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의 작품들은 텍스트의 해체(오윤석), 예술의 사물화(박용선), 차이와 반복(이인희), 시간성(박영선), 신낭만주의(홍원석)가 두드러졌다. 모두 탈 모더니즘적인 특징을 띄고 있는 것이다. 많은 작품에서 주장되는 본원적 가치로의 회귀나 치유적 행위는, 실제 작품에서는 해체, 신비화, 탈주, 확장, 현존성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규정한 의미는 끝없는 의미화 과정으로, 각자가 특성화시킨 자족적 형식들은 개방적인 기호의 놀이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강한 주관적 의지로부터 출발한 작업은 밀도 있는 작업과정을 거치면서, 발신자가 주입한 의미로 응집되기 보다는, 미지의 것으로 도약 또는 확산된다. 그들은 모더니즘적인 태도로부터 시작했지만, 작품이 도달한 곳은 모더니즘이 아니었던 셈이다.
오윤석
오윤석은 컴퓨터로 출력된 텍스트를 칼로 정교하게 오려서 중첩시킨 후 뒤에서 빛을 쏘는 작업을 보여준다. [금강경]이나 [불이 선란도] 같은 무게 있는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며, 작업과정 역시 무겁기 그지없어서, 젊은 작가가 작업 때문에 벌써 눈이 침침해 질 정도로 엄청난 집중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는 오려진 글자 배후에는 빛뿐만 아니라, 먹지를 대서 비워진 글자의 흔적을 다시 채워 넣곤 한다. 확대와 중첩, 설치의 과정을 통해 본래의 텍스트를 읽기는 힘들지만, 문자성(literacy) 자체를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서 미술과 문자의 오랜 관계를 새롭게 맥락화 한다. 매체의 역사는 신화나 전설에 바탕 하는 구술문화가 기록에 바탕 하는 문자문화로 변화해 왔고, 오늘날의 전자 매체시대에는 문자성에 바탕 하는 새로운 구술성(orality)의 문화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대의 상형문자에서 드러나듯이 문자와 이미지는 동일한 기원을 가지며,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진입했을 때 기억이 아닌, 기록의 의미가 강화되면서 독창성이나 작가 등 근대 예술의 패러다임이 확립되었다. 그래서인지 미술과 문자는 돈독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동양의 시서화의 전통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수행의 일환으로 경전을 베껴 쓰는 행위에 버금가는 오윤석의 작업은 문자문화 시대의 패러다임에 갇혀있는 듯이 보인다. 비록 컴퓨터 아트를 전공한 그가 작업에 컴퓨터를 사용한달지,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새로운 설치의 방식을 실험해본달지 하는 면은 있지만, 아직까지는 도구적일 뿐이다.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점은 굉장한 노동력이나 그럴듯한 시각 효과 보다는, 글자를 오려내어 원래의 텍스트에는 없던 층과 층의 사이를 벌리는 행위 자체에 내재한 의미라고 생각된다. 작가는 이것을 ‘시대의 간극’이라고 말한다. 오윤석의 작품은 실체가 아닌 관계성과 차이의 결과물이다. 그는 주어진 텍스트를 차이(공간적인 구분, 관계)와 연기(지연, 시간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현대의 해체주의적인 철학과 통하는 점이 있다. 오윤석이 다루고 있는 텍스트들은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의미작용의 연쇄, 즉 그자체로 이미 복합적인 차이 작용 및 참조관계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차이를 둔 면들에 빛이 가세하면서 문자의 흔적들은 무한한 기호의 놀이를 연출한다. 이러한 차이적 관계들은 단일하고 고유한 동일성의 범주를 해체시킨다.
박용선
박용선은 창조나 창작보다는 발견이나 관찰을 더 중시한다고 말한다. 예술(Art)과 사물성(Objecthood)을 구별하는 것이다. 양자를 가르는 명확한 기준은 없으며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만, 예술은 만들기에 내재한 작가의 의도가 명징하게 구조화, 형식화된 상태, 이를 투명하게 읽어내는 행위에 가까운 것이고, 사물성이란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모호하여 의미가 표면에서 수수께끼처럼 겉도는 상태에 가까운 것이다. 전자가 현재에 대한 각성된 의식을 요구한다면, 후자는 잠, 백일몽, 최면상태, 깊은 감정이나 집중 같은 몰입의 감정을 자아낸다. 대안 공간 반지하에서 전시된 것 같은,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낡은 박스 같은 것이 사물성을 잘 나타낸다. 그리고 만들어진 작품의 경우,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가령 비누로 수건이나 신발 같은 대상을 만든달지, 내부가 비어있는 나무 등이 그렇다. 사물의 형태를 비누로 옮기지 않고 비누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낸 작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작품 [희미한 단어들]은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어--기억, 정서, 신뢰, 믿음, 이해, 배려 등--를 여러 나라 말로 비누 위에 쓴 것이다.
