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맞은편에 보이는 작품들은 아몬드 형(타원 형)의 작품을 중심으로 첨형 아치와, 아치가 대칭으로 배열되어, 작품 5개가 전시 공간 한 면을 성소(聖所)같은 장소로 변화시킨다. 그 맞은 편 벽에는 대칭형의 작품이 4개 걸려 있어, 균형을 향한 작가의 의지가 재차 반향 된다. 또 다른 벽면에 걸린 두 개의 큰 원형 작품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퀴나 눈동자처럼 잠재화된 움직임을 통해 균형을 이룬다. Y.Y.Shim의 작품에서 배치 뿐 아니라 형태적인 측면에서 균형에 근접한 작품은 원형 보다는 아몬드 형이다. 아몬드 형 작품은 대칭의 중심에 놓여있고, 또 다른 벽면에서 대칭으로 분열된다. 아몬드 형의 작품은 성소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여성의 육체를 강하게 상기시킨다. 그것은 부성적 상징 질서에서 출발하는 종교성이 아니라, 모성에서 출발하는 또 다른 의미의 종교성을 예시한다. 그것은 정신보다는 육체에, 중심이 아닌 주변(또는 비어 있는 중심)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기성의 지배적 질서와 다른 성스러움의 또 다른 원천이다. 그것은 정통 종교보다는 정통 종교의 이면을 이루고 있던 신비주의--종종 이단으로 탄압받던--의 전통에 가깝다.
먼저 아몬드형 작품들을 살펴보자. 단단한 나무로 형태 지워진 아몬드 형태 안을 비집고 들어앉은 둥근 형태는 마치 금속 털로 뒤덮인 듯하다. 둥근 형태 안에는 또 다른 아몬드 형태가 들어있고 여기에서 뻗어나가는 나무 형 구조가 보인다. 양 방향에서 뻗어 나오는 나무는 그 내부에서 분출되는 힘을 표현한다. 아몬드 형태 안에 또 다른 아몬드 형태가 안치된 작품에서도 양 입술로부터 뻗어 나온 나무형태가 같은 역할을 맡는다. 또 다른 아몬드 형 작품은, 석화 또는 목질화 된 중심을 에워싸는 또 다른 층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붉은 점무늬가 가득 박혀 있어 마치 생명력 충만한 세포 같은 느낌을 준다. 강한 운동감을 가지는 구불구불한 형태는 새살이 돋아나는 모습이나,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어떤 작품에 배치되든, 나뭇가지 형태(식물성)나 구불거리는 촉수 형태(동물성)는 힘의 분출 및 유출을 나타낸다. 작가에 의하면 아몬드 형태의 기원은 사춘기 때 화장실에 들어가서 폐쇄되어 있는 사면공간이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으며, 그 안에 변기를 보자 갑자기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 것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아늑함에서 공포심을 동시에 느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존재와 자신을 다시금 삼켜버릴 수 있는 어머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투사된 것이다. Y.Y.Shim의 작품의 기본 형태를 이루는 원이나 타원 같은 도형들이 이성적이고 기하학적 질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모성적인 육체로부터 온 태초의 형상과 관계된 것임을 알려준다. 대칭형 작품들은 마치 반으로 잘려 펼친, 뚜껑 달린 용기 같은 형상이다. 유충이 들어있는 고치나 시체를 거두는 관도 연상된다. 양쪽 날개가 교차되는 방식과 날개 안을 채우는 무늬들이 작품마다 다르다. 같은 크기의 형태가 교차됨으로서 또 다른 아몬드 형태가 태어나는 듯하고, 새롭게 형성된 중심은 양 날개가 받쳐주는 안정된 형태를 이루기도 하지만, 타원형 보호막이 불안정하게 열린 작품도 있다. 나무는 견고한 외곽선을 형성한다. 한편 내부의 나무는 중심과 주변을 연결해주는 관계망의 역할을 맡는다. 형태가 대칭이지만 외곽선과 그 내부의 형태들이 비대칭인 작품도 있다. 대칭형 작품들은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기 때문에,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의 균형이 잡혀있다.
