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수는 등신대 크기의 극사실주의 인체조각을 제작한다. 실물 캐스팅을 통하지 않고 직접 점토 소성과정을 거쳐 제작된 그 조각들이 주는 사실성과 역량이 놀랍다. 그 대략적인 제작과정을 보면 먼저 점토소성과정을 거쳐 등신대 크기의 인체를 조각한 연후에 이를 틀 삼아 폴리에스테르 레진으로 떠낸다. 이때 상대적으로 더 섬세한 묘사가 요구되는 얼굴 부위는 레진 대신 실리콘으로 떠낸다. 이렇게 떠내진 신체를 보면 피부 표면에 미세하게 돋은 소름이나 뽀송뽀송한 질감이 그대로 감촉돼온다. 이렇게 신체가 제작되고 나면 그 표면에 유화물감을 칠해 살색 그대로를 재현한다. 그리고 따로 정교하게 제작한 인공안구를 눈에다 장착해 생기를 더한다. 여기에다 작가는 사실성을 더하기 위해 실제 머리카락을 사용하는데, 단순히 가발로 대신하거나 머리카락을 그저 머리 부위에다 붙이는 대신, 일일이 한 올 한 올 심어서 머리와 수염 그리고 눈썹을 재현한다. 이렇게 심겨진 머리는 비록 사실성을 더해주지만, 그 공정이 까다롭고 시간 또한 오래 걸려 다작이 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여하튼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 작가는 마치 점토를 빚어 최초의 인간을 만들던 때의 신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빚어진 조각은 마지막으로 숨결만 불어 넣으면 벌떡 일어나 움직일 것처럼 사실적이고 생생하다.
작가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아이와 여인처럼 현실적인 존재를 재현하기도 하고, 때론 그 조상들에다 상상력을 불어 넣어 일종의 신화적인 존재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거대한 잠자리 날개를 가진 꿈꾸는 소년이나 성숙한 남자, 머리에 사슴의 뿔이 달린 소년, 토끼 소년과 인어, 그리고 사슴과 여인이 결합된 사슴 여인(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목양신 사티로스가 변형된 것 같은) 등이다. 이 조상들은 비록 그 외양이 신화적 존재를 닮았지만, 그렇다고 순수하게 비현실적인 존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작가의 억압된 욕망이나 무의식이 투사된 일종의 자기분신이며, 따라서 이를 통해 거꾸로 작가의 내면을 유추해볼 수 있는 매개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존재들을 중심으로 작가의 무의식을 재구성해보면 우선, 손에 작은 주머니를 들고 있는 소년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소년은 작가의 유년을 상징하며, 그 소년이 손에 들고 있는 주머니 속에는 모르긴 해도 유년의 꿈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 상실한 것들, 억압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이는 그대로 자크 라캉의 거울단계이론을 상기시킨다. 즉 유아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진입하는 단계에서 최초의 억압이 일어나며, 이때의 경험이 무의식으로 저장된다. 자족적인 무구분의 세계로부터 언어와 상징체계로 구조화된 구분의 세계로 건너오면서 본성(자연성 혹은 야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것이다. 이렇게 유아는 자신의 본성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본성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 본성은 잠재의식 속에 남아 시시각각 자신을 실현할 기회를 노리는데, 이것을 프로이드는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일컫는다. 성인이 된 연후에 억압된 것들이 되돌아와 여러 예기치 못한 돌출행동과 돌발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년의 주머니 속에 담겨진 억압된 꿈(욕망)은 한쪽 날개를 잃은 소년으로 변주된다. 여기서 날개는 꿈을 상징하며, 한쪽 날개를 잃은 것은 일종의 거세불안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여성 유아의 일렉트라 콤플렉스와 비교되는)를 암시한다. 고대 비극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잃는데, 이때 그로 하여금 눈을 잃게 만드는 것은 그의 의지와 무관한 운명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년이 어른이 되는 것은 운명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꿈(날개)을 상실하게 되지만, 이렇게 상실된 꿈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으로 남아 존재론적 상처를 만든다. 이처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억압하고 상실하는 것인 만큼 작가는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소년으로 남아있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머리 위로 돋아나는 뿔을 떼 내려는 소년으로 나타난다. 생육의 증거이며 어른의 상징인 뿔을 거부함으로써 일종의 어른아이 혹은 아이어른인 키덜트로 남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토끼 소년도, 달 여행도 계속 꿈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유년시절엔 곧잘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거나, 달 여행을 꿈꾸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어른이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 과정에서 소년은 자신의 애완동물이 죽는 경험을 겪으면서 죽음에 대해, 좌절에 대해, 상실에 대해 숙고하며 점차 어른이 되어져 간다. 작가는 이렇게 성숙한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줘 비록 불완전한 모습이긴 하지만, 여하튼 계속 꿈꿀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이때 그의 등에 돋아난 날개는 검정잠자리(엄밀하게는 물잠자리)의 날개로서, 짙은 청록색의 빛을 발하는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그 환상적이고 화려한 빛깔은 그가 꾸는 꿈의 빛깔을 암시하며, 그 날개에 힘입어 그는 언제든 자신이 꾸는 꿈속으로 비상할 수 있고 도피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은 유년으로부터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재로 한 일종의 성장서사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달 여행을 꿈꾸기도 하고, 죽음을 경험하기도 하고, 여인을 상징하는 인어와의 사랑을 꿈꾸기도 하면서 여하튼 어른이 됐지만, 그렇다고 꿈꾸기를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꿈꾸기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내게 해주는 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어른이 된 그가 꾸는 꿈은 비록 작가 개인의 꿈이지만, 그 종류와 정도가 다를 뿐 우리 모두가 하나같이 이처럼 억압된 꿈, 상실된 꿈을 간직하고 있기에 쉽게 공감을 자아낸다.
한편, 작가가 재현한 인체조각들은 현실을 극사실적으로 재현한 하이포리얼리즘이 현실을 넘어 오히려 초현실적 비전을 암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 이상의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현실이나 실제 그리고 사실에 지극히 천착한 결과가 열어 놓은 의외의 비전이라고나 할까. 해서, 그 조각들은 실물보다는 실물을 빼 닮은 인형을 연상시키고 마네킹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조각은 말하자면 흔히 인간 실존의 메타포로 여겨져 온 전통적인 신체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고전적 신체를 떠올리기에 그의 조각은 지나치게 섬세하고 지나치게 아름답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치 꿈을 꾸듯 가볍다. 섬세하고 아름답고 가벼운 그 조각들은 손에 잡힐 듯한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이상화된 신체의 동시대적 버전인 마네킹에 접맥돼 있으며, 때론 실제 사람보다 더 강력한 호소력으로 감수성을 자극해오는 인형에 접속돼 있는 것이다. 그 자체가 실제를 넘어선 허구적 이미지에 가깝고, 욕망이 투사된 이상적인 모델에 가깝다. 한마디로 리얼리티의 정점에 위치해있는 작가의 조각은 지극한 현실이 오히려 허구적인 이미지와 통하는 것임을 증언해주며, 이로써 인체조각의 새로운 한 가능성을 예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