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는 크게 달력에서 모티브를 얻은 숫자 그림, 달리는 자동차에서 찍은 속도감 있는 사진들, 그리고 벽면 위에 걸 수 있게 제작된 모자이크로 되어 있다. 이 세 종류의 작업은 일견 이미지나 매체적 측면에서 상호 연결고리를 가지지 못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시간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담고 있다. 먼저 숫자 작업이다. 여러 개의 숫자가 중첩되어 깔끔한 외곽선과 색채를 가지는 작품의 기원은, 지금은 누가 집에 걸까 싶은 하루에 한 장 씩 찢는 달력이다. 보통 3-4개의 숫자가 겹쳐 복잡한 형태를 이루는 데, 깔끔하게 자기 흔적을 없애지 못하고 찢다만 달력에서 발견되는 숫자 파편들의 이미지이다. 숫자는 특유의 정확성을 잃고 뒤섞인 채 방치되어 있다. 원래 그러한 종류의 달력이 가지는 한정된 색채--빨강, 파랑, 검정 등--를 넘어, 그의 다른 작업인 모자이크처럼 밝고 화사한 색상으로 덧입혀진다. 시간이라는 묵직한 주제는 기분에 따라 바꿔 입는 옷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드러난다.

숫자작업은 종이에 과슈로 드로잉 한 다음, 캔버스에 오일로 옮긴다. 대부분 바탕은 밑칠만 되어 있어 군더더기 없이 중첩된 시간의 의미만을 부각시킨다. 예외적인 작품이 [하얀 7일]인데, 이것만 푸른 바탕이 있고, 잘린 것 없이 그대로 보이는 숫자 7일이 보인다. 그 다음날들인 8일과 9일이 뒷면에 배치된다. 그날은 작가 개인에게 그 이후의 날들까지 영향을 준 중요한 날이라고 한다. 타인들은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방식은 뒤섞인 숫자들처럼 객관적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달력에서 연원한 숫자들은 기억과 관련되어 있지만, 정확한 순서에 따르는 선조적 질서와는 무관하다. 숫자 특유의, 분명한 경계를 이루는 선들이 교란되어 있는 권숙창의 작품은, 숫자가 상징하는 바의 계산이라든가 인식적 요소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중첩된 면들을 채우는 조화로운 색채들은 깨진 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듯하다. 거기에는 그 언제이건 질서를 중시하는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패러다임이 되어온, 숫자로 조율된 합리적 조화 대신에 비합리적 조화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전환에서 색채는 큰 역할을 한다. 사진 작업에서도 객관적 대상과 그것이 가지는 명료한 질서에 대한 의식은 부재하다. 대신 다양한 굵기와 색으로 가시화된 빛의 궤적이 남아있다. 사진은 멕시코와 한국 등지에서 자동차로 100키로 이상 달리면서 찍은 것으로 거의 핀트가 맞지 않고 속도감만 강조된 추상적 이미지이다. 이러한 선들은 모자이크 작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색유리 조각을 붙여 완성한, 새 한 쌍의 비상을 표현한 작품에는 빠르게 흘러가는 자동차 불빛 이미지로 채워진다. 깃털로 뒤덮인 따뜻한 유기체를 차갑고 무기질적인 표면으로 전치함으로서, 날아가는 새의 재현보다는 속도감에 방점을 찍는다. 새의 외곽선 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다. 자연은 물의 흐름, 빛의 흐름 등으로 시간의 흐름을 예시하곤 한다. 모자이크 특유의 분절화 된 단위들은 반사되며 흐르는 이미지에 리듬을 부여한다.

비잔틴 모자이크로 제작된 작품은 공존하고 중첩된 시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진이나 색유리 모자이크 보다는 숫자작업과 더욱 가깝다. 이 전시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가장 공을 들인 이 작품은 어느 휴일 날의 여행을 떠올리며 제작한 것이다. 작가는 멕시코에 유학 가서 틈틈이 여행을 많이 하였다고 하는데, 그 경험이 모자이크라는 분절화 된 단위에 중첩된 시간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진다. 오전에 만난 사슴을 작품의 전체 실루엣으로 삼고, 그 내부를 구획하는 수평적, 또는 수직적인 선들이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사슴 안의 사람은 작가 자신일수도 있고 동행인일 수도 있다. 오후에 내린 비에서 끌어낸 수직선들과 뒤에 역광을 받고 앉아 있는 사람이 모습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대를 표현함과 동시에, 사슴 실루엣 속의 다양한 장면들을 주체의 상념 속 그것으로 변화 시킨다.

