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성성으로의 분리
인천여성비엔날레는 적어도 3개의 키워드가 결합된 것으로, 인천이라는 지역성, 여성이라는 성적 범주, 비엔날레라는 현대 미술의 제도를 포함한다. 이 세 키워드 중에서 필자는 여성성이라는 범주를 중심에 놓고 예술적 행위에 여성성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페미니즘의 복잡다단한 담론에서 나타나듯이, 여성성이라는 범주, 여성이라는 자기동일성은 자명한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명한 듯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 여성이라는 자기 동일성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그 논리와 역사를 생각해 보는 것은 여성성이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정신분석을 재해석한 현대의 다양한 성 담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해체적 성에 주목했다. 물론 후기 구조주의로 묶여지는 이러한 흐름들은 페미니즘과의 명백한 유대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새로이 구축되어야 할 여성성에 충분한 시사점을 준다고 보며, 그 시사점이 될 만 한 측면들을 분야 별로 추출해서--페미니즘 자체가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상호 교차적(interdisplinary) 담론이기 때문이다--이야기 하고자 한다.
여성을 외치는 적지 않은 페미니즘 미술에서, 대안으로서의 여성성을 말 만큼 쉽게 발견하기 힘들다. 차라리 여성이 없는 곳에서 여성이 발견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이러한 역설에 직면하여 필자는 여성이 주체화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기존의 상징적 질서로의 성공적인 안착이 아니라, 언어와 여성 사이에 놓인 괴리와 틈을 주목하고자 한다.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징주의에서 여성은 남성이라는 범주의 이항 대립적 쌍으로 간주되어 왔다. 대립을 통해 정/부정의 동일성이 구축된다. 그러나 차이가 차별이 되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차이를 새롭게 배치하는 것’(크리스테바)이다. 차이의 체계인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신분석학은 어린아이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아이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남근(the phallus)적 상징체계에 진입함으로서 ‘고유한 개인’으로서 사회화된다. 사회는 이성적이라고 간주된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다.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는 부계에 중심을 두는 종교에 강한 흔적이 남아있다. 자연과 문화, 육체와 정신 같은 대립 항에서처럼, 오염으로부터 성스러움을 지키는 종교적 금기사항에는 여성과 남성의 은유가 내재해 있다.
그러나 여성이나 남성을 이루는 자기 동일성의 상징적 법칙을 이루는 경계는 가변적이다. 생성은 분리된 순수나 성스러움이 아니라, 오염과 혼합물, 원초적인 카오스로부터 비롯된다. 동질성 자체가 이질성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여성과의 분리 및 구별을 중시하는 부권적 종교는 근대 경제학과 과학을 통해 계승된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에서 ‘sex’라는 단어는 분리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 ‘sexus’에서 유래했다고 보면서, 근대 경제학은 그자체가 본질적으로 섹시스트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묘사된 과거와의 단절을 젠더의 시대에서 섹스의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묘사한다. 자본주의적 경제인(Homo oeconomicus)이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하면서 공적/사적 영역의 분리와 사영역의 여성화를 통해 가속화되었다. 여성은 가사노동처럼 사회적 생산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정확히 측정되지 않으며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무보수 노동(shadow work)의 담당자가 된다. 자발적이며 내밀한 영역이 된 예술 또한 그림자 노동에 속해 있다.
