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이란 힘의 우위에 의한 야만적 폭력을 떠오르게 하는 단어이기에, 문화라는 단어와의 결합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 중심의 문화에서 위협을 읽는다. 이러한 위협은 다시 부메랑이 되어 인간 스스로에게 돌아온다. 이 전시는 인간의 문화에 애초부터 내재해 있는 위험한 본성을 동물들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에서 우화적인 요소가 있다. 등장하는 동물들은 인간에 의해 착취되거나 상처받고 있으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적을 흉내 내기도 한다. 동물들은 인간의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인간이 사용하는 사물들이 결합시켜 보다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작품 [일곱 군데의 상처]처럼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곰, 작품 [사슴과 빨대]처럼 피를 인간에게 빨리기 위해 빨대가 꽂혀 있는 사슴, 작품 [신경전]처럼 자동차와 등을 대고 힘을 겨루는 상처 입은 코끼리 등이 그것이다.
조각 작품과 더불어 전시된 사진 작품들은 조각이라는 단일 품으로 말하기 복잡한 서사성이 강조된다. 사진작품들이 모두 전시부제와 같은 제목을 달고 있다는 것은, 사진작품들이 조각에 비해 주제의 서술에 있어 보다 효과적이라는 의미이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조각 작품으로 반복되기도 하며, 여러 소품과 결합하여 연극적으로 연출된다. 조각과 사진작품은 서로를 참조하면서 주제를 전달한다. 지구와 대면한 닭을 표현한 사진작품은 조각 작품 [탈출]처럼, 온난화로 뜨거워진 지구를 탈출하는 펭귄과 더불어 생태계의 위기라는 주제로 연결될 수 있다. 개구리에 날개가 붙은 사진작품은 변질된 자연이라는 주제를 가지며, 그 옆 벽면에 붙어있는 거대한 개구리 두 마리의 색깔을 불길한 것으로 전환시킨다. 조각 작품 [숲]은 현란한 색으로 칠해진, 독성 강한 개구리를 표현하며, 작품 [레인보우]에서 붉은 몸통에 무지개 색 눈알을 가진 개구리는 자연에 대한 어지러운 느낌을 전달한다.
인간이 어질러 놓은 자연의 질서에 위협당한 동물들 역시 위협적으로 대응한다. 작품 [수난시대]에서 바늘이 온통 곤두 서 있는 복어는 인간의 표정을 하고 있으며, 작품 [두 가지 기능]에서 먹물을 발사하는 오징어는 미사일 같은 무기 형태를 연상시킨다. 작품 [stop]은 상대에 대한 위협과 제압을 집약하는 거대한 권총으로 뒤에 설치되어 있는 총알과 결합하여 무분별한 자연에 대한 위협을 멈출 것을 호소한다. 금색 총알 위에 박혀 있는 지구는 하나 뿐인 지구를 무분별하게 써버리면 안된다고 말한다.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 지구는 소우주로서의 생태계를 상징하면서 효과적인 서사적 소품이 된다. 작품 [불쌍한 지구]는 지구를 들이받는 코뿔소를, 작품 [공감]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빨간 머리띠를 한 고릴라가 지구를 안고 장난치는 모습이다. 위협당한 자연은 반작용을 통해 다시 인간을 위협하지만, 대체로 자연은 인간의 처분에 맡겨진 상태이다.
작품 [느슨한 충돌]은 브론즈에 니켈로 도금한 아기 동물들로, 그들의 불투명한 미래를 상징한다. 작품 [특 A]는 금도금 된 돼지로 인간의 필요와 분류체계에 의해 물신화된 자연이다. 인간의 분류체계는 분류된 조개류와 인어공주의 경합처럼 동화적이고 친근하게 나타날 지라도 근본적으로는 위험하다는 것을 작품 제목 [위협문화]는 암시한다. 분류가 시간의 축으로 전개될 때 진화의 개념이 성립한다. 같은 제목의 사진작품에서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진화는 동물의 두개골로부터 출발하여 더 진보된 형태의 공격성을 갖춘 사이보그를 향한다. 진화의 중간적 형태를 압축하는 박쥐는 천정에 부딪힐 것 같은 위태로운 비행을 통해, 인간에 의해 잘못 접어들기 시작한 진화의 경로를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시키면서 그 스스로 대상화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대상화의 과정자체가 폭력이며, 대상화되기 않기 위해 대항적인 폭력이 필요하다.
‘위협문화’는 자연으로부터 자율성을 갖추어 가는 문명의 길이, 폭력이 꼬리를 물고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연과 문명을 대립적으로 배열하는 것은 단순한 발상일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 인간은 자연에도 속해 있고 문명에도 속해있다. 아니면 전적으로 자연적 존재도 아니고 전적으로 문명적 존재도 아니다. 자연과 인간을 겹쳐 놓는 금중기의 작품은, 자연 상태와 폭력성에 관한 근본적인 연관관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이브미쇼는 공격성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담은 책 [폭력과 정치]에서 고전적인 정치철학을 통해 자연 상태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홉스와 루소를 대조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설파한 홉스의 경우, 자연 상태에는 행동과 행동의 결과에 대한 예측 불가능의 상태이다. 이것은 경쟁과 위험이라는 총체적인 상호성을 전제로 한다.

