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 트라우마의 실재성과 가상성
개인이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창작을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육체적, 심리적 차원에 깊숙이 자리하면서 사회적 인정과 소통이라는 외적 차원 못지않게 창작의 내적 동기를 제공한다. 프로이트는 깊은 상처trauma의 근원을 개체가 자기 정체성과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고, 자아의 방어벽이 무너질 때 발생한다고 정의한다. 그것은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자기 충족성이 상실되었을 때 일어난다. 내부와 외부를 구별해주는 경계가 와해되는 과정은 생명체가 물리적으로 상처를 입는 단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에서 주체에게 상실감을 주는 이러한 외상적 경험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인가, 아니면 가상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프로이트는 외상적 경험이 어린 시절에 실제로 있었다고 하는 자신의 견해를 나중에 수정하였다. 히스테리같은 신경증이 발생하는 원인은 현실적인 외상이라기보다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가설에 의하면 유아는 자신이 온전하게 향유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욕망으로 인해 외상을 입는다. 심리적 외상 이후 그 기억은 마치 이물질처럼 마음의 바닥에 잔류하며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히스테리 정신분석]의 저자 쥬앙 다비드 나지오도 프로이트를 따라, 신경증의 기원에 성을 내용으로 하는 외상의 심리적 흔적을 놓는다. 외상은 충격의 자연성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서 자아의 표면에 찍힌 자국이다. 모든 신경증의 원천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자국, 즉 감정을 지나치게 떠맡고 있는 까닭에 고립된, 그래서 자아에게는 괴로운 바로 그 영상이다. 그것은 어느 날 실재했던 외적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감정을 지나치게 떠맡고 있는 심리적 흔적, 즉 환상에 있다. 실재적인 외상적 사건이 아니라, 주체를 불안하게 하는 환상으로서의 외상은 치유 활동으로 예술이 개입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외상은 개인의 특수한 경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최초의 외상은 출생의 경험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이 겪어야하는 불안의 첫 번째 경험을 출생이라고 본다. 출생은 어머니에게서 분리되는 것이다. 느낌으로서의 불안은 매우 현저하게 불쾌한 특성을 지닌다. 불안상태는 출생의 외상이 되살아난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자극이 태아에게 몰려들어 새로운 종류의 불쾌감을 일으키고, 아기가 출생을 떠올리는 상황을 맞을 때마다 그 불안한 정서를 반복해서 느끼게 된다.

출생은 나중에 생겨나는 모든 위험 상황, 즉 변화 속에서 모성의 보호에 의해 가능했던 균형의 단절, 개개인을 덮치는 위험상황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이 원초적 상처는 이 세상에 태어났던 모든 이들의 무의식 속에 보존된다. 의식에 남아있는 실제적 사건이 표상을 낳는다면, 무의식에 그 흔적을 남기는 가상적 사건은 환상을 낳는다. 환상은 외상적 장면에 대한 허구로 이루어져 있다. 나지오는 환상이 외상이라고 해서 모든 외상이 환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환상이 아닌 외상은 물론 존재한다. 실재적인 외상에 의해 야기된 감정은 공포이다. 그러나 모든 외상은 그것이 실재적이든 심리적이든 간에 반드시 환상의 세계 속에 등록된다. 상처는 환상적 각본에 따라 전개되는 연극적 장면으로 상영되곤 한다. 장면의 주인공 역시 실제의 해부학적 구조를 가지기 보다는, 가상의 육체를 가진다. 상실되고 만족되지 못한 욕망은 욕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기관들, 요컨대 생식기관들을 대체하는 다른 기관들에서 증상으로 나타난다.

I-2. 트라우마의 환상적 증후들; 불안과 공포, 부재와 해체
상처에 대한 자기 방어적 노력은 억압으로 나타난다. 고통스러운 표상을 분리하거나 및 고립시키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의식으로부터 억압되거나 배제된 것은 지속적으로 회귀한다. 프로이트는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에서 증상은 중지된 본능적 만족의 징후이며 억압의 결과라고 말한다. 자아는 불안의 실질적인 중심이 된다. 자아는 증상을 편입시켜 그것을 자아의 일부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한편 이드는 자아(자아는 이드가 조직화된 부분이다)처럼 불안을 지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드는 조직이 아니라서 위험 상황에 대해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은 애매모호하고 대상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불안은 한편으로는 외상에 대한 예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그 외상의 반복이다. 불안이 대상을 찾아내면 그것은 공포가 된다. 불안과 공포가 공격성향을 낳는다.

형태 없는 두려움이 타자에게 전가됨으로서 형태화 된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범죄를 낳지만, 그것에 창조적 형태가 부여될 때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범죄와 예술은 어떤 면에서 매우 근접해있다. 범죄자 또는 작가가 처해있는 끔찍한 정서적 상황은 범죄, 또는 작품이라는 사건을 통해 희생자 또는 관객에게 전달되곤 한다. 이 견딜 수 없는 표상이 바로 외상의 흔적이다. 나지오는 외상과 증상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 한다; ‘욕망은 향락을 향해 열려 있고 그 향락은 환상을 태어나게 하며, 그 환상은 불안은 포함하고 있고, 마침내 그 불안이 고통으로 변형된다. 증상의 원인은 외부에서 가해진 공격으로 인한 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격이 남긴 심리적 흔적에 있다. 감정을 떠맡고 있기 때문에 자아에게 고통을 주게 되는 이 흔적이야말로 증상의 기원이다.’

