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환상 속에서 시공간의 질서는 자유롭게 재편된다. 밤과 낮이, 사계절이, 동양과 서양이, 자연과 인공이, 대우주와 소우주가 아무 모순 없이 공존하며 서로 조응한다. 고상한 문인화에서 먹의 정신성과 민화 및 채색화의 특징인 화사한 색깔과 자유로운 구성이 결합되고, 산수화에 어울릴법한 토속적인 정자 대신에 서양 동화 속 공주와 왕자가 사는 궁전이 등장하곤 하지만, 화면은 이물감 없는 통일성을 보인다. 하나의 시점에 얽매이지 않는 동양화의 관념적인 공간은 환상 속의 낙원에 존재할 법한 이질적인 것들을 넉넉하게 품어준다. 화려하지만 부질없는 환영의 느낌을 주는 자연적 모티브는 활짝 핀 꽃, 무지개 등이며, 인공적 모티브로는 폭죽이나 루미나리에 같은 도시의 야경 등이다. 이것들은 실재성이 없는 가변적인 것으로, 작품마다 서로 다른 조합으로 짜여 지면서 환상적인 분위기와 기조를 유지한다.
홍주희의 그림에는 이러한 풍경을 향유하는 주인공이 삽입되어 있다. 주인공들은 풍경 속에 있고 관객은 풍경 밖에 있지만, 화면의 크기가 커질수록 관객들도 주인공과 같은 시점을 공유하게 된다. 입체작품은 작품 속 주인공들이 몽유의 풍경을 품은 채 3차원 현실로 뛰쳐나온 효과가 있다. 화면 속 주인공들은 보통 쌍이며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나면서 다채로운 색과 빛으로 물든 주변 환경과 구별된다. 그러나 그림 속의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실체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꿈속의 인물처럼 풍경 속에서 떠다닌다. 몸통이 없는 얼굴, 실체가 없는 실루엣들이 꿈속의 인물처럼 움직인다. 정신분석학에서 꿈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심리적, 육체적인 의미에서 꿈꾸는 이의 일부로 간주된다.
작품 [상상된 낙원]은 해변 가에 종려나무가 있는 따뜻한 남국의 이미지이다. 그 속에서 묵상하고 있는 상상의 주체가 절벽 사이에 낀 돌 머리로 나타난다. 보통 이국의 휴양지는 현실적인 낙원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그러나 작가는 그림엽서처럼 전형적인 휴양지의 이미지를 재현하기 보다는, 스케일과 차원의 변주 보여준다. 작품 [푸른 밤]은 달빛 아래 파도가 치는 여름 해변 가의 풍경이지만, 해저 식물을 지상으로 끌어내고, 일상적 경험에서는 낯선 각도인 정면의 소라를 거대한 산처럼 표현한다. 이러한 변주를 통해 야자수가 있는 오후의 해변 가는 우수와 기억에 물든 시공간으로 전환된다. 작품 [푸른 별의 아담과 이브]에서 시공간감은 거대한 항성과 푸른 색, 노란 색의 달들이 존재하는 우주적 차원으로 이동한다. 아름다운 지구별이나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미소한 존재로, 실루엣만으로 표현된다.
시공간은 매우 자유롭게 구성되지만, 밤은 몽환 성을 표현하기에 더욱 적절한 시간대이다. 작품 [빛의 풍경]은 도시의 풍경으로, 후경의 노을과 근경의 소나무 사이로 굽이치는 길이 보인다.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작품 [밤으로의 여행]은 만월을 배경으로 자전거 타는 한 쌍이 떠있는 장면으로, 순수한 동심의 시간으로의 회귀를 그린다. 작품 [밤의 무대]는 강변의 오페라 극장 위로 폭죽놀이를 하는 밤풍경이다. 검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연주자는 현실 속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할 뿐인 가상의 세계를 무대로 전치시켰다. 홍주희의 그림에서 이상향을 꿈꾸는 주체는 보통 산수화나 낭만주의 풍경화에서 그렇듯이 미소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장면 자체가 관념적인 공간이라는 특징을 통해, 주체는 다시금 비대화 된다. 작품 [화려한 활주로]는 왜소한 인간과 꿈의 화려함을 극적으로 대조시킨다. 작품 [비워진 얼굴]은 비상하는 새떼가 만드는 깊은 공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화려한 해변 풍경을 비워진 얼굴로 표현한다.