새를 표현한 색유리 모자이크보다 더 두툼하고 따뜻하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비잔틴 모자이크는 마음 속 풍경을 표현하는데 더욱 적절한 듯하다. 일일이 잘라서 붙인 다양한 색 돌들은 각각의 시공간으로 구획되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상념을 표현한다. 밝은 색채는 1999년부터 2004년 초까지 유학 갔던 중미의 지역성을 반영한다. 작가는 그 체험을 ‘야생에 갔다가 집에 돌아온 것 같다’고 표현한다. 거기에 가서 비로소 한국에서의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밝고 긍정적인’ 그것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 계기가 멕시코에서는 시간과 날짜 가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에 있었다고 말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멕시코 유학은 거기에서 꼭 무엇을 배워오거나 특별한 경력을 쌓았다기 보다는, 이유 없이 시간에 쫒기는 한국에서의 삶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온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그가 멕시코에 가서도 한국에서의 작품 스타일을 고수하고, 유학 갔다 와서 다음해 한국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도 그 스타일이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지금의 작품과는 단절되어 있는 이전 작품들--작가 스스로도 남의 작품처럼 언급하는 1회(97), 2회(2003, 멕시코), 3회(2005) 개인전 작품들--은 인류의 문화유산인 오래된 벽화나 문자에서 모티브를 얻은 중층적이고 오래된 느낌을 주는 화면이 특징적이다. 여러 재료를 사용한 바탕 면 위에 남겨진 선이나 얼룩들은 작가의 충동과 열정을 담은 액션 페인팅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오래된 인공물이나 자연의 이미지는 중첩된 시간에 대한 요즘의 관심과 겹치는 부분이지만, 표현방식은 큰 차이가 난다. 이전의 작업이 회화적이라면 요즘 작업은 디자인에 가깝다. 회화와 디자인 사이에 존재하는 벽화 매체의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작가를 둘러싼 변화된 풍토가 남긴 강한 흔적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권숙창에게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그것이 기억과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깊숙한 곳으로 부터 꺼내어진 듯하다. 그에게 시간이란 작품의 형식 뿐 아니라, 작업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야기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권숙창의 작품은 객관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벗어나 근원적인 시간을 향한다. 근원적인 시간을 찾기 위해 예술이나 종교는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열된 덧없는 시간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것은 공(空)같은 초월적인 세계관을 낳기도 하였지만, 그의 작품은 잃어버렸다고 가정되는 근원적 시간을 찾으면서도, 철저히 감각적인 즐거움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작가는 단조로운 자기반복으로부터 탈피하여 얼마 전의 자신과 선을 그으며 나아간다. 그러나 진보는 연대기적인 시간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회귀를 향한다. 회귀는 ‘영원에 대한 향수’(엘리아데)에 의해 추동되지만, 명확한 중심이나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명한 멕시코의 시인이자 이론가인 옥타비오 파스는 역사가 최초의 신화적 시간에 대한 격하이며, 죽음으로 끝나는 과정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원시인들이 태초의 시간으로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것은 역사의 변화와 소멸을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인간적 삶이 영위되는 일상적, 세속적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거룩한 시간 덕분이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근원적 시간에 가장 가까운 것은 축제와 혁명이다. 작가가 이 땅을 떠나 도착한 미지의 대륙은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공공 벽화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혁명기 멕시코의 유산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혁명이지만, 예술과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동시에 축제였다. 양자는 모두 일상과 단절하는 시간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옥타비오 파스에 의하면 역사는 생산의 축적과 소유에 근거한 불평등의 시작이며, 시원적 사회로의 복귀란 단순히 퇴행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말한다. 근원으로의 회귀란 바로 현재로의 회귀를 말한다. 혁명을 뜻하는 프랑스어 revolution은 되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revolvere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천체의 순환적인 움직임 속에서 주기적인 복귀를 나타내는 혁명이란 단어는, 단절이라는 말이 되어 영원한 전진 속에 미래를 열어 주었다.

옥타비오 파스는 역사를 진보로 파악하는 아이디어의 기원은 종교적이며, 아이디어 그 자체는 초종교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대자연이 하나의 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 및 이러한 장치를 역사와 사회의 전진운동에 일치시키는 추론의 결과이다. 이와 같은 역사주의historicism는 근대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19세기에 원숙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근대의 역사주의는 그자신의 숨겨진 전제인 신학적인 색채를 지우고, 초역사적이고 구제적인 의도를 부정함으로서, 역사적 사건 그 자체만을 인정하게 된다. 근대적 시간은 결정적으로 탈신성화 됨으로서, 죽음을 향하는 덧없는 지속이 된다. 이 덧없는 지속 속에서 현대인은 끝없이 고갈되어간다. 역사주의적 비전에 근거한 시간관은 다양한 시간들 간의 의미 있는 관계가 아닌, 추상적 현재성에 개인을 한정시킬 뿐이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조차 힘겨운 상황에 놓인다. 따라서 시간을 주요한 화두로 삼아왔던 작가 권숙창의
멕시코 행은 진보의 최첨단에 서있는 1세계 행 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권숙창은 내적, 외적으로 끊임없이 여행하면서 잃어버린 시공간을 찾고자했다. 그것은 목표 없이 떠도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작가는 삶과 예술에 설정된 중요한 과제를 찾아낼 수 있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우리에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예술작품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예술작품을 통해 되찾은 시간은 우리에게 영원성의 이미지를 준다. 그것은 상식이나 지식과는 달리,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의 재확인, 강조, 꾸밈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의 독특한 방법론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기호들이 펼쳐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기호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연상의 사슬을 따라 서로 다른 속도로 전개된다. 권숙창의 작품에도 여러 세계가 공존한다. 그가 멕시코로부터 들여온, 수천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비잔틴 모자이크는 그 자체만으로도 세계의 다원성을 예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재료의 특수성만 가지고 한 작가의 작품을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은 연속적인 하나의 선, 혹은 주체의 활동의 소산이 아니다. 작품은 형태의 전체화를 거부하고, 다양한 층위의 차이성을 보이고자 한다. 여기에서 과거와 현재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이질적인 두 요소’(들뢰즈)이다. 작가의 기억이 담긴 다양한 이미지들이 물감이 아닌, 다색 모자이크로 구현되었다는 것은 다양한 시공간의 공존에 대한 매우 적절한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연속되면서도 구별되는 돌조각들의 과감한 배색은 자연이나 연대기적인 시간질서로부터 해방된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 층위의 시공간이 혼합됨으로서 생성하고 변화하는 다수의 세계가 드러난다. 각각의 모자이크 파편들은 하나의 전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모자이크의 크기와 방향, 색상은 변화무쌍하게 뻗어가는 횡단 선을 따라 전개된다. 이 횡단 선들은 파편 조각들을 주관한다. 이렇게 이룩된 파편 속의 새로운 질서는 무차별적인 시간의 파괴가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결정(結晶)화된 단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