둥근 형태의 작품 역시 아몬드형 작품처럼 가운데 부분에 심연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가는, 또는 그곳을 향하는 움직임이 있으며, 아몬드형이나 아치형 작품과 달리, 둥근 외곽선 자체에서 발생하는 운동감으로 원이 상징하는 바의 안정적인 속성을 벗어난다. 작품의 견고함과 더불어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나무로 둘러친 외곽선뿐이다. 알루미늄 바탕 위에 얹힌 붉은 색조의 망, 그 위를 구불구불 가로지르는 금속 털 뭉치는 생체조직의 단면과 광물질적인 반사를 교차시킨다. 또 다른 둥근 형태의 작품은 황금색의 구불거리는 외곽의 형태가 넘쳐나는 양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내부의 입술 형태는 음을 나타내는 은색으로 보호된다. 그러나 양자 사이를 구불거리는 형태의 나무가 매개한다. 여기에서 나무는 식물성 외피를 가지고 있지만, 동물성 움직임을 보여준다. 가운데 입술을 이중으로 에워싸는 둥근 형태의 작품은 안에서 발산하는 힘과 밖에서 파고드는 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색상의 금속을 교차적으로 사용함으로서, 외곽을 단단히 둘러치기 보다는 꼬리를 무는 운동을 발생시킨다.
아치형 작품은 종교적 건물의 창을 떠오르게 하는 형태이며, 원형이나 아몬드 형의 작품에 비해 중력의 지배를 받는 구조이다. 그러나 외곽선과 그 내부에 또 하나의 층이 있는 구조는 공통점을 이룬다. 겹으로 둘러쳐진 안팎의 구조 사이를 완충하는 세포질 같은 구조 또한 그러하다. 유기체적 섬유질로 만들어진 아치형 속 또 하나의 아늑한 보호막 속에 마주보는 떡잎처럼 들어앉은 형상은 마치 양성체androgyny같이 보인다. 금색으로 나타나는 양과 은색으로 나타나는 음이 교차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또 다른 아치형 작품은 내부의 아치에 들어앉은 개체가 그 외부로 기를 뿜어내는 구불거리는 형태인데, 내부로부터 타오르는 불길로 인해 아치와 아치 사이의 완충지대가 검게 그을린 것 같다. 다른 비슷한 구도의 밝은 작품과 짝을 지어 본다면 밤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첨형 아치형 작품에 안치된 형상은 인물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내부의 보호막 안의 개체 내부에서 발산되는 기운과 외곽의 금속성 아치에서 발산되는 기운이 밝게 빛나는 알루미늄 판 위에서 뒤섞인다. 또 다른 첨형 아치 작품은 개체가 발생하기 이전에 개체를 이루고 있을 법한 구성요소들로 압축되어 있다. 보호막이기도 하면서 질식할 듯한 폐쇄성을 가지는 내막은 한 개체가 탄생하기 이전의 상태가 죽음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각 작품 및 배열 상태에는 유사 종교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Y.Y.Shim 은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어릴 적부터 종교에 대한 성향은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향이 독일에서의 오랜 유학생활을 통해 유럽의 종교적 전통과 그것에 기반 한 사유 방식에 대한 무의식적인 내재화와 의식적인 반성이 더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Y.Y.Shim의 작품에서 종교적인 심급은 상징적인 도상이 차용되는 식이 아니라, 보다 내재적이다. 그것은 따뜻하게 주체를 보호하면서도 객관세계와의 분리의 감정을 자아내면서 극한적 고독의 상황을 연출하는 작품 구조로 나타난다. 본명은 물론, 작품 제목까지 [무제]로 일관하는 은둔적인 성향은 작가를 밑도 끝도 없는 작업에만 매달리게 했다. 그러나 작품 활동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차원이기도 하지만, 끝없는 불안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작업은 목표 지향적이기 보다는 느낌이 왔을 때 집중해서 완성한다.
