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옥주의 [지혜의 문]과 김주연의 [Metamorphosis]는 단단한 무기물인 쇠와 부드러운 유기물인 식물이라는 소재를 다룬다. 거기에는 녹슨 쇳덩어리들과 파릇하게 돋은 새싹들, 그리고 건조함과 축축함의 대조가 있다. [지혜의 문]은 두꺼운 쇠판을 종이 오리듯이 잘라 구부려 만든 기하학적 다양체를 보여주고, [Metamorphosis]는 두터운 신문지 더미를 장방형의 건물처럼 쌓아놓고 물을 적셔 씨를 발아시킨 작품이다. 신옥주의 판 오리기와 구부리기라는 기본적인 방법론은 무한대의 변주를 보여주며, 김주연의 작품은 신문지와 판자라는 불활성의 판으로부터 발생된 생명체 특유의 활기가 있다. 이 둘은 평면으로부터 출발하는 선적인 모험을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목으로 친다면 물리학과 생물학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신옥주는 비슷한 방법론으로 제작되어 계열을 이루는 것들을 바닥에 죽 펼쳐 놓은 작품이 많았으며, 김주연은 건축적 스케일의 단일한 괴체 표면에서 바글거리는 생명의 굴곡들을 대면하게 한다.





철판을 일정한 폭으로 잘라 선들을 뽑아 여러 방향과 각도로 휘게 하는 신옥주의 작품은 사용된 철판의 두께에 따라 음악적인 경쾌함과 장중한 기념비성을 오고간다. 얇은 철판으로 만든 모형을 따라 7cm 두께의 철판을 잘라 열을 가해 형태를 만든다. 바닥으로부터 들려진 후 건축 구조물처럼, 필획처럼, 연기처럼 뻗어가는 모습은 둔중한 덩어리의 질곡을 벗어난 자유로움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조각은 쇠라는 물질의 성질과 중력이 함께 작용해야 하므로 물리적인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작업은 예술적 관념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기 보다는 물리적 한계와의 싸움, 또는 대화이고 순리적으로 풀어가야 하는 과정이다. 또한 작가는 풀이나 곤충, 인체의 제스처를 염두에 두면서, 선적인 유희가 임의적이고 무의미한 장식으로 전락할 위험을 견제한다. 바닥 위에 균형을 잡고 제대로 서 있는 유의미한 형태여야 한다는 점에서, 내용과 형식의 객관성을 담보하고자 한다. 그러나 객관성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작업 과정을 통해 하나씩 찾아내야하는 것이다.

작업 초창기부터 일관적으로 붙여온 작품 제목인 [지혜의 문]은 여러 단계와 차원을 거쳐야 하는 입문적인 과정을 예시한다. 문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면서도 연결시킨다. 문지방 넘어서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리라는 예감은 중복되지 않는 무한히 다양한 형태의 문을 통해 예시된다. 신옥주의 문은 이리저리 꼬여 있어 쉽게 통과할 수 없다. ‘지혜의 문’을 통과하려는 자는 그 스스로가 변화해야 건너 갈 수 있을 것이다. 문이 가지는 전환과 초월이라는 상징은 문과 주체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선만 그어 진채 바닥에 붙어 있는 잠재적인 문의 형태부터 도대체 어디서 시작 되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것 까지 여러 단계의 것들이 구현되어 있다. 그것들은 지혜의 문이자 지각의 문이기도 해서, 이 문턱들을 넘으면 실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판을 다양한 형태로 분화시키는 방식을 통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며 영구적인 속성을 갖는 물질의 관념을 변화시킨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분화되지 않는 존속이라는 물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과, 이렇게 이해된 실체를 궁극적인 현실로 간주하는 것은 다원적 실재를 부정한다고 말한다. 신옥주의 조각은 물질적 덩어리로 남는 것이 아니라 연장적 연속체를 이룬다. 그것은 무한한 가분성과 끝없는 연장, 즉 공간과 시간의 연장성extensiveness을 내포한다. 판은 잘려지고 구부러지면서 다양한 내적 관계를 이룬다. 바닥상태의 정태적인 물질은 유동적인 구조로 변환한다. 이러한 변환을 거쳐 물질은 유기체적인 에너지를 담보하게 된다. 변화된 차원은 공간을 단순히 공허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 내부로 끌어들이고, 작품을 역동적인 장(場)으로 만든다. 장으로서의 작품은 공간을 절대적인 틀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그것들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공간감을 가지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이 예시하듯, 공간 자체가 물질에 의해 형태가 만들어진 조직이기 때문에, 물질의 분포가 변화하면 공간의 외형도 변한다. 신옥주의 작품에서 공간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조각적인 드라마의 적극적인 참여자로 바뀐다. 그것은 물리적 공간만을 상정하는 닫힌 체계가 아니라, 가능한 공간이 내포된 열린 체계가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닮았거나 재현하거나 추상화 한 것이 아니라, 변환시키는 것이다. 변환은 하나의 고정된 중심 아니라 가장자리로부터 시작된다. 판의 가장자리는 오리기와 구부리기라는 작가의 기본적인 방법이 구현되는 장소이다. 판에서 들려나온 선은 스스로 뿐만 아니라 주위의 공간 구조를 강하게 변형시킨다. 3차원의 평탄한 장소가 시간의 두께를 갖는 4차원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여러 키 높이를 가지며 자유롭게 서있는 금속 구조물은 조각이 가지는 단단한 덩어리를 초월하여, 여러 시공간을 역동적으로 가로지르는 다차원의 문턱이 되고 있다.




