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을 위한 공공 문화 표현 집단 퍼포먼스 반지하’가 인천 금창동 일대에서 벌려놓은 작업 ‘2008 골목길에 뿌려진 씨앗 이야기’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공공미술 운동의 모범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퍼포먼스 반지하’는 예술 감독 드라마 고(고정환)를 비롯하여 미술가 및 지역 문화 활동가들로 결성된 단체로, 수년간 이 지역에 실제 거주하면서 공공미술 사업을 펼쳐왔다. 지하철 역사와 근접한 곳들이 대개 휘황한 상가 건물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금창동 일대는 지하철과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도 옛 마을의 풍광을 간직하고 있는 드문 장소이다. 그러나 이곳은 상업지대화 된 옛 동네처럼 ‘유럽의 뒷골목 같은 분위기를 가지기에 아름다운’--삼청동을 지나가는 여대생들로부터 엿들은 말이다--그런 곳은 아니다. 헌책방, 오래된 학교 건물, 야트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곳은, 오랫동안 살아왔던 지역 거주민의 정겨운 삶의 터전이지만, 밀어 내기 식 공사판 와중에 있는 (재)개발 공화국에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재개발 논의가 끊이지 않는 불안한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에서의 많은 재개발 사업이 그렇듯이, 기존의 삶의 터를 밀어내고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면 원래 거주민들은 대개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 그곳은 정책 입안자들과 투기세력에 의해 개발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살아왔거나 그곳을 소중히 여기는 주체들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소수의 이익에 기반 하는 재건축 사업에 의해 삶의 주체가 개발의 객체가 되곤 하는 이러한 장소에 필요한 것은 삶의 터와 지역 거주민의 자생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강한 긍정이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딱히 미술단체라기 보다는 지역 문화운동 그룹과 더 활발한 연대를 맺고 있는 퍼포먼스 반지하의 올해 공공미술 사업은 단지 마을을 예쁘게 꾸민다는 개념을 넘어서, 타자화 된 이들의 삶의 방식을 다시금 전경에 배치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것은 마을의 공영주차장 맞은편에 자리 잡은 마을 까페 ‘기억과 새로움의 풍경’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된 지역주민 대상의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확인된다.

주민과 함께 진행된 공동체 프로그램은 재개발에 관한 영상을 시청하고 대안의 사례를 살펴보며, 마을의 변화를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문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이들이 주체가 되어 공론화하려 한다. 다수의 삶이 배어있는 문화와 자연을 짓밟는 일방적 ‘진보’가 아닌, 지속 가능한 삶으로서 생태적 삶과 재활용에 대한 담론은 텃밭 가꾸기와 재활용 수집 노동을 하는 노인들이 많은 이 마을의 관심사에 닿아있다. 11월 8일과 9일에 공영 주차장에서 있었던 [쓱싹뚝딱 재활용 목공행사]는 안 쓰는 나무를 재료로 하여 지역주민들과 함께 나무화분, 나무액자, 앉은뱅이 의자를 만들어 본 목공작업이다. 지역주민을 상대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 마을 카페에도 나무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다. 마을 카페 안에는 카페를 만드는 장면이 담긴 사진과 마을 씨앗주머니 등이 걸려있고, 그 아래에는 공공미술이나 지역 문화 운동 관련 책자 등이 빼곡히 꽂혀있다.

마을 카페 ‘기억과 새로움의 풍경’은 작가는 물론, 마을사람들과 행인들에게 개방된 곳으로 수다도 떨고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나누는 곳이자, 다양한 사업들이 펼쳐지기 위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다. 마을 카페 이름에 포함된 ‘기억’과 ‘새로움’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은 ‘오래된 미래’처럼, 이미 있었지만 잊혀졌던 것에서 새로운 대안의 가치를 찾아내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오래된 것, 가령 땅이나 노동 같은 가치는 지구 위에서 삶을 이어온 인류의 보편적 가치였으나, 교환가치를 물신화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유린된 이후 괄호가 쳐져 버렸다. 예술이 땅이나 노동에 근거한 리얼리즘을 외면하는 사이에,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퍼포먼스 반지하는 집집마다 있는 작은 텃밭들에 주목했다. 이 마을의 텃밭은 등기상 개인의 소유재산이기 보다는 대부분 시유지 땅을 조금씩 점거하면서 형성되었다.

