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안의 가면 벗으면 진짜 ‘나’는 어떤 모습일까
▲ ‘섹시미미’의 발간을 통해 국내 최초로 여장 남자의 세계를 보여준 작가 이혁발.
그는 “몸은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문이며,모든 복잡다단한 인류의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는 저장소”라고 했다.
“몸은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문이며, 모든 복잡다단한 인류의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는 저장소다.” ‘섹시미미’의 발간을 통해 국내 최초로 여장 남자의 세계를 보여준 작가 이혁발의 말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의 몸은 욕망의 주체이자 대상이 된다. 욕망하거나 욕망의 대상이 되거나 둘 다 즐거운 일이다. 행복한 살아있음의 증명이므로.”
그 어느 쪽이 됐든 과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자는 철학적 성찰이 돋보이는 발언이며, 후자는 ‘커밍아웃’이라고 할 정도로 파격적인 생의 증명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커밍아웃을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솔직히 고백한 모 연예인이나, 이태원을 비롯한 전국의 도처에 트랜스젠더 바가 존재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절대 허구가 아니다.
평균적인 사고를 지닌 우리나라의 보통 사람들이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겠으나, 이러한 보수적인 시각이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상상해 보라. 멀쩡하게 출근을 한 남편이 퇴근 후에는 여장 남자들이 모이는 카페에서 여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동호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춤을 추는 장면을. 새벽이면 그는 다시 남성의 신분으로 돌아가 올 때 입었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퇴근(?)을 한다. 그리곤 기다림에 지쳐 아침잠에 곯아떨어진 아내에게 말할 것이다. “아, 야근을 했더니 너무 피곤해.”
이혁발이 ‘섹시미미’에서 소개하는 여장 남자의 세계는 일종의 놀이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저 재미있으니까 한다는 것이다. 게임이 재미있으니까 빠져들듯이, 재미있으니까 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여장을 할까? 구스타브 칼 융의 용어를 빌리면,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 즉 ‘아니마’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에 대해 이혁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장 남자는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름다워지고, 관능적이고, 수동적이며, 의존하고 싶고, 무력해지는 욕구를 실천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온화하거나 세심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가면(persona)을 쓰고 살아간다. 그것은 마치 배우가 연기를 하듯이, 사회적 기대나 요구에 맞춰 춤을 추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춤은 진정으로 내가 즐거워서 추는 춤이 아니다. 타인의 기대나 시선을 의식한 부담스러운 춤이다. 가령 한 가정의 가장은 아내나 자녀 등 가족 구성원의 기대와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의연함, 유능함, 자립심, 남성다움 등등 가장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신경을 쓰며 정글과도 같은 사회 속에서 투쟁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러한 가면과 동일시하고픈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자기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가면은 역시 가면일 뿐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어느덧 중년이 되었을 때, 인간은 문득 가면을 벗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에는 흥미있는 이야기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어 전개된다. 그에 의하면 태초에 인간의 성(sexes)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였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이 둘이 합쳐진 것, 즉 자웅동체(androgynous)다. 그것은 손과 발이 네 개이며 하나의 머리에 두 개의 얼굴을 지닌 괴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 ‘향긋한 봄바람이 몸을 흔든다’
이 때 남자는 해의 자식이고 여자는 땅의 자식이며, 자웅동체는 달의 자식이었다. 그런데 자웅동체에게 신을 능가하는 힘이 생기면서 교만해지자 화가 난 제우스가 이를 둘로 갈라놓았고, 그 후 이렇게 해서 갈라진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 융이 말하는 남성의 여성스러움, 즉 아니마와 여성의 남성스러움, 곧 아니무스는 자웅동체 시절의 반쪽을 회구하는 소망에 다름 아니다.
남성은 강건하고 전투적인 남성성의 무의식에 잠재돼 있는 부드러운 여성적 속성을 추구하고, 여성은 온유하고 섬세한 여성성의 무의식에 가려져 있던 강인한 의지와 결단력 등 남성성을 추구할 때, 보다 완전한 인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만일 남성에게 아니마가 결여돼 있어 남성성이 승화되지 못한다면 파괴적이고 반사회적인 성향으로 치닫게 될 확률이 높다.
이혁발은 ‘섹시미미’에서 인간이 지닌 양성성에 주목하며 “우리는 결코 한 남자 혹은 한 여자를 발견할 수 없으며, 단지 남성상태, 여성상태를 발견할 뿐이다”는 바이닝거의 주장을 인용한다. 남자의 젖꼭지나 여성의 얼굴에 난 털의 흔적이 바로 모든 인간이 영구적으로 양성적 상황, 즉 양성성에 머무는 징표라는 것이다.
이혁발이 수행하는 몸의 담론은 집약하자면 소수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 즐길 수 있는 권리, 사회에 대해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도덕성을 내세우는 주류의 사회에서 절대 다수가 소수자에 해당하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등을 비주류로 몰아 게토화하려는 성의 권력에 대해 온몸을 던져 저항하는 행위다.
그는 여성으로의 변신을 통해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폭력성을 고발한다. 그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헬스클럽에서 뼈를 깎는 단련 끝에 팔등신의 완벽한 몸매를 다듬었다. 사진속의 고혹적이며 도발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그러한 훈련의 결과다.
언어가 의식을 지배한다. 몸의 언어도 언어다. 그럴진대, 이 언어는 정상이고 저 언어는 비정상이란 구분은 폭력에 다름 아니다.
그 누가 어떤 권리로, 어떤 잣대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를 것인가. 이혁발의 작업은 개인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와 간섭에 저항하는 몸의 반란이자 성의 권력에 대한 저항의 담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