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계예대 판화과 20주년 기념전



성인식장, 인문학적 장으로 확장되는 판화




국내에서의 판화교육은 미술대학 내의 독립된 과로 시작된 서양화나 한국화와는 달리, 서양화 학과의 한 부분으로서 판화수업이 이루어지거나 사설공방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를 통해 개인적으로 판법을 전수 하는 등 부분적이고 지엽적으로 행해졌었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현대판화가 한국현대미술 중 특히 서양화와 그 태생적 배경을 같이 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현대미술 초기(주로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에 작가들은 전후의 피폐해진 시대적 상황이 낳은 유럽의 앵포르멜 경향과 그 미국식 버전인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다. 소위 뜨거운 서정추상으로 알려진 이 경향은 작가들로 하여금 내면적 파토스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더 직접적이고 물질적인, 더 격렬하면서도 이질적인 형식을 찾도록 추동했으며, 작가들은 그 가능성을 판화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당시 판화는 새로운 형식실험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동했으며, 나아가 회화보다 더 전위적인 양식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해서 초창기에 판화는 전문적인 판화작가보다는 이런 시대적 상황에 반응했던 회화작가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혹은 산발적으로 제작된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제작된 판화들이 지금보다 오히려 더 전위적인 첨단의 형식으로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지금처럼 판화 자체를 독립적인 영역으로 이해하는 식의 소위 장르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희박했다. 판화가 그 자체 독자적인 영역으로서보다는 회화의 표현영역을 확장시켜주는 계기로 이해됐던 만큼 교육 역시 자연스레 회화의 연장선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해외에서 판화를 수학하고 귀국한 소위 유학파들이 본격적으로 교육현장에 투입되기 시작한 1980년대 들어 국내의 판화교육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까 국내의 미술대학에 판화과나 판화전공이 개설됨으로써 비로소 교육현장에서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판화작가 교육과 양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 현황을 보면, 1983년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성신여대 대학원에 판화과가 신설된다. 그리고 1988년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 및 서양화과 대학원 판화전공,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판화전공이 각각 개설된다. 그리고 이후 한성대학교, 경기대학교, 동아대학교(이상 대학원 과정), 조선대학교(학부과정), 이화여대(대학원과 학부과정) 등에 판화과 또는 판화전공이 잇달아 설립된다. 이로써 현재에는 추계예술대학교와 홍익대학교 그리고 이화여대가 학부과정과 대학원 과정 모두에서 판화과를 개설해서 판화와 관련한 연계 심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내의 거의 모든 미술대학들에서 여러 형식으로 판화수업을 진행해오고는 있지만, 정작 독립된 학과가 개설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더욱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던 사설공방과 그 공방들이 운영하던 아카데미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현재에는 이와 같은 대학현장에서의 전문적인 판화작가 교육 및 양성이 더 절실해지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 추계예술대학교는 (홍익대학교와 더불어) 사실상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학부과정에 판화과가 신설됐으며, 나아가 학부과정과 대학원 과정이 연계해서 판화에 관한한 심화교육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학부과정에 판화과가 처음으로 신설된 것이 1988년의 일이니까, 이후 꼭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적지 않은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졸업생 중 상당수가 현재 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해외에 유학한 작가들이 현재 귀국해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일부는 국내외의 유명한 판화공모에서 수상하기도 했다(정헌조 1996년 공간 국제 판화 비엔날레 대상 수상, 여동헌 1996년 제16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 공모전 대상 수상, 함창현 2001년 핀란드 국제 판화 트리엔날레 대상 수상).

추계 판화과가 개설된 지 10년 되던 해인 1998년부터는 출신 작가들을 중심으로 해서 <판화발전소>전을 매년 개최해오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추계판화가협회(현 회장 정헌조)를 창립해 현재 10주년을 맞고 있다(최근에는 동아현대판화가협회와의 교류 혹은 연계전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추계예술대학교의 판화과 개설 20주년을 기념하는 이 전시는 메인에 해당하는 <성인식장>(관훈갤러리), 추계판화가협회와 동아판화가협회의 교류전 형식의 전시 <핑크프린트>(인사아트센터, 갤러리 라메르), 재학생을 중심으로 한 매체실습 과제발표전 형식의 전시 <너의 볼륨을 찾아라>(팀프리뷰) 등의 전시가 동시에 열리는 대규모 형식을 띤다. 이번 행사는 단순한 전시관행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로 보이는데, 그러니까 단순히 완성된 작품을 디스플레이해 보여주는 식의 전시행태를 재고케 하는, 전시공학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면면들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대개 재학생 중심으로 꾸민 전시들은 무엇보다도 과제 발표전의 형식을 통한 현재진행형의 전시를 지향하는 만큼 판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성하도록 유도한다.

