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하게 선이 떨어지는 전통 도자기에 꽂혀있는 적색, 혹은 백색 목련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용기(容器)로서의 미술작품의 의미를 음미하게 한다.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꽃(花)은 그림(畵)과 친근한 관계에 있는 듯하다. 박철환이 주로 그리고 있는 목련들은 맑고 청렴해 보이는 그 자태에 반해서 2006년 무렵 부터 시작한 것이다. 목련은 단지 정물화의 한 소재이기 보다는 충만한 생명의 느낌을 전달한다. 하나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여러 송이의 목련이 꽃이 피는 과정을 시연이라도 하듯이, 개화의 여러 단계가 나타나 있어 화면에 동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목련의 사실적인 면모는 자연의 경외심에 대한 강한 감정이입의 정서를 자아낸다. 입자가 고운 리넨 천에 아크릴릭으로 그려진 목련화는 서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보여주지만, 서양화 특유의 두터운 물질감이 없고 바탕과 곱게 밀착되어 있다. 동양화의 분위기는 목련이나 도자기 같은 소재 때문만은 아니다.

박철환은 ‘인물 또는 문인화를 닮은 정물화’를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에 의하면 문인화는 획이 강하고 여백이 있으며, 숙달된 기교를 요구한다. 절묘하게 굽은 나뭇가지는 필획의 느낌을 주고, 추상적인 바탕은 여백처럼 보이며, 사실묘사는 숙달된 기교와 연관된다. 전경의 대상은 도자기의 선 안팎을 중심으로 하나의 덩어리로 응집되지만, 배경은 선과 면의 복잡한 중첩에 의해 추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많은 시간이 걸리는 밑칠 작업은 긁고, 찍고, 뿌리고, 베껴내는 등, 접착 문제로 화면에 이질감을 만들어내는 꼴라주 기법만 빼고, 우연적인 효과를 주는 방법을 최대한 활용한다. 돌가루 등을 젤에 개서 발라 촉감을 강조하기도 한다. 배경화면은 무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우연성이 짙지만, 보다 엄밀하고 투명한 방식으로 그려진 전경의 대상과 어우러진다.

