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상품에 대한 즉각적인 어필과 함께, 일단 어필된 연후에는 상품의 재빠른 노화를 요구한다. 상품에 대한 욕망(미학)이 상품의 효용성(상품 고유의 목적성과 기능성)을 앞질러야 한다. 이렇게 멀쩡한 사물들이 고유의 목적성과 기능성을 채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버려진다. 이렇게 버려진 사물들은 또 다른 욕망, 이를테면 향수를 자극하는 욕망을 덧입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물신으로 거듭난다. 해서, 골동품 상가와 벼룩시장은 사물들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물들이 진정한 물신으로 거듭나는 인큐베이터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모던 스타일(미니멀리즘)과 클래식(고전주의 양식)이 결합된 아케이드와 백화점은 이처럼 상품이 물신으로 거듭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갖춘 현대판 인큐베이터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상품은 이렇듯 기능과 목적성으로서보다는 심미적 대상성을 내재함으로써 그 진정한 존재의 빛을 발한다. 그런데 이때의 심미적 대상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에 속한 것(향수를 자극하는 것)인 만큼 모든 새로운 것들을 서둘러 과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렇게 새로운 것은 익숙한 것이 되고, 놀라운 것은 친근한 것이 되고, 충격적인 것은 우호적인 것으로 변질된다.
이로부터 발터 벤야민은 오래된 미래라는 역설을 도출해낸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서둘러 향수를 자극하는 심미적 대상으로 변환되어져야 하며, 이로써 세계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자극하고 충족시켜주는 물신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세계를 거대한 골동품 상가와 벼룩시장으로 재편하고, 아케이드와 백화점으로 뒤덮는다. 미술관 역시 작품(상품)을 물신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백화점의 또 다른 한 유형이라는 사실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이로써 온갖 유혹하는 오브제들로 넘쳐나는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의 사회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다.

최지영의 그림에 등장하는 침대, 소파, 배게, 의자, 욕조, 샹들리에, 백열등, 티 테이블 등의 사물들은 어둠 속에 잠겨있는 배경화면으로부터 표면 위로 떠오르는 듯, 부유하는 듯 그려져 있어서 심리적이고 내면적이고 암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로써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사물 자체로서보다는 마치 사물극에서와 같은 인격의, 욕망의 대리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사물들을 그린 이 일련의 그림들을 <연출된 장면>이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연출하고 있는가. 사물들을 열거한 리스트에서도 암시되듯 작가의 그림은 상품을 선전하기 위한 고급 양장본의 카탈로그를 연상시킨다. 고전주의와 모던 스타일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일종의 퓨전 양식이 앤틱 가구와 전등세트, 그리고 도자기로 만든 욕조와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수도꼭지를 돋보이게 하며, 그 상품적 가치를 드높이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퓨전 스타일의 원조는 매너리즘과 연이은 바로크 미술이다. 여기서 매너리즘이나 바로크 미술이 하나같이 퓨전 스타일 고유의 이질적인 양식의 혼용을 꾀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매너리즘이 그로테스크 미학을 지향함으로써 초현실주의의 전범이 되고 있다면(아놀드 하우저가 매너리즘을 현대미술의 진정한 계기로 본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바로크 미술은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 속에다 이질적인 양식을 버무려 존재론적인 파토스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이로써 특히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각종 전등이 발하는 인공불빛 자체는 현대의 산물이지만, 적어도 이때 작용하는 미의식만큼은 바로크에 연유한 것이다. 빛과 어둠의 조율이 만들어내는 심리적이고 내면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야말로 바로크 미술의 진정한 유산이며, 이는 그대로 조르주 드 라투르나 렘브란트 그리고 프랜시스 고야 등의 일군의 바로크 미술의 거장들에게서 확인되는 바와 같다.

그렇다면 성경을 테마로 한 그림이나 역사화 그리고 자화상과 같은 장르화 외에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한갓 사물에도 이런 분위기나 연출이 가능할까. 작가의 그림은 적어도 이런 문제의식에 자극받은 것처럼 보이며, 그런 만큼 이를 통해 일종의 사물 초상화라고 부를 만한 한 경향성을 예시해준다. 그러나 그 발상 자체는 유독 작가의 전유물이라기보다는, 기실 각종 상품을 선전하기 위한 광고 메커니즘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카탈로그에 실린 사물의 이미지 하나하나는 그대로 그 사물들의 초상화에 해당하며, 작가는 다만 이를 회화의 버전으로 재생한 것이다. 그 이면에서 각종 상품에 투사된 자본주의의 욕망(작가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욕망이기도 한)에 대한 작가의 반응이 읽혀지며, 페티시 즉 물신화된 상품과 작품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자본주의 시대의 예술작품은 공공연하게는 물신화된 상품이며, 미술관은 그 물신들이 거하는 성전이다)이 읽혀진다.
이로써 <연출된 장면>에서의 장면은 곧 사물을 물신으로 탈바꿈시켜주는 계기로서의 장면임이 드러난다. 이를 위해 작가는 화면의 색상을 흑과 백, 아니면 청색이나 오렌지 색조의 모노톤으로 한정하는데, 이로부터 청교도주의(그 자체 부르주아의 도덕률이나 유교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미니멀리즘의 미의식과도 통하는)에 바탕을 둔 금욕과 절제의 미덕을 불러일으킨다. 이 가운데 흑과 백의 화면(정확하게는 짙은 갈색조의 화면)이 어둠 자체(심연의 메타포)와 직면하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 파토스를 자아낸다면, 주로 욕실 정경에 적용된 청색 조의 화면에서는 쾌적한 고립감과 함께 차갑고 아득한 느낌이 감지된다(이처럼 차갑고 아득한 느낌이 주는 안온한 고립감이야말로 모던 스타일의 양식적 특징이 아닐까). 어느 경우이건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사물들이 신성한 아이콘과도 같은 아우라(일종의 영기와도 같은)를 발하면서 사물 이상의 존재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아우라는 빛과 어둠과의 긴밀한 조율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인데, 그 양상 여하에 따라서 그림은 사물극(그 자체를 페티시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 시대의 심리극의 한 경우로 볼 수 있는)에서와 같은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바니타스 정물화의 또 다른 한 버전과 대면하는 것과 같은 숙연함을 자아내기도 하고, 시각 현상을 넘어 따뜻하거나 차가운 촉감이 감지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선 그 이면에 욕망이 투사된 사물들이 빛과 어둠으로 직조된 아우라의 베일을 덧입고 신성한 사물(명품)로 거듭난다. 조명이 자질구레한 모든 것들을 어둠 속에 사라지게 해 사물의 사물성(즉물성과는 다른)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처럼, 그림 속 어둠은 어둠 자체로서보다는 사물을 더 빛나게 하게 위해 동원된다. 때로는 침묵이 말을 더 빛나게 하는 것처럼 어둠이 사물들의 빛을 더 찬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처럼 아우라를 덧입은 사물들, 신성한 사물들, 유혹하는 오브제들에게서 낭만주의의 그림자가 감지되는가 하면, 골동취미를 자아낸다. 골동취미(일각에선 골동취미를 귀족취미를 흉내 내고 따라잡기 위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해석하기도 한다)가 정점에 이른 시기는 낭만주의로서, 그 이면에는 모든 새로운 것들을 과거 속으로 밀어 넣어 향수를 자극하게 만드는 소위 오래된 미래의 역설이 자리하고 있다. 최지영의 그림들은 이 역설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