주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가능성, 욕망에 대한 온전한 성취 가능성이다. 주체에게 향락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향락을 체험한다면 그의 존재의 통합성을 통합성은 곧 위험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통합성이 해체되는 위험의 완화를 위해 주체는 환상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다. 예술가가 창조하는 환상에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불안이 아로새겨져 있다. 욕망과 불안은 명확한 대상을 갖지 못하며 적절하게 재현할 수 없다. 그것은 환상의 특징인 부재를 낳고, 무의미와 공허로 나타난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환상적인 것의 핵심은 기표와 기의 간의 분리라고 지적한다. 환상은 현존을 부재로 대체시킴으로서 비의미화의 영역, 즉 죽음을 끌어들인다.

억압된 것이 귀환하는 장은 기괴함과 죽음을 환기시키는 것들로 채워진다. 심리적 공포와 원시적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작품에는 폐허와 봉쇄, 암흑 같은 장소가 종종 나타난다. 현대에 와서 공포의 대상은 적절한 재현물을 가지지 않으며, 이름과 형태가 없는 어떤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름이 붙여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추방되지도 않으며 더욱 위협적이다. 새로운 위협은 익명의 존재, 형태와 형식이 없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공포이다. 그것은 관습적인 예술 문법 속에 끼어든 이질성으로, 지배적인 상징적 질서의 가장자리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힘이다. 환상적인 것은 구조를 해체하려는 경향과 더불어 미분화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을 가진다. 근대적 환상을 이끄는 해체적 충동은 주체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 즉 ‘정체성이 무의미해지는 무관계성의 영점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라캉)이다. 
I-3. 동화가 아닌 이질화를 통한 트라우마의 치유
상처로 고통 받는 주체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정신분석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정신분석학에 있어서의 주체(환자)는 프로이트가 무의식 속에서 발견한 욕망의 주체이다. 그러나 이 주체에는 ‘자기 내부에 자신이 의식하지도 규제하지도 못하는 이질성’(라캉)이 존재한다. 상처받은 주체는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지만, 결핍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내부에는 제어할 수 없는 타자가 도사리고 있다. 근본적으로 결핍은 채워지지 않으며,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주체는 타자, 즉 분열된 기표체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열은 삶에 우연적으로 난입한 비극이기 보다는 삶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자기 안의 타자를 찾아가는 긴 여행으로서의 정신분석과 창조의 과정은 끊임없이 중심이 이동되는 이행의 장이다. 크리스테바는 자기 속에서 타자를 발견함으로서 우선 나를 나 자신 속에 확립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고, 그 경험들에 자신을 열게 된다.

또 한편으로 자신 속에서 타자를 발견함은,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지 않고서도 정신병이라는 유일하고도 무서운 지옥의 위험에 과감히 맞설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작품이란 무엇보다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란 욕망과 금지 사이에 말하는 존재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묵시록이나 카니발의 정신을 계승하는 현대 예술의 한켠에서 재현적 선조성은 부서지고 파열, 수수께끼, 단축, 미완성, 얽힘, 절단이 작동한다. 고통의 토로로서의 이야기에는 겁먹음과 혐오, 그리고 비천함이 있다. 그리고 그 극단에는 삶의 경계를 침범하는 전염병 같은 죽음이 있다. 이러한 환상은 비록 괴이하고 비정상적인 것이기는 해도,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일관성을 재구성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 위장술과 유희와 가면으로 만들어진 전적으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에서,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인 환자에게 정신 분석가는 상상의 세계를 일깨우고 환상의 세계를 실재하게 해주려 한다.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끝없는 상호적 과정은 환상이 내포하는 가치를 회복시킨다. 이름붙일 수 없는 공포를 새로운 은유들로 전환시키는 놀이를 통해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사회적 의미와 주체를 정립하는 지배적 상징질서를 위협한다. 로즈메리 잭슨에 의하면 환상적인 것을 도입하는 것은 친숙함과 안락함을 기괴함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타자이며 은폐된 어떤 것의 암흑세계, 즉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한정된 틀을 벗어나고, 언어와 시선의 통제에서 벗어난 공간을 도입하는 것이다. 환상은 현실을 도려내고 거기에 부재하는 것, 말해질 수도 없고 보여 질 수 없었던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지배적 상징체계에 의해 비현실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된 것이다. 현대예술은 사회의 상징질서가 그어놓은 경계(금기)를 넘나듦으로서 폭력과 잔혹, 비천함과 기괴함이 출몰하는 장이 된다. 여기에서 치유는 교훈이나 교육, 이념과 도덕 등을 내면화하여 사회의 지배적 상징질서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질화를 통해 가능하다. 크리스테바는 예술적 언어란 금기의 다른 면, 즉 기쁨이나 슬픔을 명명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작가는 다가설 수 없는 결핍과 공포의 언어에 직면한다. 작가란 겁에 질려죽지 않기 위해, 그리고 기호들 속에 부활하기 위해 은유화 작업을 성공시키는 공포증 환자인 것이다.

출전 | 2008 목원 대학교 조형예술 연구소 학술 심포지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