이 가운데 <핑크프린트>전은 사실상 추계판화가협회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전시로서, 동판화의 강승희, 실크프린트의 서정희, 그리고 리놀륨판화의 정원철 등 교수진을 중심으로 한 주요 동문들의 판화작품을 망라하고 있다. 그리고 <너의 볼륨을 찾아라>는 매체실습 수업의 과제발표전으로서, 단순한 판화를 넘어서는 온갖 이질적인 매체에 대한 형식실험의 다양한 방법론이 모색되고 전개되는 장이다. 교과목의 성격상 일종의 조형연습과도 같은 과정이 곁들여진 작품이 형식실험이 강한 신세대 작가들의 작업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발굴 육성하는 대안공간에서 열려 그 의의를 더한다.

이번 행사의 메인에 해당하는 전시 <성인식장>(전시기획 정원철)은 판화과가 20주년을 맞는 해, 즉 성년을 맞는 해를 기념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전시 내용을 보면, 먼저 성인식장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로 떼어, 그 각 글자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각 글자별로 총 네 개의 팀을 만들고, 각 팀에는 동문작가 1명이 리더를 맡아 팀을 운영하면서, 그 과정을 재학생들과 협의하고 공유하는 식이다.

그 세부를 보면, 먼저 성(成)(팀 리더 송인구)이란 말은 이루기, 되기, 변화하기, 생성하기를 의미하고, 판화에서는 층(layer)과 관련되고, 인문학적으론 철학과 관련이 깊다. 알다시피 판화는 복수(複數)의 형이나 색을 중첩시키는 과정을 통해 고유의 이미지를 얻는다. 이질적인 형이나 색이 중첩돼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의 존재는 이질적인 요소나 타자에 해당하는 형질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으로써 구조화돼 있다. 이런 후기 근대적 자의식과 더불어 특히 <되기>란 욕망의 능동적인 사용과 그 결과물로서의 비결정성(그 자체 국가와 제도의 결정성과 비교되는)을 겨냥하고 있는 질 들뢰즈의 철학적 입장과도 연관된다. 그런가하면 <변화>나 <생성>이란 말할 것도 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는 생태의 본성을 암시한 것이다.

그리고 인(人)(팀 리더 정헌조)이란 말은 사람, 몸, 인문주의를 아우른 것으로서, 판화와는 수작업(handcraft)과 관련되며, 그 자체 인문학과 광범위하게 맞물려 있다. 이 항목은 판화의 정통성을 강조한다. 정통 판화는 작업의 전 과정이 순수하게 수작업으로 이뤄지는데, 이는 단순히 수작업 자체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경험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판과 주체가 만나는 상호작용적 행위에 주목하는 것이다. 문지르고 갈아낸 흔적, 즉 몸이 만들어낸 자국과 그 표면질감이 고스란히 인출된 판화는 시각적인 단계를 넘어 촉각적이다. 이때 몸의 작용은 단순한 힘의 논리(이를테면 힘을 조절하는 식의) 즉 물리적 현상을 넘어 존재와 합치된다. 이는 그 자체 순수한 이성이나 정신 혹은 관념과는 구별되는 지각, 즉 육화된 의식에서 존재론적 당위를 찾은 메를로 퐁티의 철학적 입장과도 통하는 것이다(참고로 인문주의에 대해서는 그 논리의 범주와 영역이 인간중심주의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일정한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다음으로 식(式)(팀 리더 오성희)이란 말은 법, 테크닉, 이성을 아우른 것으로서, 판화와는 기계적인 과정이나 디지털프로세스와 관련되고, 그 외연은 인문학 중에서 과학과 맞물린다. 주지하다시피 판화에서 기계적인 공정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심지어 판화를 판화이게 해주는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이런 기계적 프로세스에 대한 감각적 이해와 능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판화의 역사를 인쇄의 역사의 한 갈래로 보는 것도, 그리고 판화(판을 매개로 한 간접성이 특징인)를 회화(그 자체 직접성에 바탕을 둔)와 구별케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공정에 연유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작가들은 생리적으로 새로운 매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자기 작업에 끌어들이기에 주저함이 없다. 이로써 디지털프린트는 판화의 첨단적인 한 형식이면서도, 이와 동시에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을 위태롭게도 한다. 현실과 가상현실을 넘나드는가 하면, 모본(母本)과 사본(寫本)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콜라주 된 이미지, 몽타주 된 이미지,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편집된 이미지들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의심하게 한다. 이제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는 대신에 현실을 차용하고 흉내 낸다. 현실을 닮았지만, 현실을 재현한 것이 아닌 이미지들과 대면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심지어 스트레이트포토마저도 이제는 더 이상 현실을 (곧이곧대로) 증언해주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장(場)(팀 리더 정경희)이란 말은 마당, 공간, 매스미디어를 아우른 것으로서, 판화와는 공공성과 관련되고, 그 속성이 인문학 중 사회학과 관련이 깊다. 주지하다시피 판화는 소통에 강한 매체다. 예로부터 판화는 쉽게 유통될 수 있는 매체적 특성 탓에 회화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까지, 빠르게 이미지를 확산시킬 수 있었다. 판화는 말하자면 발터 벤야민이 지적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이미지의 민주화를 실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동이나 소통이 용이한 매체적 특성 탓에 판화는 공공성 담론과 맞물리며, 그 정치적 민감성(이를테면 예술을 매개로 한 비판의식과 관련해서는 각종 유명한 풍자판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이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학적 장(예술적 장) 이론과 관련된다.

