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말과 글 사이의 간극
글쓰기라는 양식 자체는 말이 아니라, 문자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텍스트(작품과 참고문헌)를 읽고 또 다른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도래한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말의 세계를 복귀시킨다. 말과 글을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양자는 매체의 역사나 논리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양자의 역학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매체계의 변화를 구술성orality과 문자성literac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월터 J 옹의 논의를 참고--두 개념의 대조는 그의 책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논지를 요약했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글자를 쓰지 않았던 원시적, 또는 야생적 구술문화에서 언어란 일반적으로 행동양식이지 사고를 표현하는 단순한 기호는 아니다. 음성언어는 힘과 행위로서, 목소리로 된 말은 사람들을 굳게 결속하는 집단을 형성한다. 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긴 연쇄, 이를테면 계보와 같은 것은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누적적이며 첨가적이고 집합적이다.
구술문화는 정형구적, 상투구적 사고의 조합에 의존하여, 누구나가 힘 안들이고 생각해내기 쉽게 패턴화 된다. 구술문화의 특유한 기억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기억의 대상이 무거운 인물, 즉 기념비적이고도 잊기 어려운 인물,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런 공공성을 띄고 있을 때이다. 원시적 구술문화는 문자문화에 비하면 한층 더 공유적 이고 외면적이다. 구술문화에서 배운다는 것은 알려지는 대상과 밀접하고도 감정이입적이며,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쓰기는 알려지는 대상과 아는 주체를 분리함으로서, 객관성의 조건을 세운다. 구술성은 주로 그 의미를 컨텍스트에 힘입고 있고, 쓰기는 언어 자체 안에 의미를 함축한다. 쓰기는 시각적이다. 시각의 전형적인 이상은 명확성과 명료성, 즉 나누어 보는 일이다. 데카르트가 주장한 명확성과 명료성은 인간 감각 중 시각을 강조한 것이다. 질서라는 개념은 상당부분 시각에 감각적 기반을 두고 있다.
정확하게 반복될 수 있는 시각 정보와 이를 정확한 언어로 기술하는 감각은 과학뿐 아니라 근대예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에 반해서 청각의 이상은 하모니, 즉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가 말하듯 시각은 사물을 토막 내어 감지한다. 그러나 들을 때는 동시에 그리고 순간에 모든 방향으로 소리가 모여온다. 쓰기는 말하기를 구술-청각의 세계에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 즉 시각으로 이동시킴으로서 말하기와 사고를 함께 변화시킨다. 문자에 익숙한 사람들이란 쓰는 기술에 의해서 직 간접적으로 사고 과정을 형성시킨 인간을 말한다. 소위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언어라든가 자율적인 담론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쓰기에 의해 확립된다. 쓰는 사람은 실재하는 컨텍스트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명료하게 되도록 말을 작용시키기 때문에, 쓰여진 말은 분석적이다. 인쇄는 지식을 정신밖에 저장함으로서, 과거를 재현시키는 사람들이었던 박식한 노인들의 가치는 떨어지고 그 대신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젊은이들의 가치가 오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창조성, 새로움, 진보 등의 가치는 문자문화의 결과임이 확인된다. 특히 인쇄로 가시화된 문자 문화는 독자성과 창조성이라는 낭만적인 개념을 낳았다. 쓰기와 인쇄의 결과는 자아의 근대적 개인화와 예민한 자기의식을 고양한다. 쓰기에서는 낡은 의미의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령 고전적인 모더니즘 텍스트인 카프카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K’ 같은 익명인이거나 심지어는 벌레 같은 존재들이다. 신화적 영웅 대신에 근대적 자아의 내면세계가 자율화된 문학적 공간에서 가득 펼쳐지는 것이다. 닫혀진 체계라고 하는 착각은 쓰기에 의해서, 그리고 더 한층 인쇄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봉인된 순수예술을 구하는 낭만주의적 탐구는 쓰기에 의해서 생겨난 자율적 담론이라는 감각, 그리고 인쇄에 의해서 생겨난 폐쇄적 감각에서 파생되었다. 인쇄는 텍스트 속에 발견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지어지고, 어떤 완성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감각을 부추킨다.