2. 주체화 과정의 억압성
영역의 분리는 현대 자본주의를 특징짓는다. 분업화를 통한 생산성의 진보를 이룩한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과학기술이다. 주디 와츠맨은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에서 근대에 이루어진 과학혁명은 근본적으로 이성과 객관주의라는 남성적 기획에 근거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화 대 자연, 마음 대 몸, 이성 대 감정, 객관주의 대 주관주의, 공적인 영역 대 사적인 영역 등 각각의 이분법에서 전자는 후자를 지배해야 하고, 각 이분법에서 후자는 체계적으로 여성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술의 진보는 스스로 발전하는 혁신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문화적으로 유형화된다. 근대 철학의 출발을 알린 데카르트주의는 주체의 의식을 육체보다 고양시킨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문제시 된 것은 바로 그 주체이다. 예술은 아이가 어른이 될 때 겪는 바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찾기 위한’ 파토스에 가득하곤 한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멈추어서 자아를 발견하는 대신에, 좀 더 멀리 가서 자아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기를 망각으로, 해석을 실험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그들이 제거하려는 것은 바로 환상, 즉 의미생성과 주체화이다. 이를 통해 예측을 벗어나는 어떠한 변이와 경이로움, 사건을 기대한다. 그것은 고정된 점처럼 기원과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주체성이나 실체성에 근거한 개체화 보다는 다양한 배치물이다. 여기에서는 개인보다는 개인을 관통하는 다양한 힘들이 중시된다. 그것은 이항대립에 근거한 운동이 아니라, 이질적인 개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소통이 생성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항 대립적 사고를 벗어나,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사고하는 ‘분열증’적인 사고는 여성 또한 새롭게 규정한다.
[천개의 고원]에서 언급하는 ‘분자적’인 여성은 여성성의 원자들, 즉 매우 부드럽지만 또한 견고하고 끈질기고 환원불가능하고 길들일 수 없는 입자들을 생산한다. 그들은 남녀 각각의 성이 반대쪽 성을 품고 있으며, 자기 안에서 자신의 성의 반대 극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고 지적한다. 양성성은 양성의 분리라는 개념보다 더 나은 개념이 아니다. 문제는 거대한 이원적 기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을 대립시키는 유기체, 역사, 그리고 언표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이원론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사이에 존재하기, 사이를 지나가기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되기’이며, 여성들조차 여성이 되어야 한다. 여성되기는 저자들이 강조하는 모든 ‘되기’의 원형이 된다. 되기는 모방이나 동일화가 아니라, 생성이다. 정체성으로부터 탈주하는 선의 흐름은 몰개성과 주체의 용해를 요구한다.
라깡도 심층으로 구조화된 정신분석을 재해석하면서 이원성으로 나뉘어진 주체를 뫼비우스 띠 같은 하나의 표면으로 일원화시킨다. 주체는 중심과 깊이를 잃고, 내부와 외부는 서로에게 흘러든다. 그것은 ‘되기’처럼 흐름과 생성을 강조한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해체된 몸체를 ‘기관 없는 몸체’로 개념화 하는데, 그것은 기관들이 제거된 텅 빈 몸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를 이루는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하는 것이다. 유기체적 조직에서의 발전이나 분화가 아니라, 속도와 강도의 문제가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모든 하나와 여럿의 대립이 아니라, 이를 효과적으로 넘어서는 융합 상태가 문제시된다. 이항대립의 근거를 이루는 위계화와 조직화를 거부하는 몸은 안정된 토대를 잃고 유체처럼 가변성을 가진다. 기관 없는 신체는 표준을 이루는 남성-어른-백인-인간을 탈영토화 시킨다.
인천여성비엔날레는 적어도 3개의 키워드가 결합된 것으로, 인천이라는 지역성, 여성이라는 성적 범주, 비엔날레라는 현대 미술의 제도를 포함한다. 이 세 키워드 중에서 필자는 여성성이라는 범주를 중심에 놓고 예술적 행위에 여성성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페미니즘의 복잡다단한 담론에서 나타나듯이, 여성성이라는 범주, 여성이라는 자기동일성은 자명한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명한 듯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 여성이라는 자기 동일성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그 논리와 역사를 생각해 보는 것은 여성성이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정신분석을 재해석한 현대의 다양한 성 담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해체적 성에 주목했다. 물론 후기 구조주의로 묶여지는 이러한 흐름들은 페미니즘과의 명백한 유대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새로이 구축되어야 할 여성성에 충분한 시사점을 준다고 보며, 그 시사점이 될 만 한 측면들을 분야 별로 추출해서--페미니즘 자체가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상호 교차적(interdisplinary) 담론이기 때문이다--이야기 하고자 한다.
