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부산비엔날레


낭비, 담론인가 전시 공학적 개념인가



부산비엔날레가 5회를 맞고 있다. 2002년부터 비엔날레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채택한 것으로 치자면 엄밀하게는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부산비엔날레는 산하에 현대미술전, 바다 미술제, 그리고 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 등 총 3개의 섹션별로 구분되어져 있으며, 실제로 이들 각 섹션은 독립된 감독 체제 하에서 독립된 형식으로 운영되어지고 있다. 이렇듯 외관상의 3권 분리체제(?)가 사실상 총감독을 중심으로 한 단일체제 아래 수렴되기 마련인 다른 여타의 비엔날레와 형식적인 면에서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 세부를 보면, 우선 비엔날레와 관련한 사실상의 본 전시에 해당하는 현대미술전은 1981년부터 시작된 부산 청년비엔날레를 그 전신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바다 미술제는 1987년 프레올림픽 문화행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한 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은 1991년 창립된 부산야외조각대전이 그 전신이다. 이처럼 각각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것이 2000년에 PICAF(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로 통합된 연후에, 2002년부터 비엔날레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부산비엔날레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는 세 개의 전시 내지는 행사가 합쳐진 만큼 전시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언제든 각 섹션별 불협화가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곤 한다. 말하자면 구조적으로 문제점이 불거질 수 있는 여지를 떠안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현대미술(현대미술전)과 장소특정성(바다 미술제) 그리고 환경조형물(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의 세 범주 혹은 영역이 각각의 차이와 변별성을 유지하면서도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로 통합되어지는 어떤 상위지점에 대한 심각한 모색의 과정이 있어져야 할 것이다.

현대미술전. 낭비, 무의미와 쾌락
이 가운데 현대미술전(전시감독 김원방, 공동 큐레이터 톰 모튼, 낸시 바튼, 마이클 코헨, 게스트큐레이터 아주야마 타카시, 프랑신 메울)은 25개국 92명의 작가가 참여해 부산시립미술관과 수영요트경기장에서 열렸다. 특히 <낭비, 항상 이미 지나치기 때문에>로 설정된 주제는 전시가 열리기 전부터 여러 면에서 관심을 끌었는데, 그 주제가 비엔날레로 대변되어지는 전시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반성적 성찰의 의미를 암시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비엔날레 무용론까지 공공연하게 제기되곤 하는 터라, 이런 주제나 그 주제가 암시하는 의미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한편 은근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전 세계적으로 비엔날레는 현재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개는 제3세계의 지역적인 특수성에 그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하나의 경향처럼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정작 이를 통해 생산되어지는 산물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담론을 보면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제3세계란 것이 서로 어슷비슷한 근대화의 과정을 거친 탓에 그 역사적 경험이 개별적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인 경험에로 귀속되고 마는 맹점을 떠안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그 발상, 그 관점 자체가 이미 후기식민주의적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허점을 내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비동일성을 내세우지만 결국에는 동일성의 논리로 귀속 되고, 차이를 주장하면서도 종래에는 보편성의 원리 속에 통합되고 마는, 나아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저 단순한 차이들의 열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기 십상이라는 말이다.
감독 자신도 밝히고 있듯 낭비라는 개념은 조르주 바타이유에게서 빌려온 개념으로서, 단순히 비엔날레로 대변되어지는 전시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이상의, 이보다는 더 본질적인 지점(이를테면 문명사적인 어떤 관점)을 향한다. 적어도 감독은 바타이유가 이 개념을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의 관성에 대한 일종의 대립항으로서 설정했다고 본다. 이를테면 형이상학, 진리와 진실, 제도와 관습, 도덕과 윤리 등 일체의 의미를 생산하는 시스템에 대한 대척점으로서의 살인과 폭력과 린치, 소비와 소진, 퇴폐와 악과 추, 에로티시즘과 죽음 등 일체의 무의미한 행위(혹은 의미로 축조된 세계를 무력화하는 행위)를 내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생산지향적인 세계에 대해 놀이를, 의미론적 세계에 대해 무의미를 대립시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무런 의미 있는 것도 제시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처럼 읽히고(왜냐하면 의미화한다는 것은 결국 제도화의 관성에 복무하는 것이므로), 더불어 이를 통해 쾌락의 순수한 의미를 묻는다는 것이 이 주제의 핵심인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의 지성은 아무리 의미 없어 보이는 지리멸렬한 행위에서마저 끝내 의미를 찾아내고야 마는 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할 때 그 기획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로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감각적 쾌 역시 이에 대한 순수한 경험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우리 모두는 이미 언제나 충분하고 과도할 정도로 제도의 수혜자들이며, 따라서 순수는 이상일 수는 있어도 일상일 수는 없다).
