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고양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


에코토피아(Ecotopia), 생태천국



사태를 단순화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국내적으로 볼 때 1980년대를 이념의 시대로, 1990년대를 몸과 감성의 시대로, 그리고 21세기를 에코 혹은 생태담론의 시대로 정의하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부연하면 1980년대는 순수미술과 참여미술, 제도권미술과 정치미술의 이념대립이 첨예했던 시대다. 그리고 1990년대는 1980년대 중반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영미권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륙권의 후기구조주의와 접목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 시기로 기억된다. 후기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론이 결합하면서 몸담론, 성담론, 페미니즘이론, 퀴어담론과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타자론으로 아우를 수 있는 제 담론들이 전면화한 것인데, 이로써 가히 프로이드가 언급한 소위 억압된 것들의 귀환 현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연이은 에코담론의 등장은 1990년대 이후 제안된 이런 여타의 담론들에 내장된 자기반성적 사유에 힘입고 있다.
그 사정은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 세계적인 흐름이나 동향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냉전시대의 종식 이후 환경담론이 새로운 시대적 패러다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물론 일부 문명학자나 미래학자들은 냉전시대의 종식 이후 신냉전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기도 하지만). 이를테면 환경오염으로 인해 전 지구가 공멸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오존층이 파손돼 해수면의 온도가 상승한다거나, 이로써 수년 내에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모두 녹아 없어져버릴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고, 화석연료의 고갈과 탄소 배출량의 규제와 함께, 오염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 하거나 아예 없는 대체연료의 개발 운운으로 나타난다. 해서,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 에코 곧 생태 혹은 환경담론이야말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절실하고 시의 적절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에코는 말할 것도 없이 생태를 말하며, 자연과 환경을 그 하부개념으로서 거느린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생명사상이 내재돼 있다. 범주로 치자면 인간과 자연, 그리고 그 양자간 관계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의 인식은 특히 동양의 경우 결코 생소하지 않은데, 주와 객이 경계를 허물어 하나 되는 물아일체사상이 문화적 유산으로서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에코를 크게는 생태나 환경 중 어느 쪽으로 이해해도 무방하지만, 그 말을 엄밀하게 한정한다면 아무래도 환경 쪽보다는 생태담론으로 봐야한다. 환경이 인간중심의 사유행태로서 인문주의(주와 객을,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이고 양비론적인 사유 틀을 전제로 한)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면, 생태는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는 사유행태로서 자연의 입장에서(자연이 주체가 되는) 자연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자연을 위한) 식의 보다 큰 틀을 전제로 한 것이 다른 점이다. 여하튼 사회가 급속하게 문명화되면서 이런 인간과 자연과의 양자합 관계나 교감이 눈에 띠게 훼손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인 에코토피아 곧 생태천국은 이런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즉 그 자체 이미 도래한 현실로서보다는 도래할 미래의 비전(바람 혹은 희망)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오히려 반생태적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을 내장하고 있는 반어법적(아이러니) 표현이며, 역설적(패러독스) 어법이다. 이번 심포지엄을 계기로 자연과 인간과의 진정한 양자합 관계를 복원할 수야 없겠지만, 최소한 이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해볼 수 있는 기회는 되리라 본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각각 국외작가 4명과 국내작가 5명이 초대되었다. 참여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피터 하인즈(Peter Haines 미국). 작가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다. 특히 선사시대의 타제석기나 마제석기의 간단명료한 형태에 매료된다. 그 단순한 형태는 철저한 기능주의의 산물로서 동시대의 미니멀리즘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더불어 그 형태는 비록 어떤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자체에 속하지 않은 다른 무엇을, 이를테면 여타의 동물형상이나 배 혹은 집 혹은 기둥(토템폴) 같은 형태를 떠올려주기도 한다. 이로써 작가는 도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물 형상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리고 나아가 동시대적인 어떤 기물을 동시에 떠올려주는 어떤 심플한 형태,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형태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로써 무의식이나 욕망처럼 그 생리가 복잡 미묘한 것들이나, 여타의 정신활동처럼 비가시적인 것들이 그 단순한 형태 속에 담겨진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번 심포지엄 작품을 위해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과 결부된 주제를 찾으려 고심했다. 그리고 한국의 고대신화에 곰과 호랑이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고, 이로써 <곰>(Bear)을 형상화한다. 참고 인내하면 마침내 사람이 된다는 이 고대신화에 내포된 교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살아있는 진리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 주제는 공교롭게도 동시대의 트랜드랄 수 있는 곰 인형 즉 테디베어를 상기시키는 점도 흥미를 더한다.