여성을 외치는 적지 않은 페미니즘 미술에서, 대안으로서의 여성성을 말 만큼 쉽게 발견하기 힘들다. 차라리 여성이 없는 곳에서 여성이 발견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이러한 역설에 직면하여 필자는 여성이 주체화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기존의 상징적 질서로의 성공적인 안착이 아니라, 언어와 여성 사이에 놓인 괴리와 틈을 주목하고자 한다.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징주의에서 여성은 남성이라는 범주의 이항 대립적 쌍으로 간주되어 왔다. 대립을 통해 정/부정의 동일성이 구축된다. 그러나 차이가 차별이 되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차이를 새롭게 배치하는 것’(크리스테바)이다. 차이의 체계인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신분석학은 어린아이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아이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남근(the phallus)적 상징체계에 진입함으로서 ‘고유한 개인’으로서 사회화된다. 사회는 이성적이라고 간주된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다.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는 부계에 중심을 두는 종교에 강한 흔적이 남아있다. 자연과 문화, 육체와 정신 같은 대립 항에서처럼, 오염으로부터 성스러움을 지키는 종교적 금기사항에는 여성과 남성의 은유가 내재해 있다.
그러나 여성이나 남성을 이루는 자기 동일성의 상징적 법칙을 이루는 경계는 가변적이다. 생성은 분리된 순수나 성스러움이 아니라, 오염과 혼합물, 원초적인 카오스로부터 비롯된다. 동질성 자체가 이질성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여성과의 분리 및 구별을 중시하는 부권적 종교는 근대 경제학과 과학을 통해 계승된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에서 ‘sex’라는 단어는 분리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 ‘sexus’에서 유래했다고 보면서, 근대 경제학은 그자체가 본질적으로 섹시스트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묘사된 과거와의 단절을 젠더의 시대에서 섹스의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묘사한다. 자본주의적 경제인(Homo oeconomicus)이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하면서 공적/사적 영역의 분리와 사영역의 여성화를 통해 가속화되었다. 여성은 가사노동처럼 사회적 생산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정확히 측정되지 않으며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무보수 노동(shadow work)의 담당자가 된다. 자발적이며 내밀한 영역이 된 예술 또한 그림자 노동에 속해 있다.
2. 주체화 과정의 억압성
영역의 분리는 현대 자본주의를 특징짓는다. 분업화를 통한 생산성의 진보를 이룩한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과학기술이다. 주디 와츠맨은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에서 근대에 이루어진 과학혁명은 근본적으로 이성과 객관주의라는 남성적 기획에 근거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화 대 자연, 마음 대 몸, 이성 대 감정, 객관주의 대 주관주의, 공적인 영역 대 사적인 영역 등 각각의 이분법에서 전자는 후자를 지배해야 하고, 각 이분법에서 후자는 체계적으로 여성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술의 진보는 스스로 발전하는 혁신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문화적으로 유형화된다. 근대 철학의 출발을 알린 데카르트주의는 주체의 의식을 육체보다 고양시킨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문제시 된 것은 바로 그 주체이다. 예술은 아이가 어른이 될 때 겪는 바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찾기 위한’ 파토스에 가득하곤 한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멈추어서 자아를 발견하는 대신에, 좀 더 멀리 가서 자아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기를 망각으로, 해석을 실험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그들이 제거하려는 것은 바로 환상, 즉 의미생성과 주체화이다. 이를 통해 예측을 벗어나는 어떠한 변이와 경이로움, 사건을 기대한다. 그것은 고정된 점처럼 기원과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주체성이나 실체성에 근거한 개체화 보다는 다양한 배치물이다. 여기에서는 개인보다는 개인을 관통하는 다양한 힘들이 중시된다. 그것은 이항대립에 근거한 운동이 아니라, 이질적인 개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소통이 생성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항 대립적 사고를 벗어나,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사고하는 ‘분열증’적인 사고는 여성 또한 새롭게 규정한다.
