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페인팅과 이미지의 정치학
매일같이 배달되는 일간지에는 어김없이 광고 전단지가 딸려있기 마련인데, 대개는 바로 휴지통에 버려지기 일쑤이다. 신문도 실제 구독자 이상으로 찍혀져서 (발간 부수와 광고주 확보와의 상관관계에 기인한) 발간과 동시에 폐지공장으로 직행하는 부수가 만만찮은 실정이다. 그리고 가전제품을 구입하면 매뉴얼이 딸려오는데(어떤 매뉴얼은 무슨 수학공식 같기도 하고, 복잡한 전자회로를 설명해 놓은 듯해 실제로 그것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또한 대개는 버려지거나 서랍 속에 들앉은 채 잊혀진다. 그런가하면 각종 대중잡지들을 보건데 기사에 해당하는 부분보다는 소비를 유혹하는 광고 이미지들로 채워진 지면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현상은 인쇄물 같은 전통적인 매체뿐만 아니라, TV나 인터넷 같은 신종 생활미디어에서도 그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사람들은 TV를 공공연히 바보상자라고 부르고,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는 정보를 대개는 쓰레기 정보라고 일컫는다. 심지어 신문이나 TV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사람들조차 생겨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처럼 매체를 기피하는 것일까. 그것은 매체를 통해 전달되고 유포되는 이미지나 정보가 대개는 익명적이고 무분별하며 무엇보다도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체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정작 필요로 하는 정보 또한 매체를 통해 취하고 있다. 해서, 사람들과 매체와의 관계는 이중적이랄 수 있다. 즉 주체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매체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주체로 하여금 불필요한 과다한 정보에 노출되게 함으로써 역으로 정체성 혼란을 불러오기도 한다.
김춘환은 과포화 상태에 이른 이미지를 차용하고, 그 이미지로 인한 정체성 혼란에 반응함으로써 이미지의 홍수시대에 부합할만한 작업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잡지와 신문, 각종 광고 홍보물과 전단지, 그리고 매뉴얼과 전화기록부 등 온갖 유형의 종이로 된 인쇄물을 차용, 전용, 변용하는 작가의 작업은 기성품을 차용한다는 점에선 신사실주의(혹은 네오다다)와 연관되며,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이미지를 테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선 팝아트와의 영향관계를 보여준다.
특히 신사실주의는 그 용도가 폐기된 폐공산품 쓰레기로부터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이 시대의 거울, 즉 리얼리티의 계기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작가의 전작들 중에서 특히 1999년과 2000년 즈음에 제작된 작품들이 이런 신사실주의와의 영향관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암시한다. 예컨대 창고나 공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재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제작된 견고한 나무틀 속에다 각종 인쇄물을 구겨 넣어 집적시킨 작품을 보건데, 기성품의 차용은 물론이거니와 어셈블리지로 나타난 형상화의 과정이 신사실주의 고유의 방법론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제작된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신사실주의와의 영향관계를 최소한으로만 유지하면서, 이를 발판 삼아 나름의 독자적인 조형형식을 구축해낸다. 잡지로부터 찢어낸 페이지를 일일이 손으로 구기거나 접어서 비정형의 작은 덩어리들을 만든 연후에, 이 덩어리들을 가장자리에 턱이 있는 나무 패널 속에다 접착제를 이용해 빼곡하게 붙여서 집적한다. 이렇게 작품이 완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근작에서는 여기에다 칼이나 톱 그리고 그라인더를 이용해 그 전면을 커팅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작가는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이 커팅에 대한 발상을 얻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제재소에서 원목이 거대한 기계톱에 의해 잘려지고 가공되는 것처럼 인쇄물이 톱에 의해 커팅되고 가공되게끔 한 것이다. 이때 가공된 나무가 나무의 형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다만 그 형태가 변하는 것처럼, 작가의 작품 역시 종이 고유의 성질을 훼손하지 않은 채 형태상의 다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 성질이 변하는(변질) 화학적 변화이기보다는, 그 형태가 변하는(변형) 조형적 변화의 맥락에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형성이 강조되고 두드러져 보이는 작가의 작업은 기성품을 전용한다는 점에서는 신사실주의와 관련되지만, 신사실주의가 조형성보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는(그러니까 전용된 기성품에 내포돼 있거나 기성품을 소비하는 행태와 관련한 메시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구별된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1980년대 국내 하이포리얼리즘에서도 발견되는데, 