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추상회화; 1958-2008전 공간과 물성 (서울시립미술관)
공간과 물성
이제는 전설이 돼버린 말이지만, 한국현대미술은 미군의 군홧발에 묻어서 들어왔다고들 한다. 이는 1950년대 당시 일본의 미술수첩과 미군의 라이프지에 소개된 유럽의 앵포르멜과 그 미국식 버전인 추상표현주의가 한국현대미술의 태생적 배경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빗댄 표현이다.
이 전시에 초대된 상당수의 작가들이 화력을 시작하는 초기에 이런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와의 영향관계를 수용했던 편이다. 유럽에서의 앵포르멜이 전후의 피폐해진 시대적 상황을 반영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와 유사한 배경 위에서 그 심리적 정황을 비정형의 형식에 담아냈는가 하면, 이로부터 나름의 독자적 형식을 추상해낸 것이다. 흔히 뜨거운 서정추상으로 범주화되는 이 경향은 그룹 악튀엘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차가운 기하추상으로 정의되는 또 다른 경향이 그룹 오리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요샛말로 주정주의와 주지주의의 두 경향이 각각 앵포르멜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서 현상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반성의 결과가 1970년대 모노크롬 회화의 경향으로 나타났다. 주지하다시피 모노크롬 회화는 사물현상 자체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모노파와 연관돼 있으며, 그리고 최소한의 형식요소에 천착한다는 점에서는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중첩된다. 서구 모더니즘의 형식논리와 동양의 미학에 연유한 관조의 정신세계(스스로 존재하고 드러나는 사물현상을 관상하는 어떤 경지)가 모노크롬 회화 속에 어우러져든 것이다.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한다면, 이렇듯 1950, 60년대의 앵포르멜 경향과 1970년대의 모노크롬 경향이 한국추상회화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이후의 추상회화의 다양한 경향들은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로부터의 일정한 변용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참여 작가들의 면면을 통해 한국추상회화의 이러한 이력을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창섭은 1960년대 초 앵포르멜 경향의 회화로써 전후(戰後) 당시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표현했으며, 이후 점차 앵포르멜 경향으로부터 탈피해서 1970년대에는 동양적인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한지 수묵작업으로 선회했다. 화면의 가장자리에 최소한의 먹의 흔적을 남기는 등 한지에 스며드는 수묵의 번짐 효과를 통해 재료와 주체간의 상호관계성에 주목한 것이다.
1980년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종이를 이용한 독특한 조형세계를 전개해오고 있다. 그러니까 한지의 원료인 닥 섬유질 자체의 물성에 주목하고 이를 극대화하는 작업을 통해 소위 그리지 않는 그림을 예시한 것이다. 물에 푼 닥을 손으로 건져내 이를 캔버스 위에 편평하게 편 다음, 이를 롤러 등의 도구로써 두드리거나 압착시키는 일련의 반복 과정을 거친 이 작업은 작가의 행위와 닥의 물성이 합치되는, 행위와 물질이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실현한 것이다.

박서보는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당시 앵포르멜 운동을 표방한 현대미술협회와 악튀엘을 주도하는 한편, 1970년대 모노크롬 회화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자리매김 된다. 작가의 작업 시기는 대략 제1기 원형질 시대(1959-63, 실존주의 시각에 입각한 앵포르멜 추상 경향), 제2기 유전질 시대(1964-66, 기하학적 경향의 구체미술), 제3기 묘법 시기(1967년부터 현재에 이르는)로 구별된다. 또한 묘법 시리즈는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의 드로잉의 경향성이 현저한 시기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한지의 물성을 이용한 후기 묘법 시기로 나뉜다.