입체 작품에서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는 보다 긴밀하다. 2006년 전시에서는 실루엣으로 표현된 도자 판 안에 낭만적인 산수를 그려 넣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폴리로 뜬 입체적 구조물 위에 몽유하는 형상을 그려 넣는다. 풍경이 내부에 존재하는 형태들은 주체와 대상 간의 완전한 소통과 합일을 보여준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한 쌍으로 표현된다. 작품 [한 쌍의 사슴]은 사슴 두 마리를 붙여서 그 안에 풍경을 그리고, 뿔은 밤하늘의 별을 그려 넣었다. 작품 [한 쌍의 풍경]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남녀 한 쌍에 붙은 거대한 날개를 보여주는데 날개에는 낙원 풍경이 그려진다. 날개는 현실을 자유롭게 탈피하고 싶은 상징이며, 작품 [몽유낭만산수]에서 날개 짓과 더불어 합일하는 한 쌍의 남녀로 집약된다. 회화와 입체 작품에 등장하는 한 쌍의 존재는 현실의 모순과 갈등, 비극을 낳는 모든 분리된 것들이 합일되는 원초적인 상태에 대한 본능적 공감을 나타낸다.
기독교의 창세기를 비롯한 많은 창조신화에서 성스러움이 세속성으로 전락하는 단계는 이원적 분리를 거친다. 낙원의 회복은 존재의 통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와 객체의 화해, 만물과의 교류가 일어나는 마술적인 장소가 바로 낙원이다. 특정한 계절과 무관하게 꽃이 만발하고, 보석같은 별빛이 쏟아지며, 궁전 같은 거처가 있는 곳은 만물이 주체의 욕망에 즉각 화답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현실을 지배하는 권태로움과 가혹함이 없다. 그곳은 시간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순진무구한 유년기를, 육체적으로는 생로병사와 무관한 절정의 육체를 구가한다. 가령 작품 [푸른 별의 아담과 이브]에 나오는 남녀 한 쌍은 전락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순수성을 가진 인류를 상징한다. 낙원은 현세적 삶을 지배하는 노동과 금욕 그리고 소유가 아니라, 자연과 동화되는 향락적인 삶에 바쳐진다.

그러나 그곳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곳’(토마스 모어), 즉 유토피아이다. 그곳은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희망에 의해 구축된 장소이지만, 지금 이곳을 벗어나 떠나는 여행의 종착지는 한 장의 그림에 불과하다. 그것은 예술의 위대함이자 기만성이라 할 것이다. 산수화라는 기본형식은 자연에 투사된 이상향으로 서구의 낭만주의적 세계관과도 상통한다. 그것은 구속 없는 자유와 자연과의 조우를 의미하며, 작가는 근대 시대에 발생했던 낭만주의적 정서와 산수화의 관념성을 뒤섞는다. 예술은 이 세상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을 구현하는 주요한 매체이다. 낭만주의 이후 예술의 유토피아적 성격은 ‘부정의 변증법’(아도르노)을 통해 화해의 가상을 단호히 거부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예술은 질곡의 현실을 부정하지만, 이러한 부정 속에서 어떤 가능성의 빛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이다.
아도르노는 완결된 사회라는 이상은 완결된 예술작품이란 이상처럼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자율적인 예술, 즉 진정으로 새로운 예술의 형식의 해방 속에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해방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피안에 대한 알레고리, 진정한 행복에의 약속, 사회변혁을 위한 도식과 새로움에 대한 동경을 보여준다. 이러한 논리는 모더니즘 미학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에 압축된 홍주희의 낙원은 모더니즘을 추동했던 새로움과 진보에의 약속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근대 이후의 세계관과 상통한다. 여기에서 하늘 아래 더 이상의 새로움은 없는 것이고, 그림은 행복에의 가상과 전격적으로 화해한다. 그녀의 작품에도 낙원이나 유토피아에 대한 희구가 있지만, 모더니즘의 그것과는 방식이 다르다.
