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의 작업은 뉴욕 유학시절 벼룩시장에서 우연하게 구입한 오랜 영화필름이 그 발단이 되었다. 당시로선 작업과의 연계성을 인식했다기보다는 단순한 취미와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업실에 돌아와 상영된 형태로 필름 속 이미지를 보면서 작가는 색다른 경험에 빠져든다. 현재가 집어 삼킨 줄로만 알고 있었던 과거가 현존하고, 부재가 존재를 고집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그리고 역사적 관음과 물신적 관음 그리고 가상적 관음과 맞닥트린다. 결국 시각예술이란 이런 온갖 형태의 관음증에 복무하는 것이 아닌가. 관음증의 문법은 필연적으로 암시적이고 상기적이다. 부재하는 것들을 말하는 방법이고 기술이기 때문이다. 영상이란 부재하는 것 곧 그림자가 아닌가. 일종의 빛 그림이다. 필름이라는 물질에 빛이 투과되면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처음의 영화적 서사로부터 이렇듯 이미지가 재생되는 메커니즘에로의 이행이 자연스레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 속엔 운명적으로 서사와 조형이, 이야기와 구조가, 빛과 어둠이, 물질과 영상(그림자)이 길항하고 부침하며 뒤섞여있다. 그 내부로부터 탈장르를 실행하고 있고, 요새말로는 통섭의 원리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통섭의 원리를 굳이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는 거대담론과 똑같이 미시담론의 층위에서도 작동하는 것이며, 나아가 오히려 이런 미시담론에 힘입어 거대담론의 틀을 깨는 전략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영상이란 분절된 순간이 연이어진 것이다. 해서, 필름 속엔 외관상 동일하거나 어슷비슷해 보이는 순간적인 이미지들의 연쇄가 기록되고, 이로부터 패턴화된 이미지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작가는 필름으로부터 이런 패턴화된 이미지를 조형의 요소로 끌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영화적 서사를 순수한(?) 시각정보로 전이시킨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외관상 순수한(?) 조형예술의 소산처럼 보이면서도 그 이면에서 영화적 서사를 철저히 털어내지는 못하는, 부지불식간에 영화적 서사를 암시하고 상기시키는 어중간한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말하자면 예술의 미덕인 소위 경계 위에 서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고 작가의 작업을 눈에 띠게 유별난 경우로 볼 필요는 없다. 서사를 암시하는 형태, 물질, 이미지란 조형예술이 공유하는 문법이 아닌가. 해서, 작가의 작업은 조형예술에 대한 변혁으로서보다는, 이를테면 어떠한 물질적 매개도 경유하지 않은(물신화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서사 가능성을 묻는 것과 같은 급진적인 경우로서보다는 조형예술 고유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키고 그 생리를 더 유연하게 풀어낸 경우로 보인다.
작품의 제작과정을 보면, 우선 투명 아크릴 판을 이용해 그 전면이 편평한 입체패널이나 박스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 자잘한 조각들로 분절된 영화필름을 일일이 붙여 나간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패턴이나 형상이 만들어지고 나면, 최종적으로 그 위에 투명 레진을 덧발라 마무리한다. 레진은 필름조각들의 접착성을 더해줄 뿐 아니라 필름 자체의 투명성을 강화해주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이때 필름조각을 붙여나가는 양상을 보면 그 목적이 특정의 패턴을 얻고자 하는 것인 만큼 같은 문양, 같은 색상을 조합해 재구성하는데, 이로써 특정의 색띠를 중첩시키거나 병치하는 식의 패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필름 자체는 서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지만, 정작 이를 이용해 조형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서사는 순수한 구조와 형식적 요소로 그 형질이 변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는 이렇게 완성된 패널이나 박스 이면에다 조명을 장착해 사실상 라이트박스의 형식으로 마무리한다. 이렇게 완성된 단위별 구조물 자체를 독립적인 작품으로 제안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를 재차 재조합하거나 중첩시켜 일정한 형태(이를테면 무슨 구름모양이나 유기체 형상을 연상시키는)를 만든 것을 벽면이나 공간 그리고 때로는 천장을 이용해 설치한다.