요즘은 주로 목련을 그리지만 내년부터는 종교적 분위기가 나는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을 계획하고 있다. 인체의 부분 하나만을 가지고 그 위에 빛을 주고, 전경의 입체감과 배경의 신비감이라는 기법을 동일하게 적용할 예정이다. 추상적이든 구상적이든 화면을 보는 관습 상, 전경의 덩어리는 인물을 연상시키게 된다. 따라서 정물화에서 인물화로의 상호적 이동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을 밝히는 작가의 언급에서 그가 독실한 기독교도임을 알게 된다. 작업실 대신에 방문한 두 군데 전시장에서 본 작품들과 작가론에 실린 글에서 ‘내 아버지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는 대목도 발견 된다. 물론 그의 작품에는 십자가를 비롯한 어떠한 종교적 도상도 발견되지 않는다.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정밀한 자연 묘사에서 발견될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그것은 작품의 내용보다는 형식, 그리고 작업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기독교적 관점에 의하면 자연은 창조주의 작품이므로, 작가가 이것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재생산하는 것은 신적 창조에 대한 찬미에 해당된다. 정교한 사실주의 기법에 내재한 실재에 대한 인식은 신이 창조한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작가가 몰입하는 원초적인 현실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교와 리얼리즘의 관계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전형적이다. 루이 뒤프레는 [신화와 상징]에서, 형상을 통해 실재와 조형적 언어를 통일시킬 수 있는 인간 능력에 대한 상찬은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당시의 인문주의자들의 사상---‘하느님이 참된 실재들 및 자연적 형상들의 창조자이듯, 인간도 이성적 실재들 및 인위적 형상들의 창조자이다’(쿠자누스)---은 상징적 우주를 재창조하는 인간을 우주의 정신적 중심에 가져다 놓는 자부심과 신적 현실을 연결시킨다. 세상의 만물은 신의 언어가 새겨진 신성한 책과 같은 것이고, 그림은 그것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박철환이 그린 풍경화에서 파도치는 바다나 용트림하는 소나무 등에서 보이는 대상에 대한 정교한 사실적 묘사는, 대상의 기계적 재현을 넘어 생명의 신성한 기운이 충전되어 있다. 풍경화 역시 정물화처럼 배경이 추상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대상과 무관하게 자체적으로 아름다움을 발하는 배경의 다양한 미적 효과는 자율적인 조형 언어의 힘이다. 그 힘은 그려진 꽃병을 들어 올릴 듯한 작품 [목련 7]처럼, 대상이 단지 화폭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에 불과함을 은연중에 강조할 만큼 강력하다. 어떤 작품은 화병의 외곽선이 배경에 녹아 반투명하게 걸쳐있는 것도 있다. 전경과 더불어 작품의 주요 요소가 되는 배경에서 조형적 언어는 실재와의 연결고리를 잃고 배회한다. 본래 조형적 언어는 신적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과 더불어 창조의 본질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뒤프레는 언어와 자연이 하나의 신적 창조세계를 구성하는 상호보완적인 두 부분으로서, 각자는 상대방에게 내재한 의미들을 드러내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연과 언어 사이의 이러한 연결, 다시 말해 실재와 상징화 사이의 이 연결은 서서히 와해된다. 이후 언어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투명한 기호로 축소되었다. 과학 기술이 영향력이 보다 보편화됨에 따라, 언어는 주어진 실재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이전의 상징세계가 자연과 언어를 분리시키지 않은 반면, 이제 언어는 분리되어 인간이 가진 자연의 거울이 된 것이다. 자연의 거울이라는 비유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리얼리즘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을 거치면서 실재(신, 자연, 인간)와의 분리는 가속화되어 언어는 자기 지시적 속성을 띠게 되었다. 현대의 사상은 객관적 실재와 구별되는 언어의 자율성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현대의 예술작품이 어떤 연관관계도 확증할 수 없는 기표의 더미를 쏟아내곤 한다. 무정부주의적 기표가 지배하는 현대에, 존재는 형이상학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박철환의 작품에서 전경의 완벽한 사실주의와 배경의 불확실성의 공존은 존재의 확신에 생긴 균열이다. 구상과 추상의 공존은 실재와 언어와의 분리에 대한 증거이자, 유기적 통합에 대한 희망을 예시한다. 복귀해야할 실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종교 또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다. 종교는 관념적이지만 객관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을 수없이 덧그리고 지우는 과정에서, 최종적인 효과는 처음부터 계획되어지는 것이기보다는 관객이 나름대로 엮어갈 수 있는 우연적 조합에 의지한다. 배경은 특별한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텅 비어 있거나 꽉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물질 운동의 배경이 될 뿐인 텅 빈 공간은 근대 과학의 산물이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공간이라는 사고의 시작을 알린 뉴턴에게, 신이 부여한 자연 법칙이 펼쳐지는 중립적인 영역이라는 비유가 남아있었다면, 그 이후의 과학사는 ‘성스러운 질서’에서 질서만을 남겨놓으려 했다.

동일한 코드로 가득 채워져 있는 하이퍼 리얼리즘 식의 방법은 방향을 잃은 물질문명의 산물이다. 텅 빔과 꽉 채워져 있음은 반대라기보다는 상호적인 인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르네상스의 화가 알베르티가 강조하듯이 회화는 자연을 모방해야 하며, 특히 자연의 창조적 역할을 모방해야 한다. 이러한 미학에서 자연 자신이 수행하는 일인 창조와 화가의 작업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자연 모방은 화가의 위상을 단순한 복사자로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에 다시 놓는다. 그것은 르네상스에 확립된 원근법이 예시하듯이, 인간 주체가 스스로 정한 형태를 우주에 부여하고 구성한다는 것이다. 뒤프레는 그 주체가 새로운 상징적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원근법은 바라보는 자의 눈, 즉 새로운 예술세계의 창조적 기원인 사람의 눈에서 시작된다. 인간 자신이 직접 선택한 장소로부터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근대적 주체가 탄생했지만, 그 부정적 결과물인 현대의 주관주의는 마음의 능동적인 힘을 일방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종교는 자신을 보다 높은 실재에게 굴복시킬 것을 요구한다. 박철환의 작품에서 보이는 전경과 배경과 사이에 놓인 균열과 연결에는 예술의 능동적인 역할과 종교의 본질적인 수동성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구축된 상징적 우주는 보이는 것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초월적 실재를 예시하고 있다.

출전 | 미술과 비평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