구술문화의 문자문화로 매체계의 역사를 설명한 월터 옹은 오늘날을 구술성의 문화라고 정의한다. 쓰거나 인쇄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문화의 구술성에 비해, 오늘날 고도화된 기술 문화에 바탕 하는 구술성은 2차적 구술성의 문화, 즉 문자에 입각한 구술성literate orality의 문화라는 것이다. 2차적 구술성의 문화는 대중문화의 영웅이나 스타같은 주인공들에게서, 그리고 록 콘써트나 클럽 같은 연행지향적인 하위문화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다. 구술성과 문자성의 역학관계를 매체의 차원 뿐 아니라, 철학적 차원에서도 덧붙일 수 있다. 월터 옹과 입장 차이는 있지만, 말과 글 사이에 내재한 긴장 관계는 데리다의 논의에서도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는 문자언어writing 보다 음성언어speech를 우위에 두는 서열을 역전시키고자 했다. 말중심주의(로고스중심주의)는 그가 해체하고자 했던 형이상학의 한 항목이었다. 해체주의적 사고에 의하면, 로고스중심적logocentric 철학은 관념적 의미나 진리의 근원으로서 의식에 특권을 부여한다. 진리의 구현에 있어서 말은 현상에 대한 본질의 우위,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 같은 위상을 가진다. 말은 화자의 강한 현존성(또는 직접성)과 동일성(또는 말해지는 진리의 순수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동일성보다 차이를 강조하는 사고방식에서, 부재에 기초하는 글은 말의 희미한 사본이 아니라, 차연(차이와 연기)이라는 운동을 하는 무한한 놀이의 장이 된다.
실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계에서 무엇을 말하고 쓸 것인가
상호 작용성을 기반으로 하는 인터넷, 그 고도 문명을 바탕으로 구술문화가 되살아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인쇄매체나 기존의 대중매체처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독백이나 설교가 아니라,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고 그 성원들이 실시간으로 참여한다. 여기에서 통용되는 것은 말에 가까운 글이지, 인쇄매체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 같은 나름의 자족성을 가지고 완결된 글이 아니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수많은 싸이트를 넘나들며 정보를 소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생산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 소통방식은 순발력 있고 맥락이 살아있는 대화의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술문화가 인터넷의 이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1999년 미술 웹진으로 처음 출발했던 [미술과 담론]은 문자적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했고, 2000년대 초반 구성원들 간의 활발한 대화적 상상력으로 인기가 있었던 [포럼 a]는 그 역량을 오래 지속시키지 못했다.
텍스트 중심의 웹진은 인터넷 매체의 상호작용성을 살리지 못하고, 생산적인 대화를 지속시키는 것도 피차간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미술계 제도 개선이나 공공성을 띄는 담론은 대화를 통해 풀어질 수 있지만, 미술의 출발인 작업 그 자체는 결국 개인의 고독한 행위의 차원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닐까. 대화는 예술의 한 축일 뿐이다. 나머지 한 축은 수많은 겹을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사물을 해석하는 반복적인 기호의 해독과정에 있다. 이 후자의 부분은 상호적 대화의 바깥에서, 각자의 작업실과 연구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미술 담론은 대화가 가지는 순발력과 더불어 고독한 숙성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또 아무나 말할 수 없는 것이 미술 담론이라고 생각된다. 이 두 가지가 같이 가지 않으면, 말을 위한 말, 글을 위한 글이 되어 자기 지시적일 뿐인 공회전을 벗어날 수 없다. 담론의 1차적 참조대상이 될 작품 생산 및 발표의 현장과 밀접한 관련이 없는, 단지 정보일 뿐 소문과 소식들로부터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담론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웹진과 달리, 광고수입을 통해 나름의 재정적 자립도를 가지고 있는 미술포탈 싸이트들은 정보를 유통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보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이미 다른 인쇄매체(팜플렛, 잡지, 신문)를 통해 생산된 것을 재순환시키고, 미술계의 대소사를 알리는 대자보 기능에 충실할 뿐이다. 모든 것이 쉽게 쥐어지는 고해상도 문화는 작품이 발표되는 1차적인 현장에 대한 실제 방문을 종종 대리 소비로 만족하게 한다. 또한 문자로 생산되는 텍스트가 ‘인터넷 용’이 아니기 때문에, (홍보용) 작품 사진과 같이 배열되는 텍스트가 얼마만큼의 가독성을 가지고 있으며, 전시 안내 메일(또는 기사)를 클릭하는 네티즌들이 텍스트를 얼마나 읽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정보가 축적되어 검색이 가능해 짐으로서, 정보매체의 기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글을 써야하는 과제가 주어졌을 때 정리되어 있지 않는 수많은 자료 더미를 들추기 보다는 컴퓨터 앞에서 시작하는 것이 간편하기 때문이다.