김주연의 [Metamorphosis]는 생명의 발생에서 보이는 극적인 변모의 과정을 작품에 끌어들인다. 신록의 계절에 방문한 전시장에도 식물이 번성하고 있었으며, 비닐하우스나 배양실에서와 같은 열기와 눅눅함이 느껴졌다.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끼워 넣은 나무판들 사이로 켜켜이 쌓인 젖은 신문지 더미들에서 돋아나는 싹들이 바글바글하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높이의 장방형 배양기에서 자라는 중인 식물들은 표면을 가득 뒤덮은 미생물같이 꼬물거리는 느낌을 준다. 신문지는 위로 올라 갈수록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수분이 중력의 영향으로 아래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배양기의 역할을 하는 장방형 덩어리 가 흙부터 인공물에 이르는 여러 단계를 구현하고 있으며, 그 위에 가득 붙은 생명체들의 밀도 차이를 만들어낸다. 빛을 향한 식물의 성질 때문에, 표면 위에 붙은 것들은 위를 향하려는 강한 의지와 움직임이 존재한다.

몇 년 전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린 전시에서 김주연은 하얀 드레스 위에 식물들을 배양했는데, 이번에는 배양기가 장방형 구조물로 바뀌었다. 전자가 생명과 여성의 비유가 있었다면, 후자는 포괄적인 문명이라는 지평으로 확대된다. 장방형의 구조물은 자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인공적인 형태이다. 장방형 구조를 이루는 축적된 인쇄물은 문명의 흔적이 기록된 매체이다. 그 위에 가득 붙은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징그러운 질감은, 인류가 모두 사라진 후 남겨진 인공물을 잠식할 것으로 예상되는 식물들의 번성을 그린 묵시론적 시나리오를 떠오르게 한다. 배양기가 되고 있는 접혀있는 신문지처럼 생명체 역시 주름의 접힘과 펼침의 연쇄에 의해 발아하고 성장한다. 들뢰즈는 [주름]에서 접지술, 즉 종이 접는 기술은 물질의 과학을 위한 모델이라고 말한다. 이로부터 이미 물질과 생명, 유기체 간의 친화성을 예감케 한다. 신문지 배양기에 뿌려진 씨앗은 지층의 습곡같은 계층적 분할과 함입의 운동을 통해 자라난다. 씨는 여러 겹의 막에 의해 감싸여 있다. 겹겹의 막들로 둘러싸인 씨앗은 때가 되면 자신의 고유한 부분들을 펼치도록 호출된다.

그리고 하나의 유기체가 죽었을 때 이 유기체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말아 넣어지고 다시 접히게 된다. 김주연의 [Metamorphosis]는 생명체의 형태학으로, 신옥주의 작품과 달리 차원의 변화라기보다는 변태와 관련된다. 변태는 씨앗 안에 접혀 있다가 스스로 이질적인 형태로 펼쳐지는 것을 말한다. 김주연의 작품에서 신문지 더미라는 물질적 주름을 배양기 삼아 유기체적 주름이 펼쳐진다. 씨앗에는 유기체의 전개와 더불어 변형되면서 무엇인가를 형성하는 내부의 주름이 있다. 이 힘이 덩어리를 유기체로 조직한다. 유기체는 ‘원초적인 주름, 접힌 것, 접기’(들뢰즈)이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단백질이나 유전자 따위의 분자적인 차원도 마찬가지이다. 차이를 발생시키는 접힘과 펼침의 운동은 존재의 분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유기체적 주름은 고른 표면에서 출발하는데, 분화되지 않은 이 밑바탕으로부터 이와 유사하지 않은 유기체와 기관들이 출현한다. 전개는 성장이나 증가에 의해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분화에 의해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나아간다. 신옥주와 김주연의 작품이 출발하는 곳은 하나의 판이다. 이 판은 자연과 예술을 비롯한 만물의 존재 기반이 되며, 그것이 어떻게 접혀지고 펼쳐지는가에 따라, 요컨대 그 정도와 방식에 따라 무한한 차이와 다양함을 생성한다.

출전 | 아트 인 컬처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