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린 수성(獸性) 고발

인 간이란 무엇인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존재다. 그래서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대로 인간의 바탕이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상황의 동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가령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살인이라는 기준만으로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살인을 하기 바로 전에 어떤 선행을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닌 이 양면성은 미적 측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미인을 놓고 보자. 얼굴과 몸매가 아름다운 미인은 누구나 선망한다. 팔등신으로 쭉 빠진 몸매에 오뚝한 코, 시원스러운 눈매를 지닌 미인은 미인대회에서 상을 탈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 미인의 창자에 든 똥도 아름다운가.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 저을 것이다. 아름답지 않다!

원효대사는 당나라에 불경 공부를 하러가다 하루 밤 머문 토굴에서 이 진리를 발견했다. 깜깜한 밤중에 달게 마신 물이 아침에 눈을 떠 보니 해골 속의 물이었던 것이다. 일체유심조, 그래서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

이 인간의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정복수다. 지난 30여년간 그는 인간이 지닌 양면성을 화두로 작업을 해 왔다. 그 중에서도 미와 추는 그의 작품세계를 관류하는 주제다. 겉보기엔 아름다운 미인이지만 뱃속을 들여다보면 더러운 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그러니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 그의 그림은 마치 불경의 한 구절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인체를 냉혹하게 해부하여 우리의 눈앞에 드러내 보인다. 자, 이것이 네 몸이요 살이다. 그러니 보라! 네 몸의 생생한 모습을.





정 복수의 작품에는 파편화된 인체의 단편들이 자주 등장한다. 팔 다리가 없는 기형의 몸뚱이, 그것은 공해가 극심해진 미래의 어느 날 출현할지도 모를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어디 그 뿐인가. 몸통의 한 가운데를 관류하는 내장에다 좌우로 포진해 있는 수많은 눈들. 그 시선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아마 정복수만큼 인간의 문제를 파헤치면서 직설적으로 발언을 하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유독 눈이 많이 등장한다. 그 눈들은 몸통의 여기저기에 박혀 있다. 이 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감시하는 눈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 눈들이 모두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 그림이 평면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 눈들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눈과 정통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 눈을 바라보라. 그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 눈은 거울과 같지 않은가. 그 거울에 우리의 모습을 비쳐보면서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고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법하다.

1980 년대 초반에 정복수는 불쑥 인간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초기작은 가족도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직선으로 줄을 그은 그 밑에 포진해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다시 그 아래에 있는 나와 형제들 등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 그림에서 그는 가족의 모습을 대머리의 평범한 얼굴로 바꿔놓았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이 바로 변형 캔버스 연작이다. 하드보드지 위에 인체를 그리고 여백을 잘라냈다. 연필심을 갈아 섬세하게 칠한 그 그림들은 번질거리는 인체의 피부로 말미암아 마치 야수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대머리의 인간들은 원초적인 인간상을 보여주었다. 섹스를 하는 인간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인간들, 표범과 같은 무늬를 지닌 인간들 등 당시 정복수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인간의 심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수성을 고발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일련의 인간 연작을 발표하면서 정복수는 문제작가로 부상했다. 80년대 군사정권 하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그의 작품은 시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간주되었다.

이 무렵 정복수의 그림에 빈번히 등장한 손은 인체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드보드지 위에 인체를 그리고 잘라서 전시장 벽에 부착한 그 그림들은 몸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는데 억센 손이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의해 조종당하는 인간에 대한 풍자를 통해 거꾸로 권력을 탄핵하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것이다.





90 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복수의 그림은 강렬한 힘에서 벗어나 퇴화된 인간상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변천을 요약하자면 거대한 것에서 연약하고 퇴화된 것으로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비례하여 한국사회는 강력한 통치에서 벗어나 점차 다원화된 사회로 이행해 갔다.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개인의 발언이 힘을 얻게 되는 넷(net)의 사회, 마치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얽혀 세포를 구성하는 웹상의 공동체사회는 원시 씨족사회로의 회귀를 보는 것과 같았다. 질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를 연상시키는 이 새로운 사회의 탄생은 보다 민주적인 사회로의 이행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비록 여론 조작이라는 혐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긴 했지만 인터넷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험은 선의의 의미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정복수의 그림에 등장하는 퇴화된 인체의 이미지는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예리한 풍자다. 그가 인간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사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하는 점을 말해준다. 그의 그림은 권력에 의해 길들여지는 인간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이며 동시에 권력에 대한 탄핵의 칼이다. 그는 80년대 초반에 퍼부었던 직선적이며 도발적인 풍자에서 벗어나 이후에는 변형되거나 왜곡된 인체의 묘사를 통해 기관이 없는 인간상의 표출에 몰두해 왔다. 인간이 지닌 두 개의 서로 다른 얼굴, 그 양면성이야말로 정복수 작업의 요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