당시 국내 작가들의 그림이 외형적으론 영미권의 하이포리얼리즘 경향성을 띠었지만, 재현의 논리나 방법론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영미권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는 유독 재료나 소재(이를테면 모래나 벽돌 그리고 물방울과 같은)의 물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아마도 국내 작가들이 이처럼 재료의 물성이나 조형성을 강조하는 것은 다소간 체질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김춘환의 작업이 메시지를 도외시한 채 순수한 조형성에만 천착했다는 건 아니다(만약, 그런 경우라면 종이를 완전히 해체시켜 펄프를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다만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조형성과 메시지 전달과의 관계가 좀더 복잡하고 암시적인 형태로 현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쇄물에 포함된 이미지나 정보는 커팅되지 않은 채 종이 속에 숨겨져 있거나 일부는 가장자리의 나무틀 바깥으로 드러나 보이기조차 한다. 여하튼 작가가 적어도 메시지 자체를 전면화하는 대신에, 가급적 이를 조형적인 프로세스 이면에로 숨기는 식의 보다 암시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메시지 자체를 보여주지 않고, 굳이 이를 가공해서 보여주는가. 이러한 의문이나 문제의식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낯설게 하기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즉 일상에서 접하는 이미지나 정보(흔히 우리가 실재로 믿고 있는) 자체가 이미 특정의 이데올로기나 이해관계에 의해 가공된 것임을 주지시키기 위해 채집된 이미지나 정보를 가공해서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제안된 일종의 가공된 오브제 내지는 해석된 오브제(인쇄물을 가공하는 작가의 행위는 인쇄물에 포함된 정보를 해석하는 행위에 비유될 수 있다)가 정작 상실된 일상이나 진짜 일상을 되돌려 줄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유포되는 일상이나 실재가 가공된 것임을 인식시킬 수는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해석은 작가가 작품에 부친
형식적으로 김춘환의 작업은 인쇄물의 표면이 아닌 접히거나 구겨진 단면이 전면을 향하도록 연출한 것으로서, 이렇게 드러난 단면의 색채나 질감 여하에 따라서 다양한 화면이 가능해진다. 커팅에 의해 그 단면이 절단된 부분과 여전히 인쇄물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부분이 한 화면 속에서 서로 조응하는가 하면, 표면과 깊이, 입체와 평면을 동시에 실현하고 있는 일종의 오브제 회화 내지는 저부조 회화로 부를 만한 경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종이를 접거나 구기는 방법, 배열하는 방법, 그리고 절단된 단면이 드러나 보이는 양태에 따라서 흡사 회화적인 화면을 보는 것 같은 일루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암시적인 풍경 같은 구상적인 형태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추상적인 형태들이다. 이를테면 구심적이거나 원심적인 방향성을 암시하는 원형구조랄지, 거칠고 질박한 마티에르가 손에 잡힐 듯한 비정형의 붓질이 느껴진다. 주름이나 파동이 감지되기도 하고, 회오리치는 바람이나 물결이 연상되기도 하고, 빗살문양과 같은 패턴화된 이미지가 연출되기도 한다.
이로써 작가는 일종의 콜라페인팅으로 정의할 만한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굳이 이 말을 풀어쓰자면 콜라주회화 정도가 될 것이다. 접히고 구겨지고 절단된 종이와 그 종이의 집적이 만들어내는 표면질감은 그대로 전통적인 회화에서의 안료와 색채와 터치에 해당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인쇄물을 콜라주하고 가공하는 방법을 통해서 전통적인 회화를 대체하거나, 최소한 그 표현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어셈블리지를 통해서는 하나의 조형요소(작은 덩어리의 형태로 구겨진 종이)를 단위구조 삼아 이를 반복 중첩시켜나가는 과정과 함께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김춘환은 자신의 작업이 수많은 (익명적이고 무분별하며 일방적인) 정보와 이미지들이 생산되고 소비되고 축적되는 메커니즘이 초래한 일상에서의 문화적 혼돈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되었다고 적고 있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잡지와 신문, 각종 광고 홍보물과 전단지, 그리고 매뉴얼과 전화기록부 등 종이로 된 모든 유형의 인쇄물을 차용하고 변용하는 작가의 작업은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담겨진 정보가 갖는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반성케 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미지의 정치학으로 부를 만한 담론의 한 지점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이로써 눈길 한번 받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이미지나 하루도 못 버티는 정보들로 넘쳐나는 이미지의 홍수시대의 그늘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쓰레기 정보와 이미지들이 우리 모두의 정체성 형성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