그것은 무의식에서 나오고, 의식에 다가오는 형상을 고착시키는 지난한 과정이다. 작가는 개념보다는 육감에서 오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드로잉은 하지만 설계도면 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수공이 많이 들어가며 회화도 조각도 아닌 작품 형태, 특히 재료를 다루는 솜씨는 공예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Y.Y.Shim의 작품은 단순한 장식을 초월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여기에 종교적인 성향이 짙게 가미되면서 정확히 유형화할 수 없는 작품이 탄생했다. Y.Y.Shim의 작품에 나타나는 종교성은 일종의 주관적인 환상과 같은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종교란 현실과는 거의 무관하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욕망의 현실성을 표출하는 비현실적 구축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규정된 신앙은 강령화 된 율법같은 것이기 보다는 사랑과 보호를 제공하는 심급이다. 율법적인 종교가 가지는 상징적 체계는 부계적인 기원을 가진다. 반면 사랑과 보호를 제공하는 심급으로서의 종교는 실체적이고 모성적이다.
성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갖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아기와 아기 어머니의 젖가슴과의 관계에 비유--‘이 같은 전적인 의존관계, 좋든 싫든 간에 유일한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에 대한 내밀한 참여이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 이 젖가슴은 어머니의 몸에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심급, 즉 피안의 세계로 옮겨지게 된다. 어머니의 품으로부터 분리되어 홀로된 타자는 어머니의 상징적인 대체인 아버지와 결합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은 개인의 심리 생활에서도 반복된다. 모계로부터 부계로 이전된 종교적 전통에 대해 비판적인 크리스테바는 [현실적 진실]에서도, 교리화 된 제도 종교가 과학적 담론처럼 주체를 배제시키면서 기호들 자체의 법칙들 속에서 그 체계를 구축할 뿐이라고 강조하며, [공포의 권력]에서는 법칙을 만드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남근 상징적인 본능이라고 지적한다.
지배적 상징질서를 재현하는 제도화된 종교가 강요하는 동질적인 의미의 배면에는 이질적인 과정이 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갖가지 분리를 치유할 수 있는 모계적 기원을 가진 종교성은 남/녀의 이원적 구별 속의 한 항이 아니다. 그것은 구별과 분리가 생겨나기 이전의 원초성, 그리고 지배적인 상징 질서에 의해 타자화 된 여성성을 말한다. 이항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여성성은 궁극적으로 모성적 육체에 해당된다. Y.Y.Shim의 작품 형상에서 강하게 떠오르는 여성성은 단순히 음양의 화해 같은 종합의 도상이 아니다. 작품 내부에서, 그리고 작품들 사이에 내재된 차이와 반복의 방식은 갈등하는 힘들의 역학관계를 드러낸다. 구별되면서도 연결된 여러 층위의 경계는 몸으로부터 발원한 무의적 충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도전받는다.
이질적 힘들 사이의 밀고 당김이 드러나면서도 그것 자체가 전개되는 장은 견고하게 유지된다.
그것은 Y.Y.Shim의 작품이 지향하는 균형이라는 것이, 언어 및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상징적(Symbolic) 질서와, 물질적 기질 및 몸을 기반으로 하는 현실적(Real) 질서 사이의 역학관계를 모두 고려한 것임을 알려준다. 양자는 안과 밖, 중심과 주변, 동일한 표면의 이면 같은 것을 이룬다. 상징적 질서의 경계자체를 위협하고 재편하는 현실성은 정합적인 의미 내부에 있는 이질성이며, 욕망과 충동으로 가득 찬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정의한 코라의 개념과 비슷하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코라는 ‘여러 요소가 정체성도 이성도 없이 들어차 있는 자궁, 혹은 유모이다. 코라란 최초로 측정 가능한 육체 구성에 대한 예비 단계이고 카오스의 장소’이다. 코라는 어머니, 즉 여성의 육체와 더불어 작용하지만, 이것은 의미화 과정 내에서이다. 모성적 육체는 양면적이다. 지배적 상징질서가 느슨한 틈을 타서 복귀하곤 하는 타자로서의 여성성은 동일성의 질서를 교란하는 신성한 힘이면서도 억압되어야할 비천함이다. 그것은 또한 황홀과 고통의 동일한 원천이다.
