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과 허구의 경계읽기 전 | 2008. 10.15 - 11.30,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현실이거나, 반대로 허구라면 인생과 예술은 너무나 가혹하거나 진부할 것이다. 현실과 허구의 접점에서의 게임이 흥미로운 것이고, 동서고금을 통 털어 예술은 이 국면을 결코 간과한 적이 없다. 이 전시를 채우는 것은 상당수가 영상, 설치 작품이지만, 외면적 시각성을 강조하면서 장식적으로 늘어놓은 스타일, 또는 작가로부터 출발했다고 가정되는 확실한 이야기를 투명하게 전달하려는 방식이 아니라, 거듭해서 읽어내야 하는 기호 해독을 요구한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예술이라는 허구적 장치에 의해 담겨져야 하는 현실을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 한 점의 예술작품은 한 장의 지폐와 마찬가지로 허구가 아니다. 작업이란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물심양면으로 총력전을 펼치는 현실이다. 그것들은 일련의 생산과정을 거쳐 물리적이며 상징적으로 정립된다. 이렇게 정립된 예술작품은 열렬한 수집과 관람, 그리고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현실처럼 1차적 참조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그 생산물이 단지 현실논리를 추종하거나 반영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상징적 우주를 통해 현실에 우뚝 서게 되기를 바란다.
한편 지배적 가치가 된 자본주의적 현실과 이를 규정짓는 추상적 경제 논리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가상적 체계로 구성된다. 예술작품은 현실 속에 존재하며 작동하지만, 또 다른 현실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상자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도해한 매뉴얼을 겸비한 안규철의 작품은 예술작품을 매개로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마술적 차원을 상징한다. 기타로 만든 정혜경의 오토바이 [터치 미]는 현실을 뒤로 하고 떠나는 홀가분한 여행 같은 세계이다. 그 옆에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오토바이 [세계일주]는 작가에게 그러한 상상적 여행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가수 김광석을 기념한다. 많은 이들에게 상상여행을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현실의 무게로 인해 진짜 현실을 떠난 예술가를 되살리는 것이다. 함경아와 김세진의 작품은 개인의 욕망이 집단화 되었을 때의 현실을 그린다. 석유 찌꺼기로 정교하게 그려진 페르시아 카펫은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문양이 거울 저편까지 확장된다. 생물학적 요구의 충족 같은 일정 정도의 욕망은 현실이지만, 끝없는 욕망은 허구이다. 이 허구적 진실은 대량살상이라는 폭력적 현실을 낳는다. 함경아의 또 다른 작품 [골드러시]는 한때 투자처를 찾지 못한 눈먼 돈이 몰려들던 미술시장의 거품이 꺼져 가는 이즈음, 퇴색해 가는 황금빛 욕망을 과도하게 번쩍거리는 광맥으로 결정화했다.

김세진의 작품 [닉네임]은 개인을 분류하는 사회적 편견을 다룬다. 작가가 일련의 초상사진에 붙여놓은 꼬리표는 그럴싸하다. 닉네임과 얼굴을 대조하면 광신도는 진짜 광신도처럼 보이고, 게이는 진짜 게이처럼 보이는 것이다. 선입견이라는 허구는 개별적 현실을 왜곡하고, 현실에 폭력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김범의 영상작품은 사실을 전달하는 뉴스를 재편집하여 새로운 뉴스를 만든다. 부분적인 현실이 재조합되어 또 다른 현실을 만드는데, 이 또 다른 현실을 통해 최초의 현실도 허구는 아닌가하는 의심을 낳게 한다. 김홍석은 가상의 인물을 상대로 한 인터뷰와 퍼포먼스를 통해 어디까지가 진실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낸다. 남화연, 박윤영, 박화영은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물을 통해 추리적 상상력을 덧붙인다. 사회에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들일수록 사건이 일어난 동기와 전개 과정이 불확실한 경우가 많은데, 이 간격과 빈틈에 작가의 상상력을 개입시킨다. 이들 작품은 그 출발점이 되었던 어수선한 사건 개요에 비해 정돈되고 고풍스러운 형식을 가진다.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예술작품이라는 버전으로 다시 이야기 하는 방식이다.

오용석의 [러브레터]는 유명한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에 완전히 빠진 관객이 그 장면과 상호
작용하는 듯한 환영을 만든다. 김해민의 [접촉 불량]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TV 모니터가 그것을 조작하는 현실에 영향을 받는 모습이다. 물리적인 충격이나 기기의 조작 등 실제의 힘이 확인되는 순간, 가상적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가 일어난다. 작가의 개입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환영에 내재된 간극을 강조한다. 김범의 [청사진] 연작과 박재영의 작품은 대개 과학적으로 입증 받으려고 애쓰는 그럴듯한 진실의 토대와 그 취약함을 보여준다. 모눈종이 위에 그려진 김범의 기술적 설계도나 구닥다리 실험기구 및 증명서로 채워진 박재영의 작품은 자체적으로는 완벽한 논리로 짜여 진듯하지만, 한 발짝 거리만 두어도 그 전체가 의심스러워진다. 이러한 거리두기가 가능해 지는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낡아 빠진 과학적 장치들이다. 그것은 시간의 시험을 넘어서지 못해 그 허구적 실체가 드러난 경우이다.
출전 | 월간미술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