여하튼 무의미의 제시와, 이에 수반되는 쾌락의 순수한 추체험이 이 전시의 핵심인 것 같다. 이질적인 것들, 차이 나는 것들, 다른 것들을 만나면 ‘저게 뭐지’ 라고 묻지 말고, 그냥 몸으로 부닥쳐 가라는 주문이며, 그러다보면 알 수 없는 쾌감이 전율처럼 몸을 짜릿하게 감전시킬 것이라는 주문이다. 더 이상 일관성이나 연관성 그리고 지속성과 같은 유기적인 관계논의는 저 멀리 날려 버리고, 그저 코뿔소처럼 이미지들을, 사건을, 상황을 섭렵하며 즐기라는 주문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온갖 의미와 관계의 복병들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어서 짐짓 심각하게 만들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선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 등 오브제 형식의 조형물이 대거 눈에 띠는데, 이는 영상작업 일색인 다른 비엔날레 혹은 이전 전시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인 성격이 강한 비엔날레에도 전통적인 장르가 들어설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더 두고 볼 일이다.
전시장 로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니시오 야스유키 작 <쾅, 세일러 마스>로서, 가상현실 속 캐릭터가 현실화된 경우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그 옆엔 거푸집과 함께 이로부터 추출해낸 인체형상을 피에타 상 그대로 재구성해 보여주는 이용백의 작품 <피에타>가 있는데, 이는 원본과 사본과의 구분을 무색하게 한다. 한편 이용백은 이를 다른 작품에서 실상과 허상과의 관계로 변주하기도 한다. 교묘하게 장치된 거울이미지의 영상작업이 실제 거울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종이에 흑연과 볼펜으로 그린 마를린 매카티의 작품 <그룹 1.1>은 한 개인의 가족사와 얽힌 존속살해를 테마로 한 작품으로서, 종교와 광신과의 불분명한 경계를 주지시킨다. 무의미한 주제로 치자면 단연 벽에 단지 나사못 3개만을 박아놓은 도쿠토미 미츠루의 작품이 두드러져 보인다. 각각 플러스와 마이너스 그리고 무한대를 표시한 기호가 눈금으로 새겨진 나사못은 그야말로 철저한 무의미 자체를 증거하기 위해 그기에 그렇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복재로 유명한 모리무라 야스마사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독재자>를 재차 패러디하고, 에두아르도 아바로아의 <다른 세계, 그리고 또 다른 세계>는 넝마와 다를 바 없는 잡동사니들을 재구조화해 거대한 유사 지구본을 만든 것으로서, 지구를 둘러싼 권력문제와 경제문제 그리고 특히 분배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첨예화하는데, 그 자체가 후기식민주의 논의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돼지여인을 소재로 한 웬링 친의 작품은 과도한 생산에 대해 과도한 욕망을 대질시키는 것 같고, 브루스 라브루스의 <강자의 오만은 약자의 폭력과 만나게 될 것이다>에 엿보이는 동성애와 에로티시즘 그리고 폭력의 격렬한 결합은 공산주의와 에로티시즘을 결합시킨 1960년대 상황주의 내지는 행동주의 논객들의 실천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을 매개로 한 성적 도발이 사실상 부르주아의 도덕을 공격하는 구실이 되어졌던 20세기 초나, 반전운동과 맞물린 히피의 유니섹스와 마찬가지로 지금(공공연하게는 에로티시즘이 대중적인 오락거리로 전락한)도 여전히 제도를 위협하고 공격하는 무기로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 밖에도 자동차를 에로티시즘과 결합한 작품이나, 배종헌의 망원경 설치작품이 기억에 남아있다.