철도가 지나가면서 고립된 섬처럼 된 이 마을의 특이한 지형도도 이러한 텃밭들이 많이 생겨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들은 이름 없는 텃밭들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바람씨앗 텃밭’, ‘마늘 할머니 텃밭’, ‘농사샘 텃밭’, ‘쪼끄만 할머니 텃밭’, ‘노랑 집 텃밭’, ‘황토 집 텃밭’ 등등. 이 마을에는 개인 집 앞 뿐 아니라, 공동의 공간 역시 텃밭으로 꾸며져 있다. 빈 집이 허물어진 곳에는 마을 공용 텃밭이 자리하고 있는데, 스티로폴 박스나 대형 플라스틱 용기에 채소가 심어져 있고, 두레박 모양의 화분은 그곳이 오래된 우물자리였음을 일깨워준다. 여기에서는 옛날의 우물가가 그러했듯이 사람들 간의 소통의 장이 형성된다. 이들은 작은 텃밭들이 잘 드러나게 맞은 편 벽면을 깨끗이 정리하고 색칠 한다. 가지런히 놓인 화분 뒤에 깔끔하게 칠해진 벽이나, 외벽을 칠하고 각목으로 골조를 댄 작은 슬레이트 지붕 등은 본래 있었던 풍경을 지워 없애는 식의 환경개선이 아니라, 있던 것들을 새롭게 재맥락화 하는 작업이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벽화가 주로 생산되는 공공미술 사업의 강박관념을 벗어난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벽에 그리기 보다는 그 앞의 자그마한 텃밭들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기 위해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했을 뿐이다. 그리기가 행해진 경우에도 해당 텃밭의 사연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소박하게 풀어낸다. 가령 작품 [창영동 할매 이야기]는 텃밭 앞의 벽을 연분홍으로 칠하고 만화를 그려 넣었다. 그것은 과거에 만화가게를 했던 할머니네 집을 표현한 것이다. 벽돌의 선을 만화를 이루는 칸으로 이용하여 텃밭 가꾸는 모습을 포함한 잔잔한 이야기를 담았다. 작품 [나눔 텃밭]은 텃밭 앞의 담장을 밝은 주황으로 칠하고, 그 위에 작은 그림들이 리드미컬하게 배열되어 있다. 무, 배추, 김치 그림과 더불어 김치 담그는 모습이, 고추와 더불어 할머니가 고추를 먹는 모습이, 상추, 깻잎과 더불어 쌈을 싸는 손이 그려져 있다.





텃밭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 그 산물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제의 텃밭과 같이 보여 지면서, 텃밭을 일구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부각된다. 또 다른 밭 옆의 벽화는 가까이 다가가서야 자신의 자세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무로 틀을 댄 작은 슬레이트 지붕이 벽화를 보호해준다. 벽화들은 기념비적이긴 하지만, 대서사가 아니라 소서사들로 채워진다. 소서사들도 공적 장소인 거리에서 들려지고 보여질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소서사들은 전형성을 띄고 있는 것이며, 사적인 것을 깨작거리는 식의 진짜 하찮은 이야기들이 아니다. 이 프로젝트의 참여자들은 매우 헌신적이긴 하지만, 미술가나 활동가로서의 과도한 자의식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것도 오랜 경험의 산물이라고 보여 진다. 또한 그들의 활동에는 힘든 육체노동도 포함되어 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의 집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철제계단과 받침대를 만들어주며, 낡은 벽은 깔끔하게 칠해서 허름해 보이는 집은 화사한 새 옷을 입힌다.