[천개의 고원]에서 언급하는 ‘분자적’인 여성은 여성성의 원자들, 즉 매우 부드럽지만 또한 견고하고 끈질기고 환원불가능하고 길들일 수 없는 입자들을 생산한다. 그들은 남녀 각각의 성이 반대쪽 성을 품고 있으며, 자기 안에서 자신의 성의 반대 극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고 지적한다. 양성성은 양성의 분리라는 개념보다 더 나은 개념이 아니다. 문제는 거대한 이원적 기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을 대립시키는 유기체, 역사, 그리고 언표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이원론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사이에 존재하기, 사이를 지나가기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되기’이며, 여성들조차 여성이 되어야 한다. 여성되기는 저자들이 강조하는 모든 ‘되기’의 원형이 된다. 되기는 모방이나 동일화가 아니라, 생성이다. 정체성으로부터 탈주하는 선의 흐름은 몰개성과 주체의 용해를 요구한다.
라깡도 심층으로 구조화된 정신분석을 재해석하면서 이원성으로 나뉘어진 주체를 뫼비우스 띠 같은 하나의 표면으로 일원화시킨다. 주체는 중심과 깊이를 잃고, 내부와 외부는 서로에게 흘러든다. 그것은 ‘되기’처럼 흐름과 생성을 강조한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해체된 몸체를 ‘기관 없는 몸체’로 개념화 하는데, 그것은 기관들이 제거된 텅 빈 몸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를 이루는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하는 것이다. 유기체적 조직에서의 발전이나 분화가 아니라, 속도와 강도의 문제가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모든 하나와 여럿의 대립이 아니라, 이를 효과적으로 넘어서는 융합 상태가 문제시된다. 이항대립의 근거를 이루는 위계화와 조직화를 거부하는 몸은 안정된 토대를 잃고 유체처럼 가변성을 가진다. 기관 없는 신체는 표준을 이루는 남성-어른-백인-인간을 탈영토화 시킨다.
3. 다형적 성과 쾌락으로
페미니즘 이론가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기관 없는 몸’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몸을 탈자연화 시킨다고 하면서, 그것이 타자의 몸과 다른 사물들의 흐름이나 분자와 직접적인 관계 속에 위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기관 없는 몸은 정신적 내부나 비밀스러운 내부가 없는 몸, 내적인 일관성과 잠재적인 의미화작용이 없는 몸 개념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몸의 조직화와 구조화, 그리고 기능화에 반대하는 것이며, 자질과 속성의 절박한 요청에 종속되는 것으로서의 몸에 반대하는 것이다. 주체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텍스트이며 담론의 공간이 된다. 거기에는 미지의 거대한 공간이 존재한다. 이 잉여의 공간에 타자가 존재하며, 또 다른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주체에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된 타자는 위험과 죽음을 상징해왔다. 이질성의 분출은 현대예술에 기괴함과 비천함이 출몰시키기도 했지만, 그 한 켠에는 신비로움이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가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도 아니며,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서 우리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는 공감(동일시)도 아니라고 말한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이며 신비와의 관계이다. 흥미로운 점은 레비나스가 타자성의 개념을 여성성과 연결 짓는다는 점이다. 여성성은 다른 모든 차이와 구별되는 차이이다. 성의 차이는 상보적인(complementary) 두 개념의 이원성이 아니다. 두 개의 상보적 개념은 그것에 앞서 존재하는 전체를 전제하고 있다. 존재자는 주체적으로 의식 안에서 자신을 실현하지만 타자성은 ‘여성적인 것’을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 레비나스에게 에로스는 타자와의 일치나 융합이 아니라, 차이를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이다. 