홍주희는 추상화 같은 부정의 어법이 아니라, 감정 이입되는 형상이 남아있는 긍정의 어법을 구사한다. 그것은 모더니즘 예술과 더불어 근대가 낳은 쌍생아라 할 수 있는 키치에 더욱 가깝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시작한 작가는 자신이 아는 많은 전통적 모티브와 기법을 능숙하게 끌어오며, 여기에 동시대를 사는 젊은이로서의 발랄한 감수성을 보탠다. 만족의 끝없는 유예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감각적인 행복을 구가하려는 욕망은 주체가 선호하는 모든 것들을 한곳에 모아 놓는다. 화면은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며, 같은 도상이 반복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가상 속에서 현실에 대한 도피가 이루어지며, 대용물을 통해 읽어버린 낙원을 되찾으려 한다. 시각적 포만감을 주는 도상들이 비록 한 장의 그림으로 나마 낙원을 약속한다.

그것은 자기 향수를 위해서 환상을 창조하려는 키치적 경향이다. 홍주희의 작품은 낭만주의 이후에 전개된 본격 모더니즘이 가지는 냉정한 거리감보다는 스스로 연출한 상황에 푹 빠져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관심적인 관조의 미학이 아닌 열렬한 관심이 존재한다. 직접적인 소통의 효과라는 면에서 그녀의 작품은 고급문화보다는 대중성에 경도된다. 그것은 전문가적인 솜씨로 생산되어 보다 많은 대중과 소통하려는 대중문화의 요소를 가진다. 대중문화처럼 취향에 따라 긁어모아진 도상들을 동일한 차원에 배열시킨다. 독창성과 진보라는 기치 아래의 현대미술이 소통보다는 충격에 집중하면서 ‘파괴를 위한 파괴’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19세기 식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아니지만 그것과 닮을 꼴이다.
제도화의 보호 속에서 연명하는 고급예술로서의 모더니즘적 전략이 아니라, 민화나 만화같이 삶 속에서 강인하게 생존하려 한다. 그것은 삶과의 닮음 꼴이 아닌, 삶과의 대조를 통해 현실 속에서 자기 위상과 필연성을 정립한다. 환상은 즉물적인 현실을 덮는 아름다운 가상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다시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수수께끼같은 환상을 즐기는 듯하지만, 사실은 현실이 더욱 수수께끼이다. 딱딱하게 굳어 물화된 현실 속에는 간파하기 힘든 요소가 있다. 그에 비하면 환상의 유희적 측면은 물화된 현실을 가변적이고 융통성 있는 것으로 만든다. 홍주희 작품의 유희적 측면은 바르트가 말한, 모방적mimetic 구성과 대립되는 기호적semiotic 구성과 가깝다. 작품은 현실을 반영하거나 진실을 지시하기 보다는 어떤 완벽한 도해의 완성을 즐길 따름이다.
홍주희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강한 픽션적인 요소는 허구의 조작자로서의 작가의 위상을 강조한다. 상징적 도상들은 복잡한 조합의 방식을 통해 그럴듯한 가상을 연출하고, 어디선가 빌려오거나 스스로 고안한 언어적 구조물로 현실을 완전히 대체해 버린다. 기호들은 잡다하지만 통일적이고 강력한 흐름을 생성한다. 쇄도하는 기표들은 대상의 부재를 가리고 있다. 이미지화된 자연과 현실, 주체 속에서 실재는 사라진다. 거기에는 모든 심층적인 구조의 부정과 표면 위로 모든 것을 불러내려는 충동이 있다. 사실상 극도의 환상성과 비참한 현실인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작품이라는 틀 속에 현실에 부재한 것들을 기호화하여 모아놓으며, 이 만화경 같은 표면들은 사실적 지시물들을 대신한다. 그것은 대안의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 대안의 현실은 참과 거짓으로 가늠할 수 없으며 그 자체의 전제와 맥락으로 효과를 발휘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완벽한 환상은 현실을 다시 낯설게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