정보의 소비가 아니라 생산의 차원에서 보면, 미술 포탈 싸이트의 경우 가끔 자유게시판을 통해 비평적인 글이 게재되기는 하지만, 반응 없는 독백으로 수많은 정보의 홍수에 묻혀 시야에서 곧 사라지고 만다.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는 소수의 블로그를 제외한다면, 인터넷 상에서 미술 담론의 소통이 연속성을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발언할 기회가 주어져 있는 인터넷 공간이 대안의 매체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휘하기 보다는, 수동적 소비자에게 정보 겸 광고를 판매하는 기존의 대중매체처럼 작용하고 있다. 한편 인터넷이 정보소통의 순발력에서는 앞서가니 만큼, 기존의 매체는 단발성 정보보다는 심층적인 분석이나 종합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게 된다. 또한 누구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됨에 따라,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 기대되는 역할도 보다 심층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을 기성 평론계에서 충분히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비평이 죽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인터넷이 문화의 상호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현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우리 미술계에서 문자적 텍스트로서의 비평이 자신만의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완결감 있는 생산물을 그동안 생산해 왔는지는 회의적이다. 한편 즉시적인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넷의 대화 공간은 커뮤니티를 전제로 한다. 어떤 대화든지 불특정 다수를 향해 할 수는 없다. 사회에서 고립되어 가는 미술계는 끊임없이 대중성을 이야기하지만, 대중은 미술에 관심이 없고, 대중이 미술가들에게 해줄 수 것도 없다. 미술인 스스로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미술인 스스로가 미술계의 대중이 되어 움직여야 한다. 작가들이나 이론가들이 운영하는 1인 미디어로서의 블로그나, 전시 및 프로젝트를 계기를 개설하는 싸이트 등의 활성화 되면, 미술인들 간의 공동체 속에서 맥락이 생겨나고 작품과 작가를 중심에 둔 대화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담론이 생산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핵심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문자성에 기반 하는 텍스트들의 역할이 있다. 문자적 텍스트는 다소 단선적이고 추상적이지만, 주어진 지면(공간)을 짜임새 있게 채우는 논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텍스트가 단지 소수만 돌려보는 인쇄매체를 넘어 인터넷 공간에서 유통되었으면 하지만, 지금처럼 이미지와 더불어 소비되는 정보로서 글자 뭉탱이로 훑어 내려가는 장식품이라면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미술을 둘러싼 제도의 비판과 작품 분석이라는, 바깥으로부터의 접근과 내부로부터의 접근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때 커뮤니티를 기초로 한 구술성과 첨예한 비판과 분석을 기초로 한 문자적 텍스트는 공존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 뿐 만 아니라 인쇄물로도 엄청난 내용물이 쌓이고 있는 시대에 인쇄 매체를 기반으로 하는 글쓰기와 온 라인에서의 대화는 어느 하나의 패러다임에 치우침 없이, 상호작용하면서 미술담론을 형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출전 | 2008 시각 예술 포럼, [시각예술과 비평의 역할]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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