이로써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 구조와 패턴, 그리고 오브제와 공간설치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 모두를 내부에 포섭해 들이는 유기적인 작업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여기에 빛이 더해져서 명상적이고도 환상적인 감각적 효과를 연출해내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사랑이다. 조형물에 사용된 주요 필름 역시 <감각의 제국>, <바보>, <첫사랑>, <왁스마스크> 등으로서, 이 중 <왁스마스크>를 제외한 모든 필름들이 하나같이 사랑을 테마로 한 영화들이다. 필름을 내용으로서보다는 물질로서 사용하는 만큼 서사가 결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작가는 영화적 서사의 가능성의 끈을 놓고 싶어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해서, 영화적 서사를 조형문법 특유의 재현의 층위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그 과정에서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조성되고, 상상력은 한정된 형태와 같은 기술적인 제약에 맞닥트린다. 이처럼 서사의지와 조형의지가 부닥치면서 또 다른 서사를 불러들이는 것, 그렇게 새로운 서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하는 것, 그러면서도 비록 처음의 서사가 발단이 되었지만 이에 예속되지는 않는 새로운 서사의 연쇄가 가능해지는 형식실험의 일단을 확인해볼 수 있다(자크 데리다의 산종이론에서 하나의 의미는 또 다른 의미를 불러들이는 계기로서만 의미를 가지는데, 이렇게 불러들여진 다른 의미는 그 의미하는 바가 처음의 의미와 같지 않다).




Hidden Emotion(숨겨진 혹은 잠재된 감성을 찾아서). 작가의 작업 전체를 지배하는 대전제에 해당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이 전제나 제명 하에서 자신의 대부분의 작업을 풀어내는 한편, 이를 통해 때로는 자신에게마저 알려져 있지 않은 숨겨지거나 잠재된 감성을 일깨우고 객관화하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논리에 따라서 매번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태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 형태를 보면 각종 크고 작은 원형들이 어우러지고 포개어진 전체 형상이 흡사 비정형의 유기(체)적 덩어리 같고, 뭉게구름 같고, 핵융합반응을 형상화한 것 같고, 우주가 처음 생성되는 빅뱅의 순간을 표현한 것 같은 스펙터클한 장관을 연출한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주인공 토토가 불탄 옛 극장에서 어린시절 보았던 키스장면만을 모아놓은 필름 조각을 보며 그 때를 회상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제작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시네마천국>은 영화를 소재로 한 영화로서 메타영화, 이중영화, 액자영화의 전형을 예시해준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말하자면 영화의 아우라(이를테면 우리는 영화가 그려 보이는 가상현실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꿈꿀 수 있다는 식의)인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다 조명을 장착해 페이드인이나 페이드아웃 시키는 방법으로써 이러한 아우라를, 판타지를, 꿈을 추체험하게끔 유도한다.

Contact(접속). 매번 대면할 수 있는 우연한 기회가 있었지만, 사실은 결코 마주할 수 없었던 남녀를 다루고 있는 영화 <접속>을 테마로 한 작업이다. 이 영화에서의 접속은 오프라인상의 접속을 의미하며, 온라인상의 접속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온라인상의 접속으로 나타난 새로운 연애풍속도를 예시해주는 한편, 이로써 결코 진정으로 접속(사랑)할 수는 없는 현대인의 공허함을 그린다. 여기서 작가는 그 남녀들이 얼마나 접속을 원했을까 라고 상상하고, 마침내 그 접속을 실제로 실현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남녀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포옹하기 위해 서로를 향해 질주하는 극적 순간을 형상화한다. 그런데, 그 형상은 엉뚱하게도 만화적이다. 그 남녀 주인공은 말하자면 무슨 동물(이를테면 개 같은)을 의인화한 만화영화 속 캐릭터 같고, 내달리는 발은 맹렬하게 구르는 차바퀴 같고, 심지어는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흔적마저 뚜렷하다. 극적 순간을 표현하기에 만화는 현실보다 더 적격이다. 만화는 현실을 더 생생하게 해주고, 더 실감나게 해주고, 더 극적이게 만들어준다. 작가는 유년시절 보았던 만화영화 속 주인공을 빌려 이렇듯 사랑의 극적 순간을 표현하고, 그 가슴 떨리는 현장에 동참하게 한다.