자낙 나르지(Janak Jhankar Narzary 인도). 한국을 방문한 작가는 도시화 현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번 작품 (단호한 문명의 관)는 도심을 점유하고 있는 거대 빌딩에다 그 인상을 담아낸 것이다. 세로로 긴 기둥 형상의 표면에 사각으로 요철을 조성한 이 작품은 똑같은 규격의 창문들로 뒤덮여 있는 빌딩의 외관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특히 기둥 형상의 상단부에는 역시 요철을 조성하고 그 부위에다 일종의 유사 큐빅을 박아 외부로부터의 빛을 난반사하는 인공구조물의 차갑고도 완고한 인상을 강조한다. 이로써 거스를 수 없는 근대화와 이에 따른 도시화 현상에 대해 논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특히 수직으로 서 있는 직립구조로 인해 일종의 기념비적 인상을 강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기단부와 몸체 그리고 상단부까지 한 세트로 갖춘 동양의 전통적인 탑 모양을 떠올리게도 한다. 전통적인 모티브와 현대적인 모티브가 하나로 합체된 기념비적 형상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빌딩을 현대판 기념비로 본 작가의 발상은 전통을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쉽게 공감을 자아낸다.

첸젠 린(Chenjen Lin 대만). 작가는 추상과 구상, 전통과 현대와 같이 서로 대립되거나 이질적인 것들에 관심이 많고, 그 사이와 차이와 관계에 천착한다. 후기근대에 연유한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작가의 의식은 모든 결정적인 것들이 부닥치고 충돌하고 어우러지는 예기치 못한 어떤 지점을 향한다. 이번 심포지엄에 출품한 작품 (녹색 인간)은 인간의 두상을 거대한 크기로 증폭시켜 놓은 것으로서, 그 심플하고 기하학적인 형태가 흡사 중세의 투구 같다. 투구로 무장한 인간의 두상 속에 인성과 과학을 결합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성은 말할 것도 없이 두상으로 대변되고, 과학은 그의 머리에 돋은 뿔 형상으로써 암시된다. 머리에 돋은 뿔은 말하자면 과학과 함께 이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녹색인간 자체는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인 에코토피아 즉 생태천국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즉 환경과 생태를 향후 삶의 철학으로 삼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그 가치관을 내재화한 21세기 인간의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토벨 알하임(Tobel Ahlhelm 독일). 작가는 사물과 형태의 이쪽과 저쪽이, 안과 밖이, 겉과 속이 서로 통하는 소위 통구조에 관심이 많다. 일종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은 사유를 바탕으로 사물과 사물, 형태와 형태를 가름하는 견고한 경계를 허물어 서로 통하게 하는 것이다. 이번 심포지엄에 출품한 작품 (공공연한 비밀)은 집 형태의 구조물로서, 역시나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통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집은 개별주체의 정체성을 상징하며, 그 개개의 정체성들이 모여 일종의 문화적 정체성이랄 수 있는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집은 외부로부터 개인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외계와 개인을 단절시키기도 한다. 안온한 밀실인가 하면, 고독한 섬이기도 하다. 자신에게는 친숙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타자에게는 호기심과 때로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인 것이다. 일종의 이중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그대로 인간 일반의 자기 분열양상과도 통한다. 작가는 이처럼 집으로 상징되는 개인의 비밀이 타자의 간섭과 호기심(사실상 폭력의 한 형태로 봐야할)으로 인해 더 이상 비밀일 수 없게 된 현실을 논평한다. 그리고 그 논평은 인터넷이 생활도구로 자리 잡은 전 세계적 현상에 견주어 볼 때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김정범. 작가의 작품 는 각종 세라믹 소재의 애자를 틀(일종의 거푸집) 속에 넣어 굳힌 후, 그 표면의 시멘트를 털어내 그 속에 담겨진 애자가 부분적으로 드러나 보이게 했다. 주지하다시피 애자는 전기와 관련한 핵심부품으로서 인류의 문명화 과정에서의 신기원을 연 소위 전기시대(혹은 전자시대)와 함께 인류의 미래를 상징한다. 이런 문명의 메타포를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흡사 타임캡슐을 앞당겨 개봉한 것 같고, 이로부터 오래된 미래의 유물을 발굴한 것 같은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현대인의 의식 속에서 새로운 물건이 재빠르게 낡은 것으로 편입되고 변질된다고 봤는데, 그것은 그의 의식이 물건의 재빠른 노화와 대체를 요구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변질된 의식으로부터 소위 오래된 미래라는 역설이 생겨나는 것이며, 작가의 작품은 이 역설을 상기시킨다. 그런가하면 거푸집 형태는 화분을 연상시키는데, 이로써 애자로 상징되는 문명과 화분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대비시킨 것이다. 또한 거푸집 형태를 모듈 삼아 이를 세로로 쌓아 축조하면 일종의 문명의 집이나 관문이 조성된다. 이로써 작가는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 자연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권창남. 작가는 근작에서 수련을 모티브로 하여 이를 다양한 형태로 변주해낸다. 주로 연꽃보다는 연잎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주지하다시피 수련은 불교와 관련이 깊은 꽃이다. 흙탕물 속에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이 혼탁한 세상에서의 구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번 심포지엄에 출품한 작품 <호연지기, 세상을 향해 외치다> 역시 연잎을 소재로 한 것으로서, 구상적인 형태와 이를 추상화하는 과정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일정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특히 작가가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오석은 그 재질이 단단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 이 단단한 재질의 오석 덩어리를 속으로 파내 얇고 넓은 연잎의 형태를 무리 없이 재현해낸 것에서 작가의 남다른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안쪽으로 깊게 패인 형상이 자궁을 떠올리게 하고, 넓은 잎이 세상을 향한 무한한 포용력을 암시한다. 보기에 따라선 벌려진 입 모양을 닮았는데, 이로써 제목 그대로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 같다. 모르긴 해도 혼탁한 세상에서의 구도를 호소해오는 암묵적인 목소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특히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자연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심병건. 작가는 직접 만든 100t 프레스기를 이용해 작품을 제작한다. 프레스기를 이용해 스테인리스스틸 판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여타의 예기치 못한 우연적인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획된 형상과 우연한 형상이 그 경계를 허물고 상호작용하면서, 특히 부드럽고 유기적인 일종의 변형곡선이 돋보이는 독특한 형상이 연출된다. 이번 심포지엄에 출품한 작품 <생명의 꽃> 역시 마찬가지의 프로세스를 통해 만들어진 형상으로서, 금속판을 소재로 한 것이면서도 흡사 점토로 소성과정을 거친 조소작품을 보는 듯 섬세한 표현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금속 재질 고유의 물질감과 함께, 금속 재질을 마치 흙 주무르듯 하는(금속 재질에 반하는) 것에서 오는 일종의 탈물질감이 공존하는 형상으로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지된다. 외부로부터의 빛을 난반사하는 번쩍거리는 표면질감을 가진 이 금속 재질의 꽃은 자연의 꽃보다는 인공의 꽃을 상기시키며, 그런 만큼 일종의 인공화된 자연에 대한 반어법적인 표현처럼 읽힌다.