기존의 구조에 첨가된 인공 구조물 역시, 텃밭이라는 틀을 유지 한다. 자투리 땅 앞에 돌과 나무를 이용한 오솔길을 만들었고, 마을사람들로부터 기증받은 수중식물을 띄워놓은 작은 인공연못도 조성되었다. 작품 [하루, 터]는 빈 공간에 나무를 심고 벤치를 만든 ‘미니 공원’이다. 이들의 작업은 씨앗 뿌리기나 나무심기라는 행위에 압축되어 있다. 일회성이 아니라, 한 장소에 씨앗을 뿌리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지향하는 활동이 그것이다. 주민 및 지역 문화 활동가들과 연대한 이러한 공공적 실천들은 공격적인 현대사회에 의해 훼손되어 있는 지역 공동체를 재건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이 동네의 작은 텃밭들, 그리고 마치 액자처럼 그것 자체에 주목할 만한 가치를 부여해준 공공적 실천들은 지상의 한 뙈기 땅일지언정 그 속에서 돌봄과 자생을 향한 삶과 예술의 모습을 언뜻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주변화 되고 떠도는 삶에 지속적인 관계망을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활동은 장기적으로, 흔적기관처럼 모호하게 남아있는 공동사회에 그 본래의 가치를 일깨워주는데 있다. 이를 통해 이 작은 마을에서는 도시의 익명성과 파편성을 통합과 소통으로 전환시키려 한다. 현재 지자체에서 이루어지는 관주도의 개발 사업들이 소수로 집중되는 사유화를 가속시키는데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생성된 풀뿌리 문화운동은 한 번도 제대로 있어본 적이 없는 공공성의 개념을 일깨우는데 집중된다. 공공성은 공동체와 참여라는 가치에 의해 실현된다. 그러나 이 모두는 실제로는 불확실한 것이며, 오직 실천에 의해서만 조금씩 쟁취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은 예술가나 지식인의 머릿속에나 있는 이상주의가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누적되어 형성되어온 삶의 굴곡 면들을 섬세하게 따라감으로서 성취될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금창동 작은 마을 사이사이로 난 작은 골목길은 차도 안 들어가는 불구의 거리가 아니라, 모세관처럼 삶의 깊숙한 곳까지 뻗은 소통 통로가 되었고, 낡은 담벼락은 여러 겹 포개어진 삶의 이야기를 공공적으로 펼쳐내는 작은 스크린이 되었다.

삶의 터전마저도 이윤을 창출하는 시장가치로 환원하는 시장만능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이 지역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 불특정 다수의 경쟁자들이 아니라, 상호부조의 주체로 삼는 것이다. 텃밭과 담벼락, 골목길은 자신들의 운명을 어디선가 결정되는 정책의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상호적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갈 것을 촉구해 나가는 매체가 된다. 이 장소들에서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이 된다. 이곳 주민들이 채마밭을 가꾸거나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행위는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주변에 식물을 심고 버려진 것들을 다시 순환시키는 행동은 전체 사회의 이익에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들의 삶의 방식은 문화의 매개를 거쳐 공적 영역으로 꺼내어진다. 역으로 이 장소에서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이 된다. 개발이라는 큰 밑그림이 늘 이곳의 주민들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데, 그것은 삶의 터를 한순간에 박탈당하는 문제이니 만큼 자신의 문제로 깊이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공공 정책은 공론화 과정만 제대로 거쳐도 다수의 이익에 부합되는 옳은 방향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반면 소수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정책 결정은 협잡의 과정이 그러하듯, 대부분 비밀스럽게 진행된다. 공공성을 가치에 두는 문화운동이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는 정책 결정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타자화 되고 주변화 된 이들의 목소리를 결집하는 일은 이들의 문화적 실천을 정치적 행동과 연결시키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누가 누구를 계몽시킨다는 것이기 보다는, 지역 주민이 개별적으로 가지는 생각들을 공론화시키는 장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의사소통의 장이 바로 공공영역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적 실행의 주체가 장기적으로 한 지역에 거주하면서 지역의 문제를 내재적으로 이해하면서 주민들과 동지적 신뢰관계를 쌓아온 활동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사업의 지속성 속에서 문제의식 및 해결 방식은 더욱 세분화되고 차이를 형성하게 된다. 이곳에서 실행된 공공미술, 즉 공공영역에서의 미술은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 따라 점차 분리되어온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교차시키는 방식을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출전 | 2008 인천 문화재단 공공미술 사업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