성의 이원성을 통한 생식이나 유전적인 재생산이 아닌 또 다른 연결이 작동 된다. 따라서 하나, 또는 둘이 아닌 성을 생각해야 한다. 종횡무진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유사한 것들의 연결체는 라깡이 [사랑의 편지]에서 언급한 성, 즉 대립적인 성 관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성이고 상징적인 우주로부터 배제된 성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채워 주리라 믿지만, 열락은 늘 흘러넘치기 마련이다. 흘러넘침은 남녀가 보완의 관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남성적’과 ‘여성적’은 두 긍정적인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한 동일한 존재의 두 상이한 양상이다. 이들은 통일성으로 결합될 수 있는 두 개의 반쪽이 아닌 것이다. 성은 자연적인 소여가 아니라, 브리콜라주(bricolage), 즉 이질적인 담론적 실천의 인공적 통일이다. 브리콜라주에 의해 만들어진 상태는 항상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봉합된 구조’이다. 성 그 자체는 두 이질적인 요소들의 몽타주인 것이다. 여기에서 성은 해체된다. 통상적으로 여성과 남성은 음/양처럼 기호학적 대립을 이룬다. 여성은 실체(substance)와 현상(appearance)으로 남성인 본질(essence)과 주체(subject)에 대립해왔다. 그러나 라깡에게 남성과 여성은 전체의 보완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것들은 이러한 전체를 상징화하려는 두 실패한 시도이다. 모든 성은 결여에서 만들어지며, 남성과 여성을 욕망으로 가득한 부분적 존재로 남겨둔다. 주체에 새겨진 수많은 욕망의 틈새들은 에로스가 상징하는 바의 합일을 파열시킨다. 그것은 한계를 넘은 초과와 잉여의 영역이며, 유동적이고 끝이 없는 흐름으로, 고정된 가치에 기초한 소유 관념을 초월한다. ‘살아 움직이는 경계이며 열려진 지평’(뤼스 이리가라이)으로서의 여성의 몸이 가지는 타자성은 상징화에 저항한다.
4. 여성과 예술적 언어
정신분석학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한 현대의 담론들이 여성 예술가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종합되기 보다는 나열된 채 언급된 다양한 분야의 성담론들--종교(크리스테바), 경제(이반 일리치), 과학기술(주디 와츠맨), 철학(들뢰즈와 가타리), 윤리(레비나스), 심리학(라깡) 등--은 여성이 남성에 대항해서 주체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령 타자, 주이상스, OO되기 같은 개념들은 주체의 범주를 넘어서는 위협적이면서 매혹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여성은 이러한 해체와 흩어짐에 대한 또 다른 이름에 적합할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현실적 진실]에서 여성적 언어를 항상 뭐라 결정지을 수 없는 욕망, 다시 말해 불가능에까지 동요하는 언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상상적인 아버지가 부재한 경계의 언어가 된다. 광인의 언어와 같은 계열에 있는 것이 여성의 언어다. 여기에는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동시에 중성화시키기 위한 공통의 약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개인의 바람직한 사회화 과정에 대한 염려를 낳지만, 이를 어떻게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까가 예술의 관심이다.
심리학자들은 여성과 남성의 자아형성의 차이를 지적한다. 라캉에 따르면 소년은 자신을 남근적 권력과 동일시함으로서, 상상의 단계에서 해방되어 상징적 질서로 진입하지만, 소녀는 상징적 질서와 동일시할 수 없어 언어 없이 타자로 추방당하고 상상의 단계에 머문다. 이 상상의 단계에서 여성은 거울단계에서 일어나는 자아형성의 과정을 전도시키거나, 그것에 균열을 가한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상상계와 상징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환상성을 띈다. 상징계를 군림하는 것은 남근이라는 상징적 기표이다. 라깡에 의하면 팰러스는 가부장적 질서의 지배와 아버지의 법을 의미한다. 남자는 말씀으로 신이 되었고 말씀은 육신을 창조하게 된다. 언어적인 코드인 로고스는 포괄적인 진리가 되기를 원했다. 이 로고스는 자연과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게 하는 사고체계를 형성시켰고, 언어를 통해서 사회적 코드가 산출되고 유지된다.
