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태의 회화


춤추는 상자, 집과 일상성의 표현




춤추는 상자, 이는 김봉태의 근작을 지지하는 주제이다. 물론 상자가 춤을 춘다는 표현은 비유적으로 사용된 말이다. 일상 속에는 온갖 형태의 상자들이 있고 그 상자의 기본형은 하나같이 네모다. 심지어 현대인의 일상을 네모에 빗댄 노래마저도 있을 정도이다. 집도 네모고, 학교도 네모고, 사무실도 네모다. 테이블도 네모고, 가방도 네모고, 길마저도 예전의 구불구불한 모습을 잃고 네모다. 네모와 네모를 구조화한 상자의 도형은 현대인에게 피할 수 없는 삶의 환경이며, 그 자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를 대변해주는 아이콘이다. 작가는 네모난 상자들로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발견하고,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낸다. 따라서 춤추는 상자란 다름 아닌 집이며, 그 속에서의 온갖 크고 작은 삶의 서사들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허나, 외관상으론 네모와 상자를 기본형으로 해서 이를 다양한 형태로 변주한 작가의 그림은 순수한 형식논리, 이를테면 색면추상과 기하학적 형태의 변주에 의해 추동되는 모더니즘 회화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논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실제의 삶과는 단절된 채 그 자체만의 논리(이를테면 예술의 자율성과 같은)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추상적 형식을 추상의 진정한 의미 즉 실제가 추상화한 것으로서, 그 이면에 삶의 실제가 고스란히 녹아든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추상적 형식 속에는 삶의 실제와 사사로운 서사가 담겨지게 된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모더니즘 서사의 형식논리를 견지하면서도, 이를 삶의 비유적 표현과 연결시킴으로써 그 외연을 확장시킨다. 이로써 인간적 추상, 인간화된 추상, 인간의 생리를 닮은 추상(이를테면 사람처럼 춤을 추는 상자와 같은)이 가능해진다.





이런 유기적 추상(삶의 실제를 연상시키거나 그 생리를 닮은 추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전작을 간략하게 스케치할 필요가 있다. 전작에서의 형식적인 성과나 의미내용이 근작에 상당정도 함축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주요 인문학적 배경은 미국체류시절 형성된 것이다. 당시 현지의 지배적 경향성인 뉴욕색면화파의 색면추상과 자연사박물관에서의 원주민 미술에서의 기하학적 형식이 작가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니까 모더니즘 회화의 정점이랄 수 있는 미니멀리즘 형식과 원시미술의 주술성이 합치되고, 고대와 현대를 한몫에 만난 것이다.

그리고 색채와 관련해서는 동양의 전통적인 색채관념을 반영한 오방색에 대한 공감이 엿보이는데, 주지하다시피 오방색은 사방과 가운데를 상징하는 방위색으로서 사실상 세계를, 우주 자체를 지시한다. 이처럼 작가는 진작부터 형식논리를 형식논리 자체로만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이면에 의미내용(이를테면 주술성과 우주적 비전)이 함축된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형식으로 이해하는데 체질적으로 더 익숙했던 것 같다. 이렇게 김봉태의 그림에는 고대와 현대,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 합치되는, 이른바 차이 나는 것들을 한데 아우르는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인식(요새말로는 탈경계의 인식)이 인문학적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의미론적인 면에서 작가는 서양의 분석적 태도와는 비교되는 동양의 종합적이고 암시적인 이해방식을 그 근간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는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한사상과 이를 정론화한 드나름 사상으로 현상한다. 한사상이란 하나(一), 많은(多), 큰(大), 밝은(明), 흰(白) 등의 외관상 이질적인 의미들이 그 이면에서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다고 보는, 즉 상보적 개념으로 보는 입장으로서, 온갖 차이 나는 것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무한한 포용력에 바탕을 둔 동양사상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 한사상이 작가의 그림에서 전통적인 도상 중 하나인 팔괘를 차용하고 변주한 이른바 <비시원> 연작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한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이를 정교하게 다듬은 드나름 사상은 들어오고 나가는 것, 안과 밖, 겉과 속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혹은 서로 통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 자체 경계와 탈경계에 대한 인식과도 통하는 이러한 입장은 정작 오랜 미국 체류시절을 마감하고 귀국한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창문> 연작에서 본격적으로 개화된다. 사실 창문은 이중적이다.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볼 수 있는가 하면, 안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세계를 이해하는 주체의 관점을 반영하는가 하면, 주체의 자기반성적 성찰을 엿보게도 해준다.

