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문. 그는 흙에 미친 사람이다. 그 이력이 벌써 삼십 년을 넘어섰다. 흙으로 토우를 만들고 도자기를 빚은 지난 세월. 시간은 흘러 이제 그의 머리에도 허연 서리가 앉기 시작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 막사발을 빚는데 온 정력을 쏟고 ‘세계 막사발 장작가마 축제’의 창설자로서 돌보는 사람조차 별로 없는 이 분야를 세계화하는 데 큰 공헌을 한 그다.

필자는 그를 1982년 겨울에 대성리에서 처음 만났다. 같은 예술의 길을 가는 작가로서 ‘대성리 35인전’에 참가하면서였다. 그는 차가운 강바람이 전선줄에 부딪쳐 잉잉대는 대성리 화랑포 강변의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왕겨 불에 토우를 굽고 있었다. 주먹만한 크기의 토우들은 그가 왕겨를 헤집을 때 마다 시커멓게 탄 감자처럼 튀어 나왔다. 얼굴이 이지러진 다양한 형상의 토우들은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선 보였다.

“저 언덕 이 물에는 재울 한도 많이 있고/우리 삶의 치욕마다 깨울 혼도 많이 있네/재울 한 깨울 혼/이 손으로 모두 모아/혼 깨워서 한 재우고, 한 재워서 혼 깨우면/빗재에 앉은 이 몸이 눈물에 풀려 뜨겠네/둘러보면 이 땅에는 잠재워야 할 한도 많이 있고/불러야 할 혼도 많이 있네/흙을 빚어 토우를 만드는 뜻은/한을 풀어내고자 함이요/나무를 깎아 장승을 세우는 것은 혼을 불러 깨우자는 뜻입니다.”(김용문, ‘빗재에 걸터앉아 장승을 깎자하니’ 전문)

흙을 빚어 인형을 만든 토우는 김용문이 신라 토우의 혼을 오늘에 불러낸 것이다. 천년의 세월을 성큼 건너서 그것들은 다시 김용문의 작품이 돼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고단한 삶을 두 손 크기의 얼굴에 감추고 웃음과 여유로 삶을 살다 간 이 땅의 민중의 모습이었다. 김용문은 빗재에 자리를 잡고 쉬지 않고 토우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수천 개의 토우들은 민중의 한을 담고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이용하여 한바탕 흐드러진 굿판을 벌였다. 김용문의 토우 퍼포먼스는 80년대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풍자이자 우리의 굴곡 많은 역사에 대한 은유였다.




1983년 이래 김용문은 몇 차례의 퍼포먼스를 발표하였다. 1983년에 지리산 고사목지대에서 연 ‘매장, 그리고 발굴전’을 비롯하여 1984년의 ‘수장제’, 1987년의 ‘옹·관·장전’, 1988년의 ‘만파식토전’, 1990년의 ‘h 두향제’가 그것이다. “삶과 죽음, 그것이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일련의 퍼포먼스에 일관되게 흐르는 정서는 한이다. 이 땅의 역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기층 정서는 그렇게 그의 작품을 통해 발현되었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조건이다. 자연의 이치로 생각하자면 죽음은 삶의 연장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시루 속에 담긴 떡의 표면에 새의 발자국을 닮은 형상이 나타나면 망자가 ‘새’로 거듭 태어난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영혼이 생명을 다한 몸에서 벗어나 저승에 당도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돈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중음신(中陰神)인 것이다. 그래서 망자의 영혼이 무사히 저승에 당도할 수 있도록 베가름을 한다. 긴 무명천의 가운데를 몸으로 찢어나가면서 무당은 망자의 가엾은 영혼이 저승에 가기를 기원하고 구경꾼들은 노자 돈을 천위에 놓아주는 것이다.

김용문의 ‘수장제’는 충북 단양의 수몰지구에서 열렸다.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많은 주민들이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한을 달래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그는 한바탕 신명나는 굿을 벌이고 여러 점의 토우를 강에 던졌다. 그것들은 강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수 만 년이 흐른 어느 날 밭을 가는 농부에 의해 발굴될 것이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있듯이 시간은 강을 밭으로 바꾸게 될 것이고 그 때 밭을 가는 농부의 호미에 걸려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 아닌가.

김용문의 토우는 그 표정이나 생김생김이 토종 한국인을 꼭 닮았다. 사지는 흡사 문둥병자처럼 뒤틀려 있으며 이지러진 얼굴은 우는 듯 웃는 듯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띠고 있다. 넓적한 얼굴은 영락없는 우리 이웃의 모습이다. 대충 뭉뚱그린 팔 다리와 옷을 걸치지 않은 맨몸, 그 위에 얹힌 납작하게 짓눌린 민머리의 얼굴에 담긴 갖가지 표정이 빚어내는 집단적 분위기는 다름 아닌 이 땅에서 살다 간 우리 조상의 모습이요, 이 시대 민중의 삶인지도 모른다.



흙에서 태어난 인간이 흙으로 귀의하듯 김용문은 토우에 굽이굽이 서린 민중의 한을 문신처럼 새겨 넣고 다시 흙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의식을 집전하는 제사장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김용문의 토우는 몸의 상징이다. 언젠가는 죽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몸, 그 유한한 존재가 문화의 대리물로서의 토우에 몸을 의탁하여 영겁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강의 어느 바닥에는 지금도 김용문의 토우가 드러누워 있을 것이다.

그가 옛날에 제주도 이호동 골왓마을의 바닷가에서 떠내려 보낸 항아리는 지금쯤 어디에 정착해 있을까. 필경 그 항아리에 토우 몇 점쯤 붙어있었을 터인데 파도에 흘러 흘러 떠내려 간 그것이 지금쯤 아프리카 한 원주민 어린이의 장난감이 된 것은 아닌지. 같은 토우이되 한 곳에서는 한의 상징이 다른 곳에서는 장난감이라니 문화란 참 이상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