주체는 이러한 상징계의 산물이지 자연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러나 원초적인 카오스의 형상은 사회의 지배적인 상징계를 뚫고 나오려 한다. 이러한 위반의 결과는 광기와 신성, 그리고 예술(크리스테바)을 낳는다. 가부장적 질서가 아로새겨져 있는 상징계에 대한 여성의 불만은 광기로 나타난다. 광기는 예술처럼 주체와 기표 사이의 관계에 연관되어 있다. 무의식은 상징계의 문법을 왜곡하여 공적인 언어의 적절한 사용을 혼란시킨다. 여성, 그리고 예술이 결합하는 장에서 요구되는 것은 고정된 성 정체성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과 상징을 가르는 경계지대를 유동적으로 만듦으로서, 전체성을 지닌 자아와 온전한 몸을 산출하고 구성하는 언어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지평의 확대를 통해, 비로소 작가 앞에 붙여진 ‘여성’이라는 단어는 자체적 한계나 지배적 질서의 한 켠을 차지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이항대립으로 작동하는 억압적 체계에 대한 대안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출전 | 인천 여성 미술비엔날레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2차 심포지엄
페미니즘 이론가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기관 없는 몸’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몸을 탈자연화 시킨다고 하면서, 그것이 타자의 몸과 다른 사물들의 흐름이나 분자와 직접적인 관계 속에 위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기관 없는 몸은 정신적 내부나 비밀스러운 내부가 없는 몸, 내적인 일관성과 잠재적인 의미화작용이 없는 몸 개념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몸의 조직화와 구조화, 그리고 기능화에 반대하는 것이며, 자질과 속성의 절박한 요청에 종속되는 것으로서의 몸에 반대하는 것이다. 주체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텍스트이며 담론의 공간이 된다. 거기에는 미지의 거대한 공간이 존재한다. 이 잉여의 공간에 타자가 존재하며, 또 다른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주체에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된 타자는 위험과 죽음을 상징해왔다. 이질성의 분출은 현대예술에 기괴함과 비천함이 출몰시키기도 했지만, 그 한 켠에는 신비로움이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가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도 아니며,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서 우리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는 공감(동일시)도 아니라고 말한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이며 신비와의 관계이다. 흥미로운 점은 레비나스가 타자성의 개념을 여성성과 연결 짓는다는 점이다. 여성성은 다른 모든 차이와 구별되는 차이이다. 성의 차이는 상보적인(complementary) 두 개념의 이원성이 아니다. 두 개의 상보적 개념은 그것에 앞서 존재하는 전체를 전제하고 있다. 존재자는 주체적으로 의식 안에서 자신을 실현하지만 타자성은 ‘여성적인 것’을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 레비나스에게 에로스는 타자와의 일치나 융합이 아니라, 차이를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이다. 성의 이원성을 통한 생식이나 유전적인 재생산이 아닌 또 다른 연결이 작동 된다. 따라서 하나, 또는 둘이 아닌 성을 생각해야 한다. 종횡무진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유사한 것들의 연결체는 라깡이 [사랑의 편지]에서 언급한 성, 즉 대립적인 성 관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성이고 상징적인 우주로부터 배제된 성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채워 주리라 믿지만, 열락은 늘 흘러넘치기 마련이다. 흘러넘침은 남녀가 보완의 관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남성적’과 ‘여성적’은 두 긍정적인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한 동일한 존재의 두 상이한 양상이다. 이들은 통일성으로 결합될 수 있는 두 개의 반쪽이 아닌 것이다. 성은 자연적인 소여가 아니라, 브리콜라주(bricolage), 즉 이질적인 담론적 실천의 인공적 통일이다. 브리콜라주에 의해 만들어진 상태는 항상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봉합된 구조’이다. 성 그 자체는 두 이질적인 요소들의 몽타주인 것이다. 여기에서 성은 해체된다. 통상적으로 여성과 남성은 음/양처럼 기호학적 대립을 이룬다. 여성은 실체(substance)와 현상(appearance)으로 남성인 본질(essence)과 주체(subject)에 대립해왔다. 그러나 라깡에게 남성과 여성은 전체의 보완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것들은 이러한 전체를 상징화하려는 두 실패한 시도이다. 모든 성은 결여에서 만들어지며, 남성과 여성을 욕망으로 가득한 부분적 존재로 남겨둔다. 주체에 새겨진 수많은 욕망의 틈새들은 에로스가 상징하는 바의 합일을 파열시킨다. 그것은 한계를 넘은 초과와 잉여의 영역이며, 유동적이고 끝이 없는 흐름으로, 고정된 가치에 기초한 소유 관념을 초월한다. ‘살아 움직이는 경계이며 열려진 지평’(뤼스 이리가라이)으로서의 여성의 몸이 가지는 타자성은 상징화에 저항한다.