Love(100가지의 사랑). 하트를 형상화한 총 70여개(사실상 100개를 의도했지만, 여기서 숫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에 달하는 패널 작품을 모아 하나의 전체 작품으로 재구성해낸 일종의 모자이크 식의 작품이다. 각각의 패널 속에 하트 모양과 일치되게끔 LED를 장착해 조명효과를 극대화하는 한편, 이를 통해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추체험하게 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사랑이라는 주제가 상대적으로 더 뚜렷하게 부각된 경우로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랑 이야기들, 이를테면 간절하고 절실한 사랑이나 잊혀지고 흐릿해진 사랑 등등 사랑의 다양한 방식을 예시하고 그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여기서 사랑 이야기는 사실상 삶에 대한 이야기 곧 존재론적인 이야기와 동일시된다. 사랑의 스펙트럼 속에는 말하자면 삶의 희로애락이, 애와 증이, 희와 비가 고스란히 투사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잊혀지고 지워진 사랑을 표현할 때인데, 작가는 필름 자체의 성질을 이용해 이를 해결한다. 즉 필름은 수분에 취약한데, 작가는 장기간 대기의 습기에 노출된 필름의 상이 부분적으로 흐릿해지거나 지워지는 자연현상을 이용해 이를 표현하고 암시한 것이다(그렇다고 작품의 내구성에 문제가 있는 정도는 아니다).

Beyond Description(서술을 넘어서). 이 작품에서 작가는 말로써 형언할 수 없는,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이고 내면적인 경험을 암시한다. 작품이 설치된 지하라는 공간적 특수성을 이용해 전체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은근하게 빛을 발하는 내면적 아름다움과 사유와 명상으로 공간을 가득 채운다. 오브제와 공간이 일체화된 경우로써 장소특정성을 강하게 부각하는 편이며, 관객들 저마다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감각경험이 가능하게 했다. 이 작품은 말하자면 의미로서보다는 감각적인 경험으로써 어필되게끔 유도한 것이다. 그 분위기로 치자면 특히 종교적인 아우라를 불러일으키는데, 흡사 이름모를 작은 교회의 세로로 긴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빛이 투과되는 것 같은 내면적이고 명상적이고 성스러운 기운에 감싸이게 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선 각종 패턴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크고 작은 격자구조가 중첩된 기하학적 패턴, 원형들이 병치된 유기적 패턴, 그리고 때로 격자와 원형이 서로 어우러진 그 구조가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고 복합적인 패턴들이다. 이런 정형화된 패턴들과 함께, 패턴은 때로 하트나 불꽃 모양, 나뭇잎 모양, 영문자 X자나 십자가 모양, 다이아몬드 모양, 아치 모양, 그리고 만곡 패턴 같은 여러 변형패턴으로 확장되고 변주된다. 이 패턴들 대개는 중심성이 강하고 좌우대칭이 엄격히 적용된 전통적인 종교적 도상화의 패턴을 닮아있다. 흡사 중심으로부터 외부로 무한정 확장되는 빛, 기, 에너지의 방사 현상을 물리적으로 형상화한 것 같다. 말하자면 그 자체 세속적인 도상으로서보다는 어떤 신성한 존재, 어떤 구체적인 형상으로도 환원되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의 신성을 표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패턴들은 우주의 이치나 원리를 도해한 만다라를 상기시킨다. 여기에 일말의 아이러니가 개입하고 작용한다. 작가의 작업은 비록 영화적 서사를 함축한 세속적인 소재를 취한 것이지만, 정작 그 형상은 어떤 성스러운 경지를 불러일으킨다. 패턴으로 나타난 기하학이(신성비례로부터 예시되듯 예로부터 기하학은 어떤 성스러운 경지나 존재와 관련이 깊다), 필름의 투명성이, 어둠을 부드럽고 신비롭게 감싸는 빛이 이런 아우라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와 함께 작가의 작업은 조형작업이 갖는 실체감을 넘어 일종의 그림자 조형으로 부를 만한 한 지점을, 그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우리가 영화로 지각하는 시각정보가 사실은 그림자를 실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듯, 작가의 작업에서 아우라를 내뿜는 것으로 치자면 필름으로 구조화된 조형물보다는 오히려 그 조형물 뒤에 맺힌 그림자가 더 눈에 들어오고 더 마음을 끈다. 그리고 그 끌림이 단순한 실상과 허상, 실제와 허구와의 경계에 대한 인식을 넘어 어떤 부재하는 존재, 암시와 상기를 통해서만 겨우 표상되는 존재와 대면케 한다. 영화(영화필름)를 회화처럼 사용하는가 하면(평면상에 조립된 패턴이 두드러져 보이는), 조각처럼 사용하기도 하는(입체로 나타난 필름을 지지해주는 지지대의 구조가 두드러져 보이는) 작가의 작업을 읽다보면, 독해 내내 영화의 내러티브가, 미장센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옴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