이 작품들은 무의미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지나치게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고, 때로는 과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인상마저 준다. 종래의 주제전 형식의 전시에 비해보면 그 근거가 상대적으로 희박하거나 느슨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하튼 상호 연관성이나 연계성을 드러내놓고 배반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이번 전시의 주제가 낭비, 쾌락, 소모, 허비, 무의미, 덧없음, 지나침, 과도함, 잉여와 여분, 과잉과 포화, 죽음과 에로티시즘, 악과 추, 도발과 퇴폐의 순수한 의미를 겨냥한 것이 맞는다면, 그 주제는 적어도 이를 전시로 옮기기에는 지나치게 열려있고,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그렇다고 작품들 하나하나가 이상에서 열거한 개념들을 실현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이번 전시는 낭비라는 주제를 어떻게 전시로 옮길 수 있을까와 관련한, 낭비라는 (탈)문명사적 개념을 어떻게 자본주의가 첨예화된 지금여기에 이식시킬 수 있을까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과제로 남겨놓은 것이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다(그런데 그 성과는 전시를 전시가 열리기 이전의 원점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아닌가?).

기타 전시들과 향후 과제
그리고 바다 미술제(전시감독 전승보)는 비시간성의 항해를 주제로, 광안리 해수욕장을 주무대로 하여 26개국 77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열렸다. 또한 전위적 정원을 주제로 내세운 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전시감독 이정형, 큐레이터 시다 루이슨)은 APEC 나루공원을 배경으로 열렸으며, 전시에는 10개국의 작가들이 2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외에도 부대행사 및 전시로서 2개소 지역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한 대안공간 전시회와, 32개소 화랑들이 참여한 갤러리페스티벌이 열렸다. 이상으로 2008 부산비엔날레는 적어도 관람객 숫자로만 치자면 성공적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실내 전시장을 기준으로 유료관객만 얼추 16만 여명에 달하는 관람객 수는 역대 최다기록인 12만 1천여 명(2006년)을 갱신한 것으로서 난해하기만 한 현대미술을 대중화하는 데에는 일단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비엔날레의 성과를 단순한 수치로만 환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를 계기로 지적된 과제들을 보면 먼저 현대미술전과 관련해서 전시 자체는 대체로 무난했다는, 그리고 비교적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에 부합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주로 낭비라는 주제를 실제 전시에 적용하는데 따른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를테면 낭비라는 주제 자체가 유연하고 광범위해 주제와 실제 전시된 작품과의 유기적인 관계 설정이 미흡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바다 미술제와 관련해서는 부산비엔날레만의 차별성을 기할 수 있는 장점을 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바다와는 어울리지 않는 실내 전시 위주가 돼버린 것인데, 전시형태의 다변화에도 불구하고 본 전시인 현대미술전과의 연계성을 의식한 나머지 전시 나름의 차별성을 견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를테면 영상과 회화 작품 등 본 전시의 장소특정성과는 배치되는 작품이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특히 이 전시의 핵심에 해당하는 광안리 해수욕장을 배경으로 한 야외전시는 그 일정이 다른 행사와 겹쳐 단지 3주 만을 전시하고 철거하기도 했다. 차후에는 좀 더 철저한 사전 조율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런가하면 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은 공원이라는 장소특정성과 이를 배경으로 설치되는 조각 작품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마치 공원에 조각이 방치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일부 작품(데니스 오펜하임)은 자재가 확보되지 않아 전시가 오픈 된 이후 한참이 지나도록 작품이 완성되지 못하는 일도 생겨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외에 제기된 문제들은 대개 매해 반복되는 것으로서, 그 자체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이를테면 비엔날레를 전문으로 도맡아 할 상시운영체제 및 학예 시스템이 마련되어져서 보다 충실한, 그리고 준비된 전시가 치러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기획자(예컨대 홍가이, 민영순, 김유연 같은)를 끌어들여 전시를 맡기는 것이 하나의 대안으로서 제시되었는데, 이는 우리만의 시각을 반영한 주체적 전시가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맞물려 있다. 지역미술 끌어안기와 관련해서는 단순히 지역미술인의 소외를 넘어, 향후 비엔날레를 자체적으로 운영해나갈 수 있는 지역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체제가 마련되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기타 재정자립도나 국제적인 네트워크 구축과 같은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할 과제로 손꼽힌다. 특히 네트워크 구축은 인프라 구축과 맞물린 것으로서, 사실상 매회 일회적 행사로 끝나곤 하는 전시관행이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향후 비엔날레의 발전은 요원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