작가의 대표적 경향인 묘법 시리즈는 단색조의 유화물감을 칠한 캔버스에 연필로 반복 드로잉 한 것으로서, 반복구조와 이에 따른 표면요철효과를 보여주며, 모더니즘 서사에 바탕을 둔 환원주의 논리와 반복과정에서의 관조적인 느낌이 인상적이다. 외관상의 반복구조는 사실 그 이면에 일정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으며,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거나 의미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존재감(즉물성 혹은 현존성)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하종현은 1960년대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으로 화단에 등단한 이후, 1960년대 말에는 구성적이고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전환한다. 이와 함께 1970년대 초반에는 당시 전위그룹운동을 표방한 AG 그룹에 가담하면서 철사나 마대 등 오브제를 이용한 형식실험에 천착하는 한편, 당시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전개와 정착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물감과 마대 천을 재료로 해서, 그 물질적 특성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한 접합 연작을 지속해오고 있다. 마대와 물감이라는 두 물질의 만남을 접합이라는 주제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이는 그 자체 한국 모노크롬 미술에서의 평면성의 자각을 엿보게 한다.
부연하면, 올이 굵고 망이 성긴 마대나 아사 천 뒤쪽에 물감을 바르고, 그 망 사이를 통해 천의 표면 위로 물감을 밀어내는 식이다. 그렇게 표면으로 비어져 나온 물감을 다시 앞면에서 나이프나 흙손 그리고 주걱 등의 도구를 사용해 긁어냄으로써 비정형의 자국을 만든다. 마대와 물감, 그리고 물감을 밀어내고 긁어내는 물리적인 과정이 어우러진 접합 연작은 전통적인 회화보다는 물감과 마대가 일체화된 오브제를 환기시킨다. 이로써 그림을 그린다는 회화적 행위를 거부하는 한편,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의 상태나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서의 화면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윤명로의 회화적 이력은 대략 1960년대의 문신 시리즈, 1970년대의 균열 시리즈, 1980년대의 얼레짓 시리즈, 1990년대의 익명의 땅 시리즈, 그리고 2000년대의 겸재 예찬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 가운데 초창기의 문신 시리즈는 당시의 앵포르멜의 경향성과 일맥상통한 것으로서, 존재의 원형질이랄 만한 응축된 에너지가 내부로부터 외부로 분출한 듯한 격정적인 파토스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후의 작품은 대체로 선(線)의 경영에 힘입은 드로잉적인 화면으로서 회화효과를 극대화하는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격정과 절제를 넘나들며 선을 매개로 한 회화효과를 다변화하는 일에 진력해온 것인데, 이는 다분히 재현적이거나 이념적인 논리 대신 회화 자체의 내적 논리에 의해 추동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이 이처럼 회화 자체의 속성과 화면의 내재율에 의해 견인되는 만큼 화면과 작가와의 거리 또한 그만큼 밀착돼 있다. 이로 인해 분방한 붓질과 행위의 흔적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화면에서는 화면과 작가와의 사이에서 긴밀하게 교환되고 작용되어졌을 비가시적인 그 무엇이 감지되는데, 작가는 이를 호흡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회화적 행위란 다름 아닌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원리, 생명, 리듬을 아우르는 이 비가시적인 호흡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는 이 호흡의 원형을 아니마에서 찾는데, 일명 아니마 시리즈를 통해 현저하게 동양적인 사유를 암시하는 특유의 회화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반은 평면작업 팽창 시리즈에서 땅을 주제화한다. 땅의 표면에 나 있는 무수한 자잘한 크랙들이 상처처럼 또는 숨구멍처럼 보이는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땅이 마치 인체처럼 생명을 획득한 듯 보인다.