모든 사태가 발생할 수 있고 가장 나쁜 것이 가장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여기로부터 자연 상태를 특징짓는 절대적인 불안정 상태, 즉 규범의 부재 상태가 나타난다. 루소의 경우, 자연 상태는 예측 가능성이라는 문제 자체가 설정되지 않는 상태, 즉 모든 사람은 분산되고 고립되고 사회적 관계도 윤리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예측가능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 인간이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 자연적으로 만족과 필요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상태이며, 전쟁의 조건이 없고 전쟁을 할 욕망이 없는 평화의 상태이다. 홉스의 경우 자연 상태는 절대적 폭력이며, 루소의 경우는 이런 것을 스스로 알 수 없는 공허한 평화이다. 이 두 사람의 경우 비사회적인 상태는 하나는 규칙이 없고, 다른 하나는 관계가 없다. 자연 상태는 어떠한 행동의 규칙성에도 일치하지 않는 상태, 또한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예측 가능한 규칙성에 자신을 맡길 수 없는 상태이다.
반대로 사회계약은 구체적인 집단, 주어진 상황 속에서 행동의 규칙성으로 엄격하게 자신을 나타낸다. 고전적 정치 사상가들에게 자연은 ‘예측 불가능성’(홉스)과 ‘순수한 공허’(루소)로 압축된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체계를 통해 예측 불가능성을 감소시키려 했고, 자연 역시 순수한 공허로 남아 있을 수 없을 만큼 빈틈없이 개발되고 있다. 금중기의 작품은 생태계의 위험을 경고하지만, 오늘날 생태주의자들의 주요 관점인 루소적인 의미의 자연 회귀 및 자연 예찬으로 기울어지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은 코드화를 통한 체계로의 집중이 역으로 우연적으로 발행하는 사고에 대한 위험을 극대화했음을 강조한다. 자연은 돌고 돌아서 다시 예측 불가능하게 되었고, 인간의 미래 역시 홉스적인 의미의 부정적인 자연 상태로 매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은 사회 속에 내재된 비사회적인 현상, 문명이 극복했다고 여겨지는 자연 상태의 폭력성을 들추고 있다.
물론 본래의 자연 그 자체는 폭력적이지 않다. 먹이를 사냥하는 동물의 행동을 폭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동물들은 모두 제어 메커니즘을 갖고 있으며 싸움을 하더라도, 이 메커니즘으로서 패자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종족 보존을 위한 것이다. 승자는 패자의 목숨은 살려준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러한 안전장치가 없다. 인간은 문명을 통해 대상을 이용(약탈)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무기)를 갖추었으나 그에 걸 맞는 새로운 질서에 합의하지 못했다. 도구를 갖춘 채 다시 강한 자가 승리하는 자연의 법에 복종할 때 폭력의 확대 재생산과 공멸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명에 의해 순화된 인간은 동물보다 더 나쁜 동물이 되었다. 근대주의적 이상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때부터, 이성적 합의에 의한 계약의 결과로서의 사회질서라는 이상은 모호해졌다.

애초에 사회의 질서 자체가 선한 의도나 이성이 아니라, 권력의 역학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 점차 분명해 지고 있다. 니이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신과 국가의 기원에 존재하는 폭력을 지적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가장 힘센 종족의 조상이 하나의 신으로 변형된다. 아마도 이것이 두려움으로부터의 신의 기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국가 역시 무서운 폭정으로 인정사정없이 억압하는 기계 장치로서 드러났다. 국가는 금발의 야수의 한 무리, 어떤 지배자, 정복자 종족을 일컫는 것으로 이들은 전투적 체제로 편성되어 있고 조직력을 갖추고 다수의 민중을 하나의 확고한 형태로 틀 지웠다. 선과 악, 가치판단의 기준에 이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 자체가 고통의 기억이며, 삶은 바로 권력에의 의지이며, 이는 보다 더 강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와 착취 뿐 아니라, 인간 자신을 파괴하는 능력이다. 인간사회에 대한 낙관적 전망의 철저한 부정아래, 동물성은 오히려 긍정된다.
기억에 의해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해 동물적인 망각을 내세웠고, 이것은 새로운 인간 뿐 아니라 예술가적 소양으로 높이 평가 받는다. 이러한 전망은 비관적이고 심지어는 퇴행적으로 보이는 듯도 하다. 그러나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전 지구적이며 총체적 난국은 인간성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경고한다. 변화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다소간 상식적인 생각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동물성은 야만적 폭력이 아닌,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을 촉구한다. 동물성 자체는 야만도 폭력도 아니다. 그것은 활력이다. 인간을 닮은 금중기의 동물들이 위험에 처해있고 때로 위협적이면서도 협소한 전망을 가진 문명에 적응된 인간보다 야생적 활력으로 넘치는 것은 바로 그들만의 건강성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멸의 길로 잘못 접어든 인간성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