정국택. 정국택은 스테인리스스틸을 소재로 하여 다양한 인간군상을 재현한다. 대개는 한 손에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낸 것이다. 누구든 쉽게 공감할 만한 전형적인 그 형상은 현대인의 일상을 그대로 투사한 일종의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이번 심포지엄에 출품한 작품 역시 그의 작업을 통해 친숙한 사람형상이 등장한다. 그들은 일종의 다람쥐 쳇바퀴 속에 갇힌 채 열심히 앞을 보고 내달리지만, 그의 일상은 조금도 진전되지 않은 채 매번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올 뿐이다. 이로써 현대인의 맹목적인 삶을 희화화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처럼 맹목적인 삶에 숨통을 열어준다. 다람쥐 쳇바퀴의 한쪽을 터놓은 것이다. 그 터진 부분은 아마도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것들,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들, 정지와 휴지의 계기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로써 작가는 진정한 삶,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반성케 한다.

이성웅. 작가는 근작에서 싸릿대 등의 마른 나무줄기 다발을 엮어 거대한 크기로 증폭된 사람형상이나, 얼굴과 손, 그리고 때로는 소파와 같은 기물을 재현한다. 그렇게 재현된 형상은 숲 사람 같고 나무인간 같다. 자연 소재를 이용해 사람형상을 재구성한 것인데, 이로써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인 생태담론을 진작부터 실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심포지엄에 출품한 은 만개한 꽃잎 형상을 재현한 것으로서, 이 역시 한눈에도 생태담론을 주제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작가는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일종의 상호작용 개념을 도입한다. 즉 꽃잎이 심겨진 화분에는 흙 대신 플라스틱 소재의 캡슐이 담겨져 있는데, 전시기간 내내 작가의 작품을 찾는 관객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소원을 적은 쪽지를 그 캡슐 속에 담게 한 것이다. 이로써 관객들의 소원을 양분 삼아 자라는 꽃이라는 상황이 연출된다. 여기서 꽃 형상의 작품은 관객의 참여와 행위를 유도하는 구실이 되며, 따라서 진정한 작품은 관객의 참여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이 작품으로써 작가는 진정한 생태담론의 실천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