4. 여성과 예술적 언어
정신분석학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한 현대의 담론들이 여성 예술가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종합되기 보다는 나열된 채 언급된 다양한 분야의 성담론들--종교(크리스테바), 경제(이반 일리치), 과학기술(주디 와츠맨), 철학(들뢰즈와 가타리), 윤리(레비나스), 심리학(라깡) 등--은 여성이 남성에 대항해서 주체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령 타자, 주이상스, OO되기 같은 개념들은 주체의 범주를 넘어서는 위협적이면서 매혹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여성은 이러한 해체와 흩어짐에 대한 또 다른 이름에 적합할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현실적 진실]에서 여성적 언어를 항상 뭐라 결정지을 수 없는 욕망, 다시 말해 불가능에까지 동요하는 언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상상적인 아버지가 부재한 경계의 언어가 된다. 광인의 언어와 같은 계열에 있는 것이 여성의 언어다. 여기에는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동시에 중성화시키기 위한 공통의 약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개인의 바람직한 사회화 과정에 대한 염려를 낳지만, 이를 어떻게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까가 예술의 관심이다.
심리학자들은 여성과 남성의 자아형성의 차이를 지적한다. 라캉에 따르면 소년은 자신을 남근적 권력과 동일시함으로서, 상상의 단계에서 해방되어 상징적 질서로 진입하지만, 소녀는 상징적 질서와 동일시할 수 없어 언어 없이 타자로 추방당하고 상상의 단계에 머문다. 이 상상의 단계에서 여성은 거울단계에서 일어나는 자아형성의 과정을 전도시키거나, 그것에 균열을 가한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상상계와 상징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환상성을 띈다. 상징계를 군림하는 것은 남근이라는 상징적 기표이다. 라깡에 의하면 팰러스는 가부장적 질서의 지배와 아버지의 법을 의미한다. 남자는 말씀으로 신이 되었고 말씀은 육신을 창조하게 된다. 언어적인 코드인 로고스는 포괄적인 진리가 되기를 원했다. 이 로고스는 자연과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게 하는 사고체계를 형성시켰고, 언어를 통해서 사회적 코드가 산출되고 유지된다.
주체는 이러한 상징계의 산물이지 자연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러나 원초적인 카오스의 형상은 사회의 지배적인 상징계를 뚫고 나오려 한다. 이러한 위반의 결과는 광기와 신성, 그리고 예술(크리스테바)을 낳는다. 가부장적 질서가 아로새겨져 있는 상징계에 대한 여성의 불만은 광기로 나타난다. 광기는 예술처럼 주체와 기표 사이의 관계에 연관되어 있다. 무의식은 상징계의 문법을 왜곡하여 공적인 언어의 적절한 사용을 혼란시킨다. 여성, 그리고 예술이 결합하는 장에서 요구되는 것은 고정된 성 정체성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과 상징을 가르는 경계지대를 유동적으로 만듦으로서, 전체성을 지닌 자아와 온전한 몸을 산출하고 구성하는 언어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지평의 확대를 통해, 비로소 작가 앞에 붙여진 ‘여성’이라는 단어는 자체적 한계나 지배적 질서의 한 켠을 차지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이항대립으로 작동하는 억압적 체계에 대한 대안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출전 | 인천 여성 미술비엔날레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2차 심포지엄