따로 마련된 전망대는 건축의 연장으로서의 자연, 즉 인간의 힘으로 완전히 제어한 자연 경관을 두드러지게 한다. 호수공원은 도시 속에 허파의 기능을 담당하는 자연 공원이 되기에는 수목들이 너무 빈약하다. 조각 공원이기에도 작품의 양과 질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하다. 공원 설계자가 제시하고 있는 추상적 풍경은 휴일밖에 시간이 없어 한꺼번에 몰려든 대중들의 동선을 안내하는데 집중되어 있는 듯하다. 자연이나 예술, 또는 타인과의 자연스러운 접촉점이 아니라, 자연을 제어하고 지배하는 분리와 추출이 두드러진다. 이 추상적이고 기능적인 거대한 흐름 속에서 조각 작품들은 작은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조각 작품은 그곳의 자연과 마찬가지로, 내포적, 외연적으로 큰 상징적 울림을 지니기 보다는 즉각적으로 해독되는 기호나 신호에 머문다. 많은 작품들이 관주도의 기념물의 속성인 계몽의 역할에 너무 충실해서, 조각 작품이기 보다는 선전탑처럼 보일 정도이다. 공원에 놓여있는 조각 작품들이 대부분 전체적인 자연적, 문화적 맥락과 무관하게 관에서 주도한 그때그때의 행사에 맞추어 급조된 까닭이다. 워낙 장소가 넓어서 작품들 간의 연관성이 자연스럽게 해체되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해야 할까.
가령 공원 입구에 서있는 시계탑(2003)(도7)은 고양 세계 꽃 박람회를 기념한 조형물로 ‘두 손 모아 꽃과 호수의 도시 고양의 미래를 기원’하는 작품인데, 꽃과 시계라는 모티브를 단순히 연결시켜 놓았을 뿐이다. 작가명은 없고 ‘동방orient’이라는 제작사(또는 기획사?)가 만들었다고 나와 있다. 조금 들어가면 나오는 [자전거 천국](1997)(도8) 역시 자전거와 사람의 모티브를 단순히 연결시킨 것으로, ‘건강증진과 쾌적한 도시환경 조성하고자 작품 자전거 천국 만들기 사업’을 추진한 기념으로 조성된 것이다. 겨우 5년, 10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땟국물 뒤집어 쓴 모습이 배경의 급조된 자연 풍경보다 추레한 모습이다. ‘국가와 인종, 종교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전 지구 어린이의 교류’를 기념한 [세계평화 아동축제](2002)(도9)는 작가 명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작가 명 대신에 당시의 작품을 발주했던 문화관광부 장관이름이 박혀있다. 작가 명을 삽입할 공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작품 기단 근처의 네 면에는 돌아가면서 ‘세계평화 아동축제’, ‘한국 걸스카우트 연맹’, ‘유니세프’라는 주관사 및 협찬사 등으로 추측되는 단체명들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호수공원 조각품이 대부분 직설적인 선전탑에 머물다 보니, 가장 눈에 띄는 조형물이 진짜 선전탑이 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국세청이 세운 세금 관련 캐릭터인 [세누리, 세우리](도10)라는 조형물은 구석에 처박혀 있는 조각품들과는 달리, 호숫가의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설치되어 있다. 희미한 흑백사진 같이 존재감이 없는 다른 조각 작품들에 비해 나름대로 활기찬 형태이다. 그것은 관에서 시민에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세금을 열심히 내라!--인 것이다. 그곳의 예술적, 상업적 조형물들은 관료적인 메시지의 과포화로 휴식과 명상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구경거리는 곧 광고이다. 밀집되어 있으면서도 개별적 침묵의 공간인 도시는 시각성에 강하게 호소한다. 바네사 슈와르츠는 [구경꾼의 탄생]에서 현대적 삶의 시각성을 전통적 삶의 서사성과 대조한다. 전통 사회의 근간인 공동체는 신화와 전설, 이야기로 가득한 서사의 공간이 있지만, 익명적인 대도시에서 사람들은 표면을 볼 뿐이다. 따라서 메시지의 표면을 확장하는 것이 관청이나 상업적 조직의 뜨거운 관심사이다. 현실은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대상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되었다. 물론 시각중심주의에서 억압적인 측면만을 보는 것을 옳지 않다. 대중들은 권력의 그물망으로 촘촘한 근대적 시각의 그물망에 포획된 존재만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판옵티콘 모델과는 달리, 도시의 스펙터클은 구경하라고 재촉한다. 현대 대중문화의 기원인 구경거리에 몰입하는 근대의 구경꾼들은 일상생활이 구경거리로 변형되는 과정을 다함께 즐겼던 것이다. 구경거리를 통해서 군중이 추구하는 행복은 20세기를 거치면서 현대 대중사회를 정의할 수 있는 본질이 되었다.
과도한 노동에 지친 시민들은 귀중한 시간인 휴일 날 도심의 공원에 와서 쉬고 대화하고 생각하기 보다는 눈으로 소비한다. 일부 시민은 번잡한 그곳을 벗어나서 공원 옆의 다국적 기업이 만들어 놓은 더욱 세련된 상가에서 나머지 휴식 시간을 즐길지도 모른다. 그곳들은 신도시와 함께 어느 날 생겨난 곳이지만, 정교한 원격 마케팅에 의해 예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친숙한 곳들이다. 이렇듯 날로 번쩍번쩍 변하고 있는 도시 환경은 무덤이나 지키고 있을 뿐인 기념 조각의 운명을 벗어나야 할 필요를 일깨운다. 기념 조각은 시민을 위한 다는 추상적 장소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원을 에워싸는 더 막강한 기호의 정치경제학과 경쟁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호수공원 내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조각 작품들은 대중매체에 의해 추동되어온 대중의 시각적 관습에도 부응할 만큼의 ‘비주얼’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다만 거대한 시각적 관습이 강요하는 선전 기능만은 충실하게 구현하고 반복한다. 좀 더 보잘 것 없고 소박한 차원에서 말이다. 관주도의 행사에 그때그때 동원되는 식의 기념 조형물 사업은 한 장소의 기능과 상징성을 적절하게 표현하기는커녕, 단순한 장식조차도 되지 못하는 점을 호수공원의 기념비들은 알려준다.
출전 | 계간 조각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