반석위에 단단히 새겨도 모자랄 근본적인 가치들을 닳고 없어지는 비누에 새겨 놓는 행위에 내재된 덧없는 일과성(temporality) 내지 임의성을 보여준다. 박용선이 비누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로 든 향기 또한 그렇다. 그는 향기를 기억의 단서로 간주한다. 향기는 지금 여기와 단절된 기억의 저편으로 데려가곤 하며 뜬금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유년기와 모성에 대한 기억은 향기처럼 강력하지만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주체에게 지속적으로 회귀하지만 정확하게 재현될 수 없는 것이다. 각 작품이 설치되는 방식에 있어서는 연극성을 띈다. 자신의 주요 논문에서 예술과 사물을 구별하면서, 향후 현대미술의 방향을 가늠했던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가 지적했듯이, 사물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꾸며진 무대장치 속에 들어가게 한다. 연극 무대 같은 전시장은 작품 내부에 있는 핵심적 의미, 즉 개별 예술의 본질을 구성하는 본질 따위를 파악하기 보다는, 작품들 사이의 공간과 상황 속에서의 대상의 체험이 중요해진다. 연극적 효과를 자아내는 사물성은 미술의 부정인 셈이다. 여기에서 조각이나 회화의 관례적인 공간을 사라진다. 박용선의 작품은 대상이나 실체가 아니라, 지각과 상황 쪽으로 관객의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특정한 시공간 속에 놓인 몸을 부각 시킨다. 그것은 시각예술의 질을 가늠하는 세련된 시각성 보다는, 몸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인 후각이나 촉각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인희
이인희는 그녀가 사용하는 주된 재료인 수많은 물고기 비늘처럼, 개인적인 유년의 기억으로 반복적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물고기의 현재는 붕어찜 식당 구석에 수북이 쌓여있는 냄새나는 폐기물일 뿐이다. 작가는 아득한 기억과 잔인한 현실 사이에 놓인 괴리를 일종의 상처로 보고 치유의 행위를 시작하며, 그것이 작업의 내용이 된다. 치유를 위해 외부로부터의 폭력을 배제해야 하고, 일련의 차단과 밀폐를 야기 시킨다. 이인희의 작품에 나타나는 눈도 지느러미도 없이 늘어져 있는 물고기들은 현실의 폭력적 과정으로부터 괄호 쳐진 상태를 상징한다. 상처받아 치유해야할 대상으로서의 물고기는 때로 작가 자신으로 전치되어, 물고기 비늘 옷을 입은 작가가 작품에 등장하기도 한다. 물고기나 물고기로 전치된 자아,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쓰여 지고 버려진 사물들은 다시 그들이 연원한 곳으로 가기 위해 손상된 껍질을 재생시킨다. 비늘 자체가 버려진 것이며 다양한 물건들,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진 몸통들에 비늘이 붙여지는 반복적인 행위가 그녀의 작업이다. 반복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몸짓이다. 잃어버린 시간이란 모든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던 유년시절이며, 공간적으로는 상처받고 버려진 것들이 연원한 원초적인 고향, 가령 바다 같은 장소이다.
끝없이 밀려들고 빠지는 파도처럼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차이와 반복은 생명력 충만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보다 약한 것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폭력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의 재현적 질서가 그러하다. 작가의 눈에 들어온 사물에 모두 물고기 비늘을 붙이는 행위는 동일성의 질서를 재현하는 것, 즉 ‘같음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와 분화의 역량을 가진 반복’(들뢰즈)에 해당된다. 사물에 반복적으로 붙여지는 비늘은 의미로부터 미끄러지는 기표처럼 작동한다. 이인희의 작품에서 무로 만든 사과나 뼛가루로 만든 포도, 재로 만든 양말 같은 사물들이 기표와 기의 사이의 탈각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상처받은 것들은 수수께끼의 대상이 됨으로서 폭력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려 하는 듯하다. 사물 뿐 아니라 작품 [수면 공간]처럼, 밀폐되고 방치된 공간의 연출, 분절되면서도 이어지는 여러 개의 방들이 창문이나 시선을 통해 저 멀리 빠져나가게끔 하는 방식도 그렇다. 그 장소는 잃어버린 시간처럼 잡을 수 없는 공간이지만, 강한 현존성을 자아낸다. 물고기 껍질로 봉인되어진 사물은 단번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기호로 변모한다. 상처받은 모든 것들에 붙여진 물고기 비늘은 미끄러지듯이 신비와 불가지론의 영역을 향한다. 여기에서 변모는 탈주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박영선
박영선의 작품은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가지고는 있지만, 전형적인 애니메이션의 문법에 따르지 않는다. 또한 그것이 ‘예술화’되었을 때의 방식, 가령 현대적 영상작품이 요구하는 거대한 빈 벽과 어두운 공간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작품마다 개별적으로 모니터에 담겨져 상영되는 그녀의 작품은 일상공간의 연장으로서의 창이나 벽에 걸린 작은 그림 같은 형식을 가진다. 작품이 흘러나오는 모니터는 창이나 거울의 틀과 유사하다. 평범한 일상이 그렇듯이, 극적인 장면이나 사건, 내러티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 말대로 ‘내가 봤던 어떤 시야를 떠서 보여주는 것’이다. 목욕탕에서 때 미는 사람, 지나가는 고양이, 구불구불한 길을 통과하는 자동차들이 그것에 걸 맞는 풍경의 세트 위에 배치되어 크고 작은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그림에 가깝다. 