생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면면히 흐르는 이러한 땅에의 인식은 이후 DMZ(비무장지대)을 주제화한 일련의 설치작업과 행위예술의 바탕이 된다. DMZ을 단순한 정치적인 논리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그 속에 생명이 내장된 인체로서, 또는 온전한 인체를 동강낸 폭력의 계기로서, 그리고 이와 함께 그 상처를 복원해줄 치유의 계기로서 본다. 이는 DMZ을 소재로 한 여타의 평면작업들에도 그대로 확장 적용되고 있다. 여기서 인체는 춤사위와 함께 일종의 기념비적인 인상을 불러일으키며, 동강난 땅덩어리와 그 폭력의 흔적을 상기시키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치유하고 복원하는 주술적인 제스처를 암시한다. DMZ으로 동강난 인체를 부여안고 이를 이어 붙이려는 한판 굿판을 벌이는 한편, 이로써 생명과 생태를 화두로 한 실천논리의 사례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문자는 자연, 접목, 광야 시리즈로써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자유분방한 붓질과 드로잉이 중첩된 유기적인 화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나뭇잎과 같은 자연 소재가 암시되기도 하는데, 구상적인 요소와 추상적인 프로세스가 날실과 씨실처럼 긴밀하게 직조돼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그리는 과정과 함께 화면에 종이를 콜라주 하는 등의 비정형의 화면효과를 꾀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일종의 서정추상으로 범주화할 만한 이 일련의 그림들은 주정주의의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주정주의는 내면적인 파토스를 직접적으로 분출한 듯한 경향성을 띠며(그 자체 논리적인 프로세스에 바탕을 둔 주지주의 경향성과 비교되는), 이로부터 내적 에너지의 분방한 표출과 함께 일종의 생체리듬과 이에 따른 즉흥성과 우연성의 계기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 느껴진다. 이로써 작가는 자연의 감각적 형상에의 닮은꼴과는 비교되는 그 이면의 자연성, 즉 자연의 본질로 부를만한 어떤 경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한영섭의 작업은 전통적인 탁본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마른 옥수숫대나 들깨줄기다발을 바닥에 뉘여 놓고 발로 지그시 밟아 으깨는데, 그 강한 조직을 부드럽게 만듦으로써 유기적인 선을 얻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위에 한지를 덮고 솔에 먹물을 찍어 한지의 표면을 두드리거나 문지른다. 이때 바탕재로 차용된 들깨줄기다발의 밀도감이나 한지의 결과 조직, 그리고 먹의 농담이나 솔에 가해지는 힘 여하에 따라 다양한 질감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그리고 더 두껍고 그 표면이 우둘투둘한 요철지 위에다 이렇게 얻어진 이미지의 화면을 뒤집어 붙인다. 이는 옥수숫대나 들깨 등의 자연물과 종이가 직접 맞닿은 면의 표면으로써 자연의 체취를 실감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지 고유의 투과성으로 인해 한차례 걸러진 먹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를 겹겹이 중첩시킨 연후에, 최종적으로 한지 조각들을 이용해 조율함으로써 전체 화면의 조화를 일궈낸다.
이렇게 화면은 무분별한 선들의 집적과 그 결을 보여주며, 온갖 비정형의 얼룩과 스크래치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분방한 드로잉을 연상시킨다. 더불어 평면성을 강조한다든가 한지의 물성을 극대화한 것에서는 모더니즘의 형식논리가 연상되지만, 작가의 작업은 그 형식논리를 아우르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고 있다. 마치 일일이 붓으로 그린 것 같은 그의 그림은 말하자면 유기적인 선들의 유희에 힘입어 일종의 자연율을, 자연의 내적 질서를, 자연의 형성원리를 암시하는가 하면, 순수한 인식이나 관성적인 감각 저편의 자연의 본성과 대면케 한다.
함섭은 1960년대 후반 그룹 오리진의 멤버로 참여해서 일종의 기하추상으로 범주화할 만한 일련의 그림들을 선보였다. 이후 198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한지의 조형화로 정의할 만한 일관된 작업에 진력해오고 있다. 한지의 원료인 닥이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두터운 닥종이를 재료로 사용하는 그의 작업은 물에 적신 색 한지나 고서 조각을 중첩시키고, 뜯어 붙이고, 솔로 두드리고, 짓이겨서 다채로운 형태와 색채와 질감을 보여준다. 한지 자체의 형태나 바탕을 완전히 해체하고 이를 캔버스에 다시 조형화한 것이다.
