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들어가기’라는 부제를 가진 김홍석의 전시는 ‘밖’을 나가는 곳이 아니라, 들어가는 곳으로 설정한다. 바깥은 안과 달리, 타자의 공간이다. ‘밖’과 ‘들어가기’를 연결시킨 어긋난 어법을 통해서 작가는 타자와의 만남을 내밀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예술의 목적이 본래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나 조각, 설치, 동영상 작품에 나타난 탈북자, 장애우, 성적 소수자, 간첩, 외국인 노동자, 창녀 등으로 대변되는 타자와의 만남이 과연 내밀했는가의 문제는 남아있다. 내밀한 만남이 아닐 경우, 작품의 본질과 겉도는 흥미로운 장식거리, 즉 소재주의에 빠지게 된다. 오늘날 그런 류의 흥미로운 이야기 꺼리는 매 순간 갱신되는 인터넷 웹페이지의 선정적이고 엽기적인 사건들에 잘 나타난다. 거기에서는 최악의 재난도 일시적인 흥밋거리로 소비된다. 직간접적인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유통시키는 대중매체가 강력한 동일성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한편 현대미술은 소수의 것이다. 번듯한 미술관과 미술대학이 적지 않게 존재하지만, 단순한 교양이나 정보, 투자, 장식 등을 넘어서 미술을 진하게 향유하는 이들이 소수라는 것이다. 예술가들도 소수자이고 타자이다. 타자들이 사회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취약 계층’으로 숭고한 희생자이든, 돈이나 밝히는 야비한 속물들이건 간에 말이다.

소수자가 말 그대로 소수라면 큰 의미가 없다. 무한경쟁의 사회는 소수자를 단번에 다수로 만들 수 있다. 소수자의 개별적인 문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홍석은 작품을 통해 호출한 소수자들과 과연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었을까. 차라리 그들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친구’라고 지칭된 후덕한 인상의 여성과 달리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이들로 보인다. 친구와 일당을 지급하는 관계를 맺지는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토끼 가면을 쓰고 연기한 북한 노동자에게 시간당 5천원을, 동티모르 노동자 역을 연기했던 사람에게는 20만원을, 3시간 동안 초대되었다는 창녀에게는 60만원을 지급했다고 영어로 병기된 텍스트 안에 써놓았다. 가장 가격대가 쌘 창녀 찾기 퍼포먼스를 완성시킨 행운의 관객에겐 무려 120만원을 지급한다고 공언한다. 다양한 소수자들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꼭 필요했던 외국인 노동자 인터뷰는 가짜였다. 전시 이후 물의를 일으켰던 창녀 찾기 퍼포먼스 역시 픽션이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에 진짜였다면 잔인한 블랙코메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빈 가방 하나가 달랑 걸려 있는 창녀 찾기 퍼포먼스의 증거물은 이 ‘작품’의 진위 여부를 미궁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찜찜함을 남긴다.
출전 | 월간미술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