창문으로 대변되는 경계는 그렇게 뚜렷하지가 않다. 더욱이 이를 통해 보이는 일루전(그것이 외계의 풍경이든 내면의 심연이든)을 실체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것은 전적으로 마음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호한 경계, 애매한 경계, 불투명한 경계에 대한 인식은 결코 비논리적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이분법과 정체성의 논리(그 자체 차이의 논리와 비교되는)에 바탕을 둔 모든 결정적인 경계를 허물고 재편하게 해주는 초(超)논리적 사유방식이며, 적극적이고 대안적인 실천논리이다. 이로써 모든 존재와 특히 개념은 경계의 이쪽 아니면 저쪽이 아닌, 경계 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유동적이고 유기적인 경계에 대한 인식 탓에 그림에서의 창문은 바깥쪽을 향한 것 같기도 하고, 그 안쪽을 향한 것 같기도 하다. 여차하면 창틀을 빠져나와 그 일루전이 유래하는 하늘로, 아니면 작가의 내면으로 되돌려질 것 같은 역동성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김봉태의 근작인 춤추는 상자는 이처럼 그 이면에서 전작에서의 여타의 특징들, 이를테면 <창문> 연작에서의 형식적인 요소들과, 이를 지지하고 있는 한사상(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인식에 바탕을 둔)과 드나름 사상(탈경계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둔)이 변주되고 강화된 형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상자의 접히고 펼쳐진 모습(마치 전개도인 양)을 다양한 형태로 변주해내고 있는 이 일련의 그림들은 이처럼 전작과의 영향관계를 상당정도 유지하고 있으나, 형식적인 면에서는 전작과 사뭇 달라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 자체 반투명 소재인 플렉시글라스를 화면에 도입한 것이 전작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플렉시글라스의 표면과 이면에 서로 어긋나게 색면을 그려 넣는가 하면, 때로는 색면으로 더러는 선으로 상자가 접혀진 모양을 찾아내고 재구성한다. 이렇게 그려진 화면을 아크릴 박스로 덧씌워 마감하는데, 이때 빛을 그 이면에까지 투과하는 플렉시글라스의 반투명성으로 인해 마치 입체로 된 실제의 상자를 보는 것 같은 일루전으로써 그 실체감을 강화시켜준다. 비록 평면에 대한 시지각적 현상에 지나지 않지만, 3차원의 입체영상을 보는 것 같은 실물감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투명성도 그렇지만, 특히 색채가 더 은은하고 부드럽고 유기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를테면 전작에서는 원색대비가 뚜렷한 편이었다면, 근작에서는 파스텔톤의 중간색상이 주조색을 이룬다. 이로부터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단순한 시지각적 현상을 넘어 촉각적인 성질마저 자아낸다. 부드럽다는 것은 분명 시각적 현상보다는 촉각적 성질에 가깝다. 여성주의에서는 촉각적 성질을 여성적 이미지와 동일시하고 있는데(시각적 이미지를 남성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과 비교되는), 이렇게 작가의 내면에 깃든 아니마(여성적 감수성)가 무의식적으로 발현한 것은 아닌가 싶다. 특히 흰색과 플렉시글라스의 결합은 흡사 우윳빛과 그 질감을 연상시키며, 이로부터 느껴지는 우호적이고 유기적인 느낌이 아니마의 존재를 재확인시켜준다.

그런가하면 이처럼 그 이면에 빛을 머금은 색채에 대한 감각적 인식은 전통적인 미의식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발이나 주렴을 통해 한차례 걸러진 사물을 관상하는, 이를 통해 사물의 보다 풍부한 결을 즐긴 조상들의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의식은 물론 그 자체 김봉태의 작업을 관통하는 경계 혹은 탈경계에 대한 인식과도 통하는 것이다.

작가는 상자를 모티브로 해서, 이를 평면작업으로 그리고 때론 조각으로 형상화하는데, 특히 조각의 경우 <춤추는 상자>라는 주제 혹은 제목이 암시하는 유기(체)적 성질을 더 직접적으로 환기시켜준다. 실제로 다양한 춤사위를 구현해놓은 것 같은 인상인데, 아마도 입체(사방에서 관상하게 한 환조 형식의)가 주는 묘미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춤을 추는 사람의 유기적인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의인화된 형상이 전위극의 한 형식인 사물극을 보는 듯하다.

상자를 모티브로 한 김봉태의 작업은 평면이든 조각이든 어슷비슷하면서도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마치 우리네 삶의 모습이 어슷비슷한 모양의 집과 더불어 어슷비슷한 삶의 행태를 영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 다른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그 속에 차이를 내재한 반복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작가는 상자와 집을 동일시하는 한편, 이를 심플한 화면구성과 부드럽고 우호적인 표면질감으로 담아내고 있다. 상자 같은 집에서 일어나는 삶의 서사를 조망하는 작가의 시선에서 삶에 대한 애정과 긍정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