닥에 의해 조성된 비정형의 굴곡이나 주름이 때로는 실재하는 어떤 형상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아마도 한지 조형작가들 가운데 닥의 원형 그대로를 가장 적극적으로 되살려낸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느껴진다. 그의 작업은 말하자면 한국적인 이미지, 질감, 미적 감수성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질박하면서도 부드러운, 강한 물질감이 느껴지면서도 유기적인 생명력을 암시하는 작업이 그 이면에서 어떤 근원적인 형상 내지는 형식(원형 같은 것)에 대한 일종의 조건 없는 끌림 현상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차우희는 1980년대의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회화 이후 1990년대 들어서는 더 정적이고 내면화된 오디세이 연작에 진력해오고 있다. 근작에서는 전작에서의 고대 신화적 모티브를 심화시키는 한편, 콜라주의 활용이 빈번해지고 있다. 붓질이나 드로잉과 함께 암시적인 문자 텍스트와 극성(極星)을 표시하는 등의 기호가 차용되기도 하고, 여기에 비정형의 얼룩이 어우러진 유기적인 화면이 가세한다. 나아가 오브제의 도입으로 인해 평면설치의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작가는 오디세이 연작에서 신화의 보편적인 의미를 참조하면서도 이를 개인적인 감성의 영역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오디세이 신화로부터 추상해낸 떠남과 회귀의 본능(사실상 모든 신화의 근간으로 보이는)을 보다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형태로 정제해낸 작업들로써 유목주의 담론과의 연관성을 예시해준다. 그러니까 오디세이의 배로 비유되는 내재적인 풍경화(일종의 심리지도라고 부를 만한)를 통해 자기 내면에로의 여행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흔적을 추적하고 이를 되새김질한다는 점에서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회화로도 볼 수 있다. 화면구성이 간결하면서도 시적이고 암시적이다. 마치 오랜 회벽을 보는 것 같은, 일종의 꿈의 스크린을 보는 것 같은 누적된 시간의 결이 느껴진다.
김수자는 페인팅과 함께 바느질 기법을 중첩시키는 작업에 진력해왔다. 화면 위에 추상적인 붓질과 바느질의 스티치를 병치시키는가 하면, 바느질을 드로잉의 한 형식으로 끌어들여 조형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바느질 자국이 추상적인 조형요소로 도입되었지만, 이후 점차 의자나 셔츠 등의 일상적이고 구상적인 사물들을 재현하는 것으로 변화해오고 있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그저 무의미해 보이는 비정형의 흔적을 만들기도 하고, 특정의 형상을 암시하기도 하는 바느질 자국은 그대로 자유분방한 드로잉이나 다름없다. 바느질 자국을 드로잉으로 변용한, 일명 바느질 드로잉 정도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가하면 미처 화면에 정착되지 못한 채 형상을 벗어나 나풀거리는 실밥은 흡사 페인팅에서의 화면 아래로 흘러내린 물감 자국을 연상시킨다. 이렇듯 바느질로써 드로잉과 페인팅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회화 문법을 대체하는 한편, 그 표현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회화의 형식논리와 일상사에 바탕을 둔 생활감정(바느질로 나타난)이 긴밀하게 연계된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는 일종의 여성(주의)적 감수성이 작용하고 있다.
참여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이렇듯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추상회화와는 다른 공간경험에로 우리를 유도한다. 이를테면 지체로서의 캔버스와 그 위에 얹힌 이미지의 지층이 분리되지 않는 일체화된 오브제로 나타나기도 하고(정창섭, 하종현), 반복적인 행위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이 무화되기도 한다(박서보). 행위와 호흡이 합치되고(윤명로), 회화의 흔적이 생태를 표상하는(이반) 등의 유기체적인 속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작가들은 재료 고유의 물성을 강조하는데, 이를테면 콜라주를 통해(함섭), 그리고 탁본을 통해(한영섭) 한지의 본성을 드러낸다. 더불어 추상과 형상이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 어우러진 유기적인 화면으로써 흡사 생활일기와도 같은 사사로운 감정을 담아내기도 하고(조문자), 일상사에 바탕을 둔 여성적 감수성을 반영하며(김수자), 때로는 자기 내면에로의 여행을 암시하기도 한다(차우희).
이로부터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가 접해있는 경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이를 넘어서는 변용 가능성이 엿보이며, 단순히 모노크롬 회화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 나는 인식과 이에 따른 다양한 형식의 지점들이 확인된다. 그럼으로써 순수한 추상이나 절대추상의 존재를 의심케 한다. 추상이란 실은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재현적이고 서사적인,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요소들이 최소한으로 압축되거나 걸러진 형식임을 재확인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