이처럼 전시는 성인식장이라는 개념을 빌려 성년의식을 치르는 한편, 그 개념을 해부해 판화의 특질(이를테면 층, 수작업, 기계적인 프로세스, 공공성으로 나타난)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외관상으론 창작현실과 관계가 없는 듯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그 이면에서 핵심적인 자양이 되고 있는 인문학적 인식(이를테면 철학, 인문학, 과학, 사회학으로 나타난)에까지 그 외연을 확장시킨다.

더불어 사실상 한 학기 동안의 성과에 해당하는 이 전시는 소위 작가주의와는 비교되는 협업작업의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예술은 전통적으로 작가 개인의 아이덴티티가 창출해낸 미학적 결과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입장이지만, 그 형식은 자칫 예술과 사회가 만나는 접점을 모색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구조를 가질 수 있다. 이를 보충하거나 타개해 주는 태도와 방식이 상황주의며 학제간 연구방식이며 그리고 협업작업이다.

이 가운데 소위 상황이 형식을 결정한다는 논지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상황주의 미술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스펙터클 소사이어티>(구경거리의 사회, 즉 구경거리를 욕망하는 사회)의 저자인 기 드보르의 입장으로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예술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를테면 예술의 소재가 되는 현실적 삶은 온갖 변화무상한, 온갖 이질적이고 예기치 못한 상황들로 점철돼 있다. 따라서 예술을 예술이게끔 해주는 형식(그 이면에 현실적 삶이 녹아있는 형식)은 사전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런 현실에서 건너온(지금도 건네지고 있는) 온갖 이질적이고 차이 나는 상황들이 매순간 요구해오는 다른 논리들에 의해 추동되고 영향을 받고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제간 연구방식은 예술이 지금처럼 세목과 장르로 분화되기 이전의 처음 상태를 회복하게 해준다. 탈형식과 탈장르 등 온갖 탈(脫)의 논리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이 입장은 요샛말로 통섭의 논리에 해당한다. 외관상 이질적이고 차이 나는 것들, 낯설고 생경한 것들을 하나의 형식 속에 녹여내는 것이다. 예술은 관념적이고 경험적인,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경제적이고 사회학적인 온갖 이질적인 삶의 양태와 그 지점들이 합류되는 깔때기와도 같다. 그러므로 장르와 장르가, 분야와 분야가 서로 몸을 섞는 것은 자연스럽다. 처음엔 그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를 낯설어하며 밀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서로가 친해질 수 있는 구실을 찾아낸다. 예술이란 바로 그 접점에서 찾아지는 비전, 상식과 합리, 논리와 관성을 배반하는 비전, 친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비전의 예기치 못한 열림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학제간 연구방식으로 표면화되기 이전부터 미술은 이렇듯 인문학과의 상호 긴밀한 관계에 의해 지지돼 왔다. 인문학적 소양(내용) 없이는 미술(형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그 자체 예술의 미덕인 비결정성과 관련이 깊은 협업작업은 예술로 하여금 작가주의의 독단에 빠지지 않게 해준다. 그렇다고 이런 인식이 모든 진정한 예술작품에 대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협업작업이 여기에 더해져서 열린 예술작품, 가역적인 예술작품, 현재진행형의 예술작품, 흡사 살아있는 유기체인 양 그 개념이 계속 변화하는 예술작품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적의 환경이 돼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황주의 미술과 그 논리(단순한 주제전 형식의 기획전과는 다른), 학제간 연구방식(미술 혹은 판화와 인문학이 만나는 접점에 대한 모색), 그리고 협업작업(팀 작업)은 현대미술을 이해하게 해주는 키워드들이며, 실제로 그 개념이 형식화되는 현장을 확인하고 추체험하게 해준다는 점에 이번 전시의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