이와 대조되는 분업화, 노동 집약화 되어 있는 산업 기술화된 애니메이션은 전형적인 캐릭터와 기술전결 식의 완결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애니메이션의 실사기술은 재현주의에 충실하다. 반면 작가는 스스로의 작품은 ‘어눌하게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한다. 전형적인 애니메이션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시공간적 간극을 벌여놓음으로서, 움직이는 장면들은 매끄럽지 못하고 덜그덕 거리는 느낌을 준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대한 환영을 만들어내기에는 부족한 프레임 수는 마찬가지로 서사를 지연시킨다. 넓게 벌어진 공간적인 간격은, 즉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나 서사가 가능하기 위해 선적 흐름을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시간성에 대한 공간의 개입, 이 부분은 화가 출신으로서의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상대적으로)고정된 장면이나 벌여놓은 간극은 그림이 가지는 공간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그림은 아니다. 한 순간의 장면에 고정된 그림이 가지는 잠재적인 움직임을 실제적인 움직임으로 만들려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그림에 강도가 더해진다. 작가는 일상적인 풍경에 얹혀진 ‘참새 떼, 사람들, 자동차들, 바람, 동물들이 화면을 지나칠 때 화면에 감도는 강도’를 표현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특히 장면을 가로지르는 연기, 수증기, 구름 등의 움직임이 재미있다. 작가는 정지된 화면의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응결시켜야만 하는 회화의 운명에 흐르는 시간이라는 연속성을 포함시킨다. 그것은 회화라는 단일평면의 자족성이 아니라, 삶을 향해 개방된 시간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박영선의 회화 같은 애니메이션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효과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순간을 확장하고 있다.

홍원석
홍원석의 그림에서 깊고 푸른 밤을 가르는 노란 빛은 근대미술의 신화가 되어버린 그림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낭만적인 정서가 깔려 있다. 반 고흐의 그림은 이미 산업혁명을 겪고 난 시대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연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삶에 비추어진 마술적이고도 초자연적 비전이 있었다면, 홍원석의 그림은 자동차로 이동하는 삶이 일상이 된 현대의 풍경이다. 반 고흐의 빛이 척박하고 비루한 현실로부터 무한한 천공으로 시야를 돌리게 하듯, 홍원석의 그림 속 노란 빛은 일상을 소격하는 작용을 한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시간적인 움직임 속에서 전조등 앞에 갑자기 등장하는 장면들은, 무대 위에 갑작스레 켜지는 조명처럼, 어둠 속에서 지나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속된 시공간의 절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절단면 속에는 현실적 요소들이 있지만, 생경한 조합으로 인해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변모한다. 황량하면서도 매혹적인 푸른 공간 속의 자동차는 때로 망망대해 위에 표류하는 작은 배나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우주선 같은 모습이 중첩된다. 자동차 외부는 외계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 홍원석의 작품에서 야간 운전은 무한한 시공간 속에 홀로 있으며, 뚜렷한 목적 없이 유목하는 존재 조건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체와 주체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경험은 인생에 대한 비유가 된다. 또한 자동차 안에서 외부를 보고 경험하는 주체는, 모든 것이 현실과는 유리된 컨트롤 박스에 의해 조정되는 현대적 생산과 소비의 조건을 투사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 앞의 현대인을 떠오르게 한다. 어떤 장면이 등장하든 그것은 지나갈 것이고 운전자는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환상을 끝장내는 충돌 사고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홍원석의 그림 속에 내재된 낭만적 정서는 소우주 속의 안전함, 외부와 차단된 거리감으로 인해 가능하다. 전조등 앞에 떠오른 다양한 장면들 속에는 물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재난 등 당면한 급박한 현실이 섞여 있기도 하지만, 머나먼 풍경일 뿐이다. 그의 그림은 혹독한 삶의 조건 속에서 탄생한 낭만주의가 동화 같은 아늑한 소비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역설을 상기 시킨다. 그러나 행복한 상상의 이면에 불안이 있듯, 환상의 이면에는 현실이 있다. 작가가 헤쳐 나가야 할 세상을 컴컴한 밤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현실을 바라보는 비관성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인 한계 저 너머까지 확장된 밝은 전조등은 한계를 모르는(또는 무시하는), 요컨대 낭만적 주체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내부 에너지를 상징하고 있다.
출전 | 대안공간 네트워크 Door to Door 6 대전지역 작가 5인의 비평 심포지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