Y.Y.Shim의 작품에 존재하는 양면성은 형식적 장치에서도 발견된다. 그녀의 작품은 구별되는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성층화 된 구조를 넘나들곤 하는 힘들은 금기를 위반하는 충동이다. 이 충동은 불온하고도 이질적이다. 작가는 촉수나 나뭇가지 형태 등으로 뻗어 나오는 힘들을 표현한다. 이러한 힘들은 심연, 즉 부재하는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무정부 상태나 분열로 와해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도 균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령 내부로, 또는 외부로 향하는 침투적 흐름들은 금속성 단면으로 나타나는 바의 절단과 분리를 치유하는 기운으로 나타난다. 기존의 언어로 표상할 수 없는 모성적 무질서와 부성적인 표상의 질서 사이에 적절히 설정될 수 있는 균형은 예술작품을 위해서 뿐 아니라, 결핍이나 억압에 기초하지 않은 주체의 정립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모성적 육체로부터 발원하는 원초적 충동은 무정형적인 형태로 흩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상징의 세계, 즉 언어와 사회, 주체의 구조를 재배열하는 원초적 동력이 되면서 생산적인 것이 된다. 상징적 통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억압이 필요할 뿐이지만, 리드미컬한 배열을 이루는 Y.Y.Shim의 작품은 경계를 넘나드는 위반을 향유한다. 충동의 활성화는 공고하게 구축된 동일성의 질서를 교란한다. 상징적 질서를 기준으로 하면 이러한 교란적 요소는 혐오스러움을 자아낸다. 혐오스러움과 신성함이라는 상반된 가치는 모성적 육체 속에서 공존한다. 혐오스러움이 출몰하는 공간은 육체의 구멍들이다. Y.Y.Shim의 작품에서 구멍들은 중층적으로 열려있다. 외부와 내부를 연결시키는 구멍들은 고유성과 정체성을 와해시키기 때문에, 지배적인 상징질서는 분리와 구별을 확실하게 하려 한다. 아담을 유혹하여 신이 금지한 음식에 입을 대게하고 그 벌로 출산의 고통을 짊어진 여성은 육체의 위 아래로 뚫린 두 입술을 가진다. 무한한 욕망의 블랙홀인 구멍은 부정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블랙홀은 Y.Y.Shim의 작품에서 무한한 발산의 원천, 즉 화이트홀이 되기도 한다. 삶을 주는 자이면서도 빼앗는 자, 아름다움과 죽음이 결합된 야누스로서의 모성은 예술의 바탕이 된다. 제도화된 종교를 비롯한 지배적인 상징질서는 모성적 육체와 부정함을 연결시키고, 여성성과 분리된 신성함의 자리를 마련해왔다. [공포의 권력]에서는 위협적이지만 영양을 공급하는 이질성으로서의 모성은 신약 이후의 텍스트와 후세의 신학에서 죄 많은 육체로만 각인될 뿐이라고 지적된다. 인간의 전락을 낳은 여성은 정신성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은 뱀이 그 스승인, 성적인 탐욕과 사과를 겨냥한 한 입 베어 무는 음식물에 대한 탐욕을 상징한다. 계통발생은 개체발생으로 반복된다. 사회가 인정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 분리되고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몸이다. [사랑의 정신분석]은 서양의 기독교가 인간에게 부성적 기능의 상징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영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종교라고 지적한다.
아버지와의 동일화는 어린아이를 기쁨과 함께 자칫 정신적인 파괴를 자아낼 수도 있는 어머니 육체와의 접촉으로부터 떼어내어서 그를 다른 차원의 주체, 즉 언어활동이 펼쳐지는 상징적 차원의 주체로 만든다. 크리스테바는 실제로 언어활동이 시작되기 이전 시기에, 어린아이들이 느끼는 슬픔, 즉 그들의 모성적 천국에 대한 포기와 욕구의 즉각적인 만족에 대한 단념을 관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표상적인 부정하고 오염되어 있는 것으로부터의 상징적인 분리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분리는 회귀로의 충동을 낳지만 완전한 회귀는 무질서와 무정부주의일 뿐이다. 상징적 질서의 완벽한 전복은 도착과 정신착란을 낳으며 자연 상태로의 퇴화 및 인간적 삶을 폐기할 수 있다. 동일한 과정 속에 속해 있는 예술과 주체는 양 극단을 피해야 한다. Y.Y.Shim의 작품은 표상할 수 없는 요소까지 포함하는 의